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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불한당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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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불한당들의 시대

그림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제1부 이야기의 서막 ⑰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불한당들의 시대> 1편부터 보기



18. 호협(豪俠)들의 반란

왕의 쇠락은 급격하였다. 더 이상 명철하지도 주도면밀하지도 않았고, 겉모습은 산송장과 다름이 없었다. 민심을 마음대로 조종했던 왕의 책략과 경외심을 갖게 했던 거대한 체격은 순식간에 붕괴하듯 허물어졌다. 그러나, 스스로 성골(聖骨:윤회로 부처 일가의 성스러운 가계를 이어받은 혈통) 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왕의 명(命)은 끊어질 듯하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왕은 덕만공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너 혼자 남았으니... 죽어도 죽을 수 없을 것이며... 죽더라도 죽는 것이 아닐 것이니..."

덕만과 천명공주가 번갈아가며 국인들 앞에 미륵으로 나타났으며, 비형랑을 복속시키기 위한 음사도 두 공주가 교대로 시전 했다. 왕은 공주들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미래불의 환영(幻影)과 육체적 욕망(欲望)을 선전하고 자극하는 데에서 찾았다. 그것은 사도태후와 미실(美室)이 대원신통(大元神統:왕비 또는 첩을 배출하는 모계 혈통으로 신라를 지배했던 여성 정치 세력)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요체(要諦)이자 종지(宗旨)였다. 무엇보다, 음사(陰事:성교의 기술)로 비형랑을 심복(心腹)으로 만드는 것이 시급하고 불가결했다. 왕은 미륵상에게만 반응하는 비형랑의 욕정을 직감으로 알아차렸고, 비형랑이 공주들을 미륵으로 떠받들기만 한다면 난적들이 함부로 망동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왕의 계략은 천명공주가 임신하며 어긋나기 시작했다. 덕만공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철저하게 음사로 비형랑을 옭아매는데 주력하였으나, 둘째 딸 천명은 음사를 통해 비형랑에게서 사내의 정(情)을 느끼고 말았다.

공주들은 태생부터 월성(月城)의 깊고 깊은 지밀(至密)을 벗어나지 못했다. 공주들이 지밀을 벗어나 국인들에게 노출되는 것은 왕의 주도면밀한 계획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손끝 하나도 왕의 허락 없이는 지밀의 담을 넘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미래불 미륵으로 꾸며진 공주들의 사정(事情)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자들 또한 평생 지밀을 벗어날 수 없었으니, 비형랑의 씨를 임신한 천명공주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며 설혹 안다고 한들 발설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왕은 자신의 치세, 즉 '춘추(春秋)'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이물(異物)'이라 불리며 조롱받던 유년시절부터 황실 서고의 책을 남김없이 탐독했던 왕이 진정으로 존재의 유한성을 몰랐던 것일까? 왕의 인식은 고금(古今)을 망라한 지 이미 오래였고, 광범위한 탐구를 통해 세상의 운영 원리와 역사의 흥망성쇠를 남김없이 파악했던 왕이었다. 더군다나, 미실과의 음사에서 몸의 감각과 이로부터 유발되는 감정의 원리에 대해 과도할 정도의 경험을 했던 왕이었다.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왕의 몸에 각인되어 있다 해도 무방할 것이었다.

그런 왕이 자신의 쇠락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후사(後嗣)를 대비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절대 권력의 역설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왕의 뜻대로 이루어졌고, 과도한 계책도 마치 하늘이 정해놓은 순리인 마냥 모두 순조로웠다. 왕의 뜻은 곧 천리(天理)인 것이었다. 왕이 스스로 정반왕임을 선포해도 국인들은 털끝 하나 의심하지 않고 순순히 믿고 따랐다. 왕의 뜻과 말이 있은 연후에 세상은 온전했다. 두려울 것은 없었다. 왕은 경세(經世)의 원리를 전적(典籍)에서 더 이상 찾지 않았고 ,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의견을 묻지 않았다. 그 어떠한 일도 왕이 계획하고 비형랑이 실행하면 그뿐이었다.

황룡사 장륙존상의 완공식에서 황금빛 미륵 존상의 모습으로 처음 대중 앞에 나타난 덕만공주는 그 자리에 있던 대신과 승려들을 비롯하여 모든 국인(國人)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미륵으로 나타난 공주가 다음 왕이 될 것이란 선포는 충격에 빠진 대중들로 하여금 미처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반왕이 다스리는 불국(佛國) 신라의 다음 왕으로서 미래의 부처 미륵은 지극히 타당하고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다. 갈팡질팡하는 대중의 심리는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필요했고, 공주가 왕이 되는 것은 세상에 없는 법도였으나, 공주는 미륵으로 하생(下生)한 신(神)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런 사실 조차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와 같이, 왕의 절대 권능에 길들여진 국인은 판단의 기준을 잃고 다만 충격 속에서 왕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비형랑이 왕으로부터 갓난아이를 건네받던 그즈음...

지밀의 숲에 있던 우물이 흙으로 메워졌다. 멀쩡하던 우물이 난데없이 흙으로 메워진 연유에 대해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고, 우물이 있던 숲은 목책이 둘러쳐져 어느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

왕에게 사사건건 복종하고 왕의 하명이 있어야 행동하던 비형랑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제까지의 상황에 대해 시말(始末)을 구분하지 못했고, 감정의 근거도 알 수 없어 스스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하는지에 대해 난감해했다. 왕은 비형랑에게 새로운 이름 김용수와, 갓난아이를 하사했다. 아이는 천명공주가 낳은 자신의 아들임이 분명했고, 왕에게서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밤마다 드나들던 대궁(大宮:왕의 침전)엔 시위삼도들의 군사들에 막혀 얼씬도 못했다.

이제 김용수가 된 비형랑은 조바심을 부릴 만도 하였으나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몰랐다. 여전히 왕의 충실한 심복이자 수족으로 왕의 명을 기꺼이 따르는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다만, 갓난아이의 이름만은 왕이 지어준 무명(無名)이 아니라 춘추(春秋)라 불렀다.

김용수는 자주 꾸벅꾸벅 졸았다. 그것은 비형랑의 아주 오래된 버릇이었으나, 이제 김용수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졌는데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의 졸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의 꿈속엔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바로 천명공주였다. 꿈속의 공주는 미륵의 황금빛 분칠을 한 괴이한 모습이 아니라 복사꽃처럼 발그스름한 뺨의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인이었다. 꿈속의 여인은 속삭이듯 말했다.

"문득 봄이 찾아왔네요. 긴 겨울의 들판을 지나 봄바람처럼 당신이 찾아왔어요. 이 담을 넘어 저 성곽을 벗어나 들판에 핀 봄꽃 사이를 그대와 함께 자유롭게 노닐고 싶어요. 문득 내게 찾아온 봄님..."

김용수는 꾸벅꾸벅 졸며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문득 찾아온 봄... 봄님..."

김용수는 아이를 안고 봄꽃이 만발한 언덕 위에 산들바람을 맞으며 서있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잔잔하게 봄바람을 타고 번져갔다.

'지난밤 이슬비에 봄꽃은 진흙 속에 뒹굴었겠군요.
꾀꼬리는 날개가 젖어 님을 향해 날아가지 못하고,
월정교 앞 통구(通衢:사방으로 통하는 큰길)엔 길 잃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문천(蚊川)의 물소리에 가려지네요.

그대와 함께 덮던 붉은 담요엔 달빛이 홀로 어른거리고,
담비 갖옷엔 눈물 같은 엷은 서리가 아롱지며 내려앉네요.
날 밝는 것이 두려워 휘장으로 창을 가렸건만,
금분(金粉:금빛 먼지) 사이로 드러난 그대의 얼굴,
회오리바람처럼 어지러운 춤을 추며 허공에 흩어지네요.'

김용수는 까닭 모르게 가슴이 저려왔다. 이내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니 주체 못 할 울음이 터져 나왔다. 김용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대성통곡을 했던 기억은 없었다. 울음은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기한 것은, 울면 울수록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에 응어리지고 막혔던 것이 해소되고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김용수의 뇌리엔 천명공주의 얼굴이 더욱 뚜렷하게 그려졌고,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불명했던 공주와 함께 한 시간들이 새록새록 다시 기억나기 시작했다. 김용수는 어린아이처럼 훌쩍 거리며 품에 안긴 춘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춘추야~ 나도 이제 새로운 이름을 가져야겠다. 네 어미가 불러준 '봄님'말이다. 지금부터 이 아비의 이름은 용춘이니라. 김용춘!"


언덕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봄바람처럼 세월은 빠르고 변덕스럽게 흐르고 흘렀다. 김용춘의 아들 춘추는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였고, 정반왕이 다스리는 춘추도 어언 50여 년이 넘어섰다. 그러는 세월 동안, 스스로 성골(聖骨) 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왕의 명(命)은 끊어질 듯하면서도 계속 이어져 영원할 것만 같았다.

왕은 대당(大唐)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이웃 백제가 주재성(主在城)을 치니 성주(城主) 동소(東所)가 맞서 싸우다 죽었고, 춘삼월에 큰바람이 불고 흙비가 이레 가까이 계속되기도 하였고, 다시 대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백제의 사걸(沙乞)이 서쪽 변방의 두 성(城)을 빼앗고 남녀 300여 명을 사로잡아 갔고, 8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고, 다시 대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함으로 왕이 군사를 보내 물리쳤고,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용을 그려 만방에 붙이고, 시장을 옮겨 음기(陰氣)를 고양하여 비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가을을 거쳐 겨울 내도록 기근이 들어 국인들이 자녀를 팔아 연명하기도 하였고, 여름에 왕이 김용수와 가야 왕족의 후손 김서현(金舒玄)을 대장군으로 내세워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지금의 청주)을 공략했다. 김서현의 아들 유신(庾信)은 난공불락의 고구려 진(陣)에 필마(匹馬)로 뛰어들어 세 번을 들어갔다가 세 번을 도로 나왔다. 유신은 들어갈 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고 번절(幡節:지휘용 깃발)을 빼앗았다. 이 때문에 신라의 군세가 승세를 타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여 5,000여의 적군을 베어 죽이고 드디어 성을 함락했다. 그해 9월에 다시 대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듬해에는 대궁(大宮)의 마당이 난데없이 갈라졌다. 그 광경은 황룡사 금당 앞의 마당이 갈라지며 미륵상이 드러난 것과 같았으나,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즈음 흰 개가 대궐 담 위에 올라 기광을 떨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흰그림자가 돌아온 것이라고 궁인(宮人)들이 쑥덕거렸다. 불길한 조짐이었으나, 다시 돌아온 봄기운에 이내 묻히고 말았다.

서라벌의 봄을 알리는 선도산(仙桃山)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매년 오월, 선도산에서 부는 바람에는 그윽한 복사꽃 향이 유별났다. 그 향은 높다란 월성의 담을 넘어 궁궐 안을 훈훈한 봄기운으로 가득 채웠다.

이른 아침부터 복사꽃 향을 가르고 풍월주(風月主:화랑도의 우두머리) 김무림(金武林)이 예궐 하여 왕에게 알현을 청했다. 그는 좌우를 물리고 독대하기를 원했다. 왕 대신 공주가 그와 대면했다. 왕은 공주 뒤에 발을 치고 굽어보고 있었다. 김무림은 화랑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당풍(唐風:당나라의 유행)을 밀고했다. 그것은 호협(豪俠:호걸의 의기를 가진 자)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공주는 물었다.

"호협? 호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김무림은 공주의 뒤편에 자리한 왕의 거대한 얼굴과 몸집에 압도되었다. 그는 말하기에 앞서 입가에 침을 발랐다.

"천가한(天可汗:당 태종)의 예물과 함께 유입된 당나라의 최신 풍류이온데... 그 생각이 몹시 참람하고 과격하옵니다."

공주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람하고 과격하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아바마마께서 청년들이란 본시 과격하기 마련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여물지 않고 성근 것들의 특징이자 특권이기도 하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풍월주께서 고작 그런 일로 화랑들을 타박하고자 이리 오신 것입니까?"

김무림은 공주의 맞대응에 깜짝 놀라 공주 뒤에 자리한 왕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왕의 표정에서 일체의 움직임은 없었다. 큰 골격 때문에 깊게 드리워진 그늘 때문에 왕의 얼굴은 '훔'소리를 내며 지옥세계를 제도하는 인왕상과 다름이 없었다. 오금이 저린 김무림은 다시 입가에 침을 발랐다.

"호협들의 좌우명으로 협골향(俠骨香)이라는 것이 있사온데, 평범하고 안락한 일상을 경멸하고 협객으로서 죽음을 불사하며 대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여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일면 영웅적 기개를 북돋워 일으킨다고 볼 수도 있으나... "

"있으나?"

미륵 공주는 자신의 뒤에 자리한 부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이미 왕이 된 것처럼 따져 물었다.

"협골향을 흠모하는 사내대장부가 어찌 아녀자를 주군으로 섬길 수 있겠느냐며..."

순간, 공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으나, 왕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김무림은 왕과 공주의 눈치를 번갈아가며 살폈다. 드디어 공주가 무겁게 입을 뗐다.

"그들의 경도됨이 어떠합니까?"

"자심하여 나라의 근심이 될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선배이자 지도자로서 소위 호협들을 달래 보려 하였으나, 협골향을 모르는 자와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급기야 풍월주인 소신을 무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호협들의 우두머리는 누구입니까?"

"칠숙(柒宿)과 석품(石品)이옵니다."

"그들만 호되게 꾸짖는다면 호협들을 진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공주의 하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김무림은 또다시 입가에 침을 발랐다.

"꾸짖어서 될 정도를 넘었나이다. 그들의 기고만장함이 미륵공주님을 능멸하고도 남음이 있나이다. 불국의 안위가 걸린 문제이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김무림은 자기 수하에 있는 화랑들인데도 그들을 두려워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특히, 협골향에 경도된 호협들은 풍월주의 통솔을 벗어나 제멋대로 놀아난 지 오래된 듯하였다. 김무림은 호협들에게 엄벌을 내릴 것을 호소하며 침을 튀겼다. 공주는 김무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의 고변(告變)에는 어리고 젊은 화랑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 울분이 스며있었다. 공주는 고개를 돌려 왕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으나, 여전히 왕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김용수는 왕의 부름을 받고 조원전(朝元殿)으로 들었다. 조원전엔 공주만 있었다. 미륵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공주인데도 김용수의 아랫도리는 잠잠했다. 공주는 김용수를 거들떠보지 않고 먼 산을 보며 하명했다. 공주의 어조는 단호했다.

"아바마마의 명을 대신 전하노니... 지금 당장 칠숙과 석품을 잡아들이고, 그들의 구족(九族)까지 모두 연행하라! 그들의 죄는 모반이다!"

이미 조원전 앞마당으로 시위삼도(侍衛三徒:왕실직속경호부대)의 병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원래 삼분(三分)되어 있던 병사들이 각각 십여 개의 부대로 다시 분산되었다. 부대의 재편은 풍월주 김무림이 지휘하였다. 총 30여 개의 별동대로 재조직된 시위삼도들에게 김무림은 각각의 분대가 수배해야 할 집안의 위치와 식솔들의 명단을 나눠주었다. 왕은 실질적인 지휘를 김무림에게 맡기고, 김용수는 허울만 있는 지휘관으로 내세웠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김용수는 순순히 어명을 받들었으나 왕의 속내가 궁금하고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공주가 왕의 명을 대신 하달하는 것은 드디어, 공주의 섭정이 시작된 것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왕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공주 뒤에서 명을 내린다면 왕의 속내는 더더욱 간파하기 어려울 것이다. 골몰하는 김용수는 마치 깜빡 조는 것과 같아 김무림이 비웃었다.

시위 삼도의 말발굽 소리가 온 서라벌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시위삼도는 전광석화처럼 칠숙과 석품의 가택을 급습했다. 얼떨결에 붙잡힌 칠숙은 항변의 틈도 없이 동시(東市)의 저잣거리에서 참살되었고, 그와 같은 고조(高祖)를 둔 친족과 외조부가 동일한 일가들이 모두 척살되었다. 금세 저잣거리에 쌓인 시체가 언덕을 이루었다. 석품은 용케 도망하여 백제에 투항하려 하였으나 변경이 삼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나무꾼의 해진 옷을 입고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다시 서라벌로 숨어들었으나 잠복하고 있던 김무림에게 잡혀 죽었다. 석품의 구족도 모두 형장으로 끌려갔다. 한동안 반역 죄인들의 참수형이 계속되었다. 저잣거리에는 수백구의 시체 무지가 산처럼 쌓여만 갔다. 서라벌 전역에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하였고 인육 맛을 본 까마귀와 들개들이 생사람을 공격했다.

봄인데도 거리에는 사나운 돌풍이 쉴 새 없이 일어났고, 국인들은 문을 닫고 서로 내왕을 끊기 일 수였다.

선도산 복사꽃 향이 아무리 짙어본 들...

서라벌의 봄은 더디기만 하였다.


계속...

글 그림 : 노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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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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