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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경절에 대한 北 경축형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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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경절에 대한 北 경축형식의 역사

[기고] 중화인민공화국 70주년 풍경

10월 1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지 70년이 된 날이다. 국경절인 10월 1일엔 중화인민공화국 70주년 기념대회가 개최되고, 본 대회에 시진핑 국가 주석은 중요한 담화를 발표할 계획이다. 어느 때보다 성대한 열병식 등도 예고돼 있다.

아울러 올해는 북한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지 70년 이 되는 해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끈끈하면서도 묘한 게 있다. 중국의 국경절 이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방중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언제나 좋았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중국의 국경절을 대하는 북한의 모습으로, 북중 관계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그간 경축일들을 회고해 보도록 하자. 1950년대 중반, 중소 연합해군함대 구성 제안을 시작으로 중소분쟁이 폭발하면서, 1959년 신중국 건국 행사는 중소 지도자 사이의 마지막 정상회담이 되었다. 북중 사이는 8월 종파사건과 중국인민지원군 철군, 조선족에 대한 민족정풍운동 등으로 심각한 갈등 국면이었지만, 9월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 숙청과 북측은 중인분쟁과 반수정주의 움직임으로 북중은 상당한 이익을 공유하고 있었다. 1주일간 김일성 등 공식대표단이 방문하는 동안, 중국지도부 전원이 참석하여 수차례 환대하는 행사와 대규모 경제협력을 실시하였다.

문화대혁명 이후, 각국 대사가 소환되고, 북중 사이에 소규모 전투가 발생했고, 북한에서 화교학교가 중단되고 화교에 대한 규탄, 자치주에서 조선족에 대대적인 조선특무 색출작업이 벌어졌다. 더불어 중국은 원유를 비롯한 경제협력을 일체 중단하였다. 1968년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1969년 중소 사이에 각각 백만대군이 국경에서 무력시위를 하고 우수리강 전바오도(다만스키)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지자 북중 사이에 관계회복의 움직임이 있었다.

9월 호치민 사망으로 최용건이 북경을 경유하여 하노이를 방문하면서, 이 기회에 북중 고위급 회담이 재개되고, 9월 30일 중국 지도부는 극적으로 신중국건국 20주년 행사에 북한측을 초청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일 새벽 최용건을 대표로 하는 지도부가 천안문 성루에 올라서 마오쩌둥과 관계회복을 약속하였다. 양국은 원유를 비롯한 대규모 경제협력을 재개하는 10년 장기무역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1979년 10월, 국경절 행사는 국내적으로 치러졌다. 중미수교와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베트남의 캄보디아 진공과 중월 전쟁 등으로 중국은 다수 사회주의권과 긴장국면이었다. 개혁개방을 둘러싼 북중 갈등에도 불구하고, 5월 덩잉차오 여사가 흥남비료공장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 동상 제막식을 개최하고, 베트남 지원 원유를 북한으로 전용하는 등 북중관계는 상당히 양호한 상태를 유지했다.

10월 1일 중국측 사정에 의하여 북한 지도부가 참석하지 못했지만, 당일 로동신문의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중국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도하였다. 반면 1969년 10월 1일 로동신문은 최용건이 북경을 방문했지만, 매우 간략하게 보도처리하였다.

1980년대 동서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한국과 사회주의권 교류, 서울올림픽 참가 등으로 북중 갈등은 증폭되고 되고 있었다. 1959년 10월 이후 30년만에 5월 천안문에서 중소 정상회담이 달성되었다. 그 직후 천안문 사태로 중국은 개방에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당시 북한은 군부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중국해방군을 입장을 지지하면서, 북중관계가 갈등에서 일시적 협력을 달성했다. 국경절에 김영남 외교부장(부총리)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 각국 간의 경제협력과 국교정상화는 급진전하는 국면을 맞이하며, 북중관계는 구조적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1999년 국경절은 이전과 비교하여 상당히 평온하면서도 동시에 중국굴기를 전세계에 인상 심어주었다. 한중수교 이후 북중관계는 고위급 인사교류가 상당히 제한되었다. 김일성 주석 사후 고난의 행군과정에서 중국의 다양한 원조, 특히 인도주의적 경제원조는 북한 체제 유지의 원동력이 되었다. 8월 김영남 상임위원이 북경을 방문하여 고위급 인사교류가 재개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북측은 대표단 파견을 하지 못했다.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에서 김영남 등 북한 주요인사가 참여하는 기념행사를 치르고, 로동신문 등에도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축전을 보냈다는 기사를 소개하였다.

2009년 국경절에 북측은 축전만 보냈다. 그러나 제2차 핵실험과 김정은 후계승계를 둘러싸고 중국은 제재에서 적극적 개입으로 전략 전환이 이루어졌다. 경제협력에 대규모 인프라 지원이 포함되고, 원자바오 총리의 수교 60주년 기념 방문 등 양국 지도부의 본격적인 상호방문이 재개되었다. 제1차 핵실험 이후 중국은 대북 제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대북 영향력이 축소된 점에 배경으로 전략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북중관계의 협력과 갈등의 부침이 그대로 국경절 행사에도 반영되었다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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