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대를 줄이는 것도 인격적이다**
자기보다 직책이 낮은 자리에 일하는 사람에게, 또는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해' 라고 하대하는 것도 한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상대가 어떤 위치건 동등하게 인격적으로 대하는 경우는, 하대하는 말을 쓰게 되지 않는다. 서로를 존중해 주는 사회는 인격으로서 서로 인정함이 있겠고, 이 부분에 대한 각성이 우리 사회에 더욱 더 필요하다고 느낀다.
실제로 말이 입을 떠나는 순간에 말하는 사람이 스스로 느끼는 점은 '...해요'하면 말의 꼬리가 내려가고 부드럽게 되어 충고하는 투가 되고, '...해'라는 말을 해 보면 명령조가 됨을 금방 느낄 수 있다.
명령만 받는 사람으로보다는 인격으로 존중받는 사람이 많아져야 됨은 물론이다. 아이를 교육하는 차원에서 어린 경우라도 이것을 실천해 보면 이 차이를 알 수 있고, 물론 명령형의 어미를 쓰기보다 권유형을 사용하는 경우 아이가 인격적이 되는 것을 느낀다.
***야자타임을 보면서**
선배한테 반말 좀 했다고 시비를 걸고 싸우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많은 현실을 볼 때 이런 일들이 줄어들려면, 상하관계에 의한 존비칭 사용들이 오히려 적어져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아이들 사이에 선후배간에 '야자'타임이 있다면, 후배들은 아주 즐기는 것을 보게 된다. 거꾸로 말하면, 그동안 후배들은 사회적 압력을 '억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싸울 때 어른도 '...요.'를 하면서 인격적으로 대화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에야, 혹시 형제자매의 싸움에서 작은 애가 위아이에게 싸우다가 반말했다고 그것만을 가지고 야단치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
"너 형한테 까불어.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것이지..."
"형이면 다야. 하기 싫다는데 왜 그래."
"너 형한테 반말 썼어...요개..."(한방 때림)
형제 자매간에 이런 싸움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적어도 한가지 불합리한 점을 볼 수 있다.
반말은 싸울 때도 안된다?
그렇지만 이때 반말로 싸우는 경우 서로의 인격을 생각지 않는 상태가 쉽게 되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이 그대로 도출되어서- 결말에 갖는 감성들에 상처가 심하게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필자도 써먹는 방법이지만, 혹시 아이들이 서로 논쟁을 하거나 싸울 때 '서로 하대만은 하지 말아라. 반드시 ...요를 붙혀라' 라는 단 한가지의 싸움규칙을 정해주고, 그것을 무조건 따르면서 싸우도록 하면 대개는 '좋은' 결말을 가져온다.
***'님'과 '새끼'의 야누스**
우리 사회에서 큰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회사를 다닐 때, 그 어른은 난감한 - 별 것 아닌데 별 것으로 느끼는 - 경우를 가끔 겪게 된다. 밑의 사람이 불러주는 '000대리님'과 윗사람이 부르는 '000대리'의 차이 속에서 스쳐가는 감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앞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과장자리에 오른 사람이 나이가 자기보다 한참 어린 경우나 여성이 상위직급에 있는 경우, 이는 더 더욱 심각해진다.
우리나라 남자들의 경우 유독 자존심이 강한 것은, 가부장적으로 키워진 가정 탓이다. 문제의 남자가 가장이고 집안의 기둥으로, 또 존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로 키워졌지만, 회사의 조직에서는 말단 사원에 불과하고 만년 대리라는 심리적 괴리는, 당연히 위스키나 소주 소비를 지나치게 만드는 원인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직장에서의 호칭에 000님을 차라리 모두 제거한 사회가 되었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갈등요소를 더 적게 가질 것 같다. 직장에선 000님이지만, 술 한잔 들어가면 동물새끼 취급을 하는 모순이 적으려면 말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은 사실 '생각해 볼만한' 문제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변화의 물결을 가져오기는 어렵다. 현실적으로 절충안이 있다면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래 위치의 사람이 나이가 많은 경우, 000대리, 000과장 하는 식의 직책만 부르게 하도록, 먼저 제시하는 절충안도 좋을 것 같다.
나이에 의한 관계성립이 기본이 된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절충안이 자리하는 데도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일사불란한 지위체계를 선호하는 사고방식이 우선인 사회가 계속된다면 이러한 생각이 현실에 뿌리내리기는 더 더욱 힘들 것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변화에 유동적인 우리 사회에서 한번 시도해 볼 일은 아닐까...
***관계의 윤활유: '고미안실'**
서양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불쾌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지나가는 사람을 치고는 '미안하다'는 말없이 지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고맙다', '미안하다' '안녕하세요', '실례합니다' 따위의 가벼운 타인 배려의 말들 가운데, '안녕하십니까'라는 말 이외에는 나머지 말들은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서구사회나 이를 받아들인 일본에서 보면, 이런 배려의 말들이 너무 일상화되어 있어서, 오히려 우리들에게는 맘에도 없는 인사성이 그저 습관적으로 보이긴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런 말들의 잦은 사용은 인간관계나 사회의 분위기를 가볍게 하는데는 분명 유용한 사회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우선 상대에 대한 이런 배려의 말들은 사람들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고... 혹시 생기는 '싸움으로 갈 수도 있는 상태'를 풀어 주는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이들 말 가운데서도 안녕하십니까 라는 말 이외에는, '미안하다'나 '실례한다' 는 말을 하기가 어색하다는 것은, 우리의 사회구조가 위아래의 상하개념으로 되어있어서, 말을 올리거나 하대하는 구조에만 익숙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본인이 윗사람이라 생각할 경우, 미안하다던가 실례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는데,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요구를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집안에서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자주 쓰는 어른이 있는 경우, 그 집은 훨씬 민주적 분위기가 될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말들**
'고미안실' 습관들이기는 사실 우리나라 유치원의 커리큐럼에도 보통 들어있긴 하다. 하지만 실제로 집에서 또는 거리에서 쓰여지고 있는 것은 안녕하시냐는 안부를 묻고 답하는 정도인 것이다. 사실 우리사회에서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가 다른 어른을 보았을 때, '안녕하세요' 인사하지 않으면 큰 실례인 것처럼 강조 아니 강요하는 편이시다. 이는 우리나라의 예에 대한 개념이 상하개념으로만 익숙해 왔기 때문에, 웃어른에 대한 예의만을 더 중시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의 예의란 '모든 타인에 대한 배려를 표현하는 것'이다.
한 아파트에서 시끄럽게 하지 않는 일,
시간 약속없이 무단으로 타인의 집을 방문하는 일,
공공 장소에서 시끄럽게 하는 아이를 둔 엄마,
말을 크게 해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 등등
이 모두가 타인, 이웃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높힘말이 통용되고 있는 풍습은 때와 장소에 따라 또 어른의 사회에서는 그런대로 잘 지켜지고 있다. 하지만 이와 아울러, '누구나에게 부여된 인간의 기본권'에 대해, 즉 거리에서 만나지는 타인에 대해 좀 더 가벼운 예(禮)가 생겨나도록 할 시점에 온 것 같다.
인간관계를 어떤 위계 속에서 보는데 익숙해 왔고 또 가족중심 시선으로 타인을 보는 우리 사회에서는, 스쳐지나갈, 거리에서 만나지는 타인에 대해서는 그 인식 자체가 없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목소리가 커지거나, 거리에서도 시비가 오가기 쉬운 상태를 보여주는 일상의 드라마들을 보면, 이 타인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또는 '상대를 배려하는' 언어사용이 적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참고로 이런 것에 관심을 둔 비교문화사회학 한 연구를 보면, 서로 다른 사회의 목소리들을 녹음해서 그 파장의 차이를 비교해서 그 원형을 찾는 연구도 있다)
필자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외국에 나와서 교육받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이 때 새로운 타문화에 그 적응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타인에 대한 배려하려는 마음이 없어서 동료와의 갈등이 일어나는 것 때문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 머리도 좋고 똑똑한 것 같지만, 혹시 친구관계에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 보면, 자기위주로만 생각하거나
타인의 말을 기다려주지 않고 말하거나 미안하거나 고맙다는 말들을 쓰지 않으므로... 특별한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갈등이 쌓여서 동료간에 사이가 벌어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평등적 배려의 말들이 들리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가정에서부터 '고마워', '미안해' 라는 어휘가 어른들로부터 우선 많이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말들을 사용하는 습관이 늘어나면, 결국 사회가 밝아지고, 이러한 타인의 배려에 대한 교육은 분명 사회적 관계의 윤활유가 됨은 물론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언어가 사회 전체를 리드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사회에 공교육을 위한 광고가 매스컴을 타고 있지만 이곳 현재 필자가 머물고 있는 사회의 공교육광고를 보면 상업광고 못지 않게 잘 만들어 사회전체를 교육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회가 안정되고 질서가 잡혀있다고 여기게 된 이 사회에서도 부단히 이런 식의 공교육방송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이런 식의 공교육방송이 중요한 사회의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최근 보게된 TV 공교육광고가 이 글과 연관되므로 소개하기로 한다.
"무게가 조금 나가는 한 아빠가 자신의 아이가 옆에서 보고 있는데 우유를 컵에 따라 먹지 않는 경우, 엄마가 아이가 보고있는데 거리의 차 속에서 다른 차에게 소리지르는 경우.. 등등의 네 가지 스케치가 있은 후에 곧바로 "아이가 어른의 행동을 그대로 따릅니다" 라는 멘트가 나오고 다시 어른들의 바른 행동이 이어지고...또 같은 멘트"아이가 어른의 행동을 그대로 따릅니다" 가 반복된다.
이런 공교육 광고들이 제작될 때, ‘교육적’냄새보다는 좀더 유머감각이 있고 마음이 동하는 스케치로서 우리 사회를 이끄는 기관차 역할을 해 주면 좀더 빠른 사회개혁을 가져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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