협약 190호와 권고 206호
ILO가 만드는 국제노동법은 두 가지 형태를 띤다. 협약(Convention)과 권고(Recommendation)가 그것이다. 1919년 창립 이래 ILO는 지금까지 모두 190개 협약과 206개 권고를 만들었다. 협약과 권고의 관계는 우리나라 법체계로 치면 법과 시행령의 관계와 같다.
협약 190호가 말하는 폭력과 괴롭힘은 "신체적 피해, 심리적 피해, 성적 피해, 경제적 피해를 끼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이러한 피해들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행위와 관행"을 일컫는다. 신체 학대, 언어 학대, 집단 괴롭힘, 성희롱, 위협, 스토킹 따위가 포함된다.
협약은 계약상 지위에 상관없이 인턴, 봉사자, 지원자는 물론 사용자의 권한을 행사하는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민간과 공공 부문, 공식 경제와 비공식 경제, 도시와 농촌 등 산업과 지역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일터의 폭력과 희롱 근절
회원국들은 자국의 상황을 고려하여 폭력과 괴롭힘에 특별히 취약한 부문과 직업, 일자리를 선정하여 노사정 3자 협의를 통해 보다 합리적인 대책을 수립할 의무를 지닌다. 이런 분야로는 밤 근무나 1인 근무가 많은 보건, 운수, 교육, 가사 업종을 꼽을 수 있다.
협약은 일터의 성적 문제, 즉 성폭력과 성희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제3자를 포괄하는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일터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제3자, 즉 의뢰인, 고객, 용역 제공자, 환자 등은 성폭력과 성희롱의 희생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협약 190호를 뒷받침하는 권고 206호는 피해자 지원과 사고 예방을 위해 피해자를 위한 휴가 지원, 폭력 예방을 위한 근무제도 조정, 의식 제고를 위한 교육 훈련 강화 등을 제안한다.
상호 존중과 인간 존엄에 기초한 일터
협약의 이행을 위한 조건으로 ILO는 각국의 노사정이 일터에 폭력과 괴롭힘 문제가 만연한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다음 단계로 폭력과 괴롭힘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튼튼히 세우고,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성적 고정관념, 불평등한 성적 권력 관계를 고치기 위한 정책적 실천적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ILO는 폭력과 괴롭힘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일터 위험 평가(workplace risk assessments)" 제도를 만들어야 하며, 이를 통해 성적 기준, 문화적 기준, 사회적 기준에서 폭력과 괴롭힘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요소들을 파악함으로써 조직 문화와 개인 태도를 개혁할 것을 요구한다.
협약은 가정폭력이 고용, 생산성, 건강, 안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가정폭력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정부, 사용자단체, 노동자단체와 노동시장 기관들이 협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성폭력과 성희롱을 포함하여 일의 세계에서 폭력과 괴롭힘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누구에게나 보장한 협약 190호는 일터에서 폭력과 괴롭힘을 예방함으로써 상호 존중과 인간 존엄에 기초한 일 문화(work culture)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문재인 정부, 협약 190호 비준해야
국제노동법으로서 효력을 갖는 ILO의 협약과 권고는 매년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ILO 총회에서 회원국 노사정 3자의 합의로 만들어진다. 당연히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는 내용의 협약과 권고는 사용자 그룹이나 사용자와 뜻을 같이하는 반노동 정부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다.
이번에 채택된 190호 협약 전에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협약은 2011년 채택된 198호 가사노동자(domestic workers) 협약이었다. 두 협약 사이에 존재하는 8년의 시차는 글로벌 수준의 노사정 관계가 노동자를 위한 국제기준 마련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현실을 보여준다.
ILO 헌장에 따라 협약 190호는 최소 2개의 회원국이 비준한 이후 12개월이 지나면 효력이 발생된다. 일터에서 폭력과 괴롭힘을 근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ILO 협약 190호는 노동 존중을 표방하는 문재인 정부의 공약에 부응한다.
대한민국이 협약 190호를 비준하는 첫 국가가 되는 것은 기대난망일까. 남북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 문제에서도 구태의연한 태도를 넘어선 상상력과 창의력이 필요하다.
우리 헌법은 국제조약을 비준할 권한을 대통령에 부여하고 있다.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ILO 협약 190호를 비준한 대통령이 2020년 6월 ILO 총회에 참가하게 된다면, 이는 퇴행 중인 현 정부의 노동 정책을 다시 한번 개혁의 방향으로 되돌릴 수 있는 모멘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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