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지역 근현대사를 아울러 처음으로 고찰하는 학술회의로서 부산경남지역 역사 연구자 모임인 부경역사연구소 주관으로 일제강점기 김해지역사와 김해 사람들의 일상사를 깊이 있게 다뤘다.
이번 학술회의는 일제강점기 김해 사람들의 ▲일상생활 ▲위생정책 ▲지방통치 ▲임야조사 등 4개 분야 연구자료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무엇보다 이번 발표에서는 김해에서 벌어진 일제의 사회경제적 수탈 양상과 이에맞서 꿋꿋하게 삶을 이어간 김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다 김해의 역사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역사문화도시 '가야왕도 김해'를 더욱 발전시켜나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먼저 발표에 나선 차철옥 부산대 교수는 "식민지 말단 행정기구인 면(面)의 농촌 지배력 또한 파열음을 내었다"며 "치도사업을 비롯한 부역은 농촌 농민들의 시간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했고 농민들의 일상을 더 바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손숙경 동아대 교수는 "식민지 시기 의생(醫生)들은 양의가 부족한 현실에서 진료를 비롯해 지역사회 위생관련 행정실무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나갔다"면서 "김해지역이 경남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 때 비교적 많은 의생수가 배출되었다. 그것은 부산부의 배후지로서 근대 직업군이라 할 수 있는 의생제도에 빨리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전성현 동아대 교수는 "김해읍세는 처음부터 중과세였다"고 하면서 "개정과 폐지는 모두 상위 행정기관의 통첩에 따른 부담 가중으로 일관했다"고 밝혔다.
또 전 교수는 "읍규칙의 제정권이 없었으며 읍회에서 논의한다고 해도 강제력이 없는 '의견서' 제출만이 유일한 통로였다"며 "당연히 그 의견서는 도지사와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고 분석했다.
이른바 지방통치는 읍(邑) 자체의 논의 구조와 의결기관인 읍회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로부터 읍으로 내려오는 수직적인 행정체계가 지방통치의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강정원 부산대 교수는 "김해군은 경남에서 가장 분쟁이 많이 발생한 지역이었다"면서 "김해군 내에서도 하동면의 분쟁이 높았다. 하동면은 신어산과 백두산, 까치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으로 낙동강과 평야를 끼고 있으며 지리적으로도 부산과 경계를 접하고 있어 조림에 성공하면 산림산야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을 지녔기 때문에 대부자들의 선호도가 높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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