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유서는 비공정의식을 키워준다**
우리나라 풍습으로는 집안의 대물림을 장자에게만 해 주려하지만, 중국에서는 장자가 대목(大木)이 아니라면 작은 아들에게도 준다고 하며, 일본의 경우 사위에게나 또는 장인정신이 뛰어난 외부인이라도 집안에 들여서 대물림을 시킨다고 한다.
이런 풍습차이를 보면, 우리는 우리나라 사고방식이 얼마나 명목적이었는가 알 수 있으며, 장유유서를 지켜야한다는 -즉 명목가치가, 실제가치보다 우선되는- 주자학적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지키려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위아래의 구분에, 남녀 차별의식까지 첨가하면 그 비평등함을 지나치게 명목적이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장유유서라는 질서가 공정성을 멀리 할 때**
아이들을 적게 갖는 요즘의 우리 사회의 핵가족추세를 보면, 윗아이의 중요성이 많이 희석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형제자매를 둔 경우, 일상에서 중요사항을 윗아이에게 중심으로 두는 경우가 많다.(물론 이때 남자애냐 여자애냐의 차이가 주는 극명한 잣대를 섞어 놓지 않았을 경우를 말한다.)
이렇게 윗사람에게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많이 부여하고, 아우는 어리니까 귀여워만 하게 되는, 즉 윗사람의 성격과 아우의 성격을 심하게 구분해서 교육시켜온 나라도 드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일상에서 형제 자매간에 장유유서라는 '질서'가 중시되지 않는 나라로 이사와서 사는 경우나, 우리사회에서라도 '인간 대 인간' 사이의 사건에서 공정성이라는 이슈와 부딪혔을 때 하나의 문제로서 눈에 띠게 나타난다.
캐나다에 이민온 지 7년차 되었다는 청년의 말을 상기해 보면, 나이에 따른 우리나라 사회에서 있던 위 아래의 구분이, 실제로 횡렬식 사회인 서구사회에서는 큰 장애가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요즘 이민온 아이들은 한국에서처럼 형·동생을 자꾸 따져 갈등을 일으킵니다. 때문에 제가 다니는 교회의 경우 청년부가 영어권과 한국어권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최근 이민이 크게 늘어나면서 생겨난 새로운 현상인데, 이런 갈등이 안타깝다고 했다.
필자는 이곳에서 이민온 지 오래된 세대와 최근에 이민 온 세대간의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서로 거리를 두고 살게 되는 것을 많이 본다. 즉 형아우 관계를 아주 중시하는 권위적 사고의 사람과 누구나 평등이라는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부딪혀서, 결국 서로 다른 문화권이라고 서로 경원시하게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와 서구사회가 이미 왕래가 많아진 현시대에 살면서, 서로의 문화권 즉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같은 동족끼리도 같이 호흡할 수 없다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우리나라 전통적인 장유유서적인 사고는 우직하게 지켜낼 문화가 아니라 가볍게 느끼는 전수될 문화향기 정도로만 지켜지면 좋겠다고 여긴다.
장유유서가 사회적 관계에서 하나의 질서로서 굳게 자리잡는 것은 이미 시대적 착오라고 생각된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할 권리가 있다라는 대명제 앞에서, 장유유서의 자리매김이라는 소명제가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속에서만 보더라도 일상에서 아이들끼리 어떤 싸움이 일어났을 때, 우리 어른들은 그 원인을 캐기 전에
우선 윗아이에게 싸움에 대한 최종책임을 지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사건이 동생의 잘못이었다고 해도,
그가 울어버리면 부모는 달래느라 그 원인을 일일이 캐보지도 않고, 사건의 무마하는 것에 더 치중을 두게 되기 쉽다. 그러니 동생은 더 응석받이로 크게 되고 윗아이는 공정성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간에 어떤 사건이 일어 났을 때, 부모는 또는 어른들은 그 사건 자체의 원인규명을 하고 잘잘못을 따지는 데 초점을 맞추어 한다.
판사가 공정성을 잃으면 안되는 것처럼, 부모는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던지 둘 다의 잘못인 경우도 둘 다의 잘못에 책임을 물어 야단쳐야 한다. 이때 "그래 형제끼리 싸우면 안돼. 그러니 화해해라"는 원칙만을 뭉뚱그려서 말하면서 수습한다는 것은, 사건은 겉으로 무마되었다해도 아이들 내면에서는 큰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우선 '사건의 무마를 어떻게 해서든 시키면 된다'는 결과적인 단계에만 치중하게 되고, 원인규명을 안한 채 넘어 가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원칙론은 아이들이 알아야 할 옳고 그름의 투명성을 어렸을 때부터 잃게 되는 일이다.
사실, 야단맞을 짓을 한 애는 야단 맞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있고 그래야 개운한 기분이 되며, 억울하게 싸움에 말려든 애는 자신의 결백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게 됨은 당연한 인간의 마음이다.
우리사회에 공정성과 투명성이 없어서 문제라고 말들 하지만, 이것들은 가정에서부터 소소히 실천되면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선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사과 한 개를 통째로 가지려고 형제자매가 싸운다면 어떤 방법이 현명할까?
동생이 울고 있으니까 윗사람에게 양보하라고 해야 할까?
윗사람이 한번 양보하면, 동생은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떼를 쓰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동생이 울더라도) 두 쪽을 내어 반개를 두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만약에 동생이 한 개 모두를 주지 않았다고 계속 운다면, 우는 것이 듣기 싫어서 야단칠 것이 아니라, "네가 00이라면 어떻겠니" 하면서 상대의 권리들을 충분히 인지시켜야 한다.
그래도 운다면 실컷 울게 해서라도 자신이 스스로 우는 것이 '잘못'임을 스스로 이해하게 하고, '어리다고' 봐주는 것은 사회의 응석받이로 키우게 되는 교육방법이다.
작게는 아이의 성격조성이지만 크게는 한 사회의 상식적 태도가 있느냐 또는 공정성이 사회의 기본이 되었는가와도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인식은 중요하다.
필자는 경험상, 서구식 가정과 한국식 가정문화의 차이를 인식할 기회를 많이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서구의 일반가정을 보면서 강하게 느끼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의 기본인식이 '나이차이'가 아니라 '같은 위치의 가족구성원임'을 강조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서구가정에서 아이들이 싸우는 경우가 생겼다면, 어떤 특정한 아이가 잘못했을 경우 손님이 있음에 상관치 않고 잘못된 것을 그대로 지적해주는 어른들을 자주 본다. 또 야단칠 일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특히 음식을 나눔에 있어서도, 어떤 가족중의 '권위'자에게만 맛있는 것이 가지 않고 모든 것을 작은 조각을 내어서 조금씩 '좋음'도 나누고, 혹시라도 전에 먹던 음식이 남아서 처지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해도 어떤 특정한 위치의 사람이 그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모두들 공정하게 나누어 조금씩 '싫음'도 나눔을 본다.
이러한 가족내에서 교육되는 공정성과 동등함의 원칙은 이들 사회의 밑바탕이 될 것이라 함은 굳이 이 글의 사족이 될 것 같다.
우리사회도 핵가족이 일반화되어, 사실 한 집안에서 위 아래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공정성문제가 많이 희박해졌다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가족주의적 사고방식이 기본이 되었던 인식패턴은,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이 이익사회의 현대에 사는 우리인식의 기반으로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손위되는 사람이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고, 반면에 동생되는 사람은 어떤 부탁을 하는데 어려워 하지않는 편이고 잘못을 해도 봐달라는 식으로 응석을 부리는 일이 많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피 하나 섞이지 않은 관계에서도, 나이 하나만을 가지고 호형 호재하는 것을 놓고 볼 때, 이것 자체가 좋은 방향일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친근한 가족적 분위기라는 우리 사회의 감성 쿠션은, 한편으로는, 이익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와는 다른, 푸근한 정(情)적 분위기를 주지만, 다른 한편 어떤 갈등이 있을 때 공정성이 없어진다는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철면피가 더치페이를 만났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떤 만남에서나 가장 최초로 문제 삼는 화두는 '나이'다. 어렸을 때부터 체득화된 풍습인 '비혈연 관계라도 형 아우를 구분하는 습성'은, 윗사람이면 너그러워야 하고 아우면 윗사람에게 기대는 관계로 가게된다.
보통 때는 이 정서가 그리 문제를 야기하지 않지만, 이 관계가 어떤 잇속을 따지게 되는 사회적관계가 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나이 많다고 경제적으로 넉넉하라는 법이 없건만, 쉬운 예로 밥을 같이 먹자해서 먹는 경우 윗사람이 돈을 지불하게 되는 경우가 아직은 많다.
이때 윗사람이 돈이 넉넉한 경우가 아닌 경우 문제의 심각성이 불거진다. 심리적으로 윗사람은 베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기 때문에 돈을 지불해 주어야 마음이 편한 상태가 되지만, 그럴 수 없다라는 현실에 기분이 상하게 되고, 아랫사람은 돈을 지불하고 싶어도 윗사람이 기분상할까 하는 것을 또한 염두에 두게 된다.
혹시라도 이 아랫사람이 아예 윗사람의 호주머니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철면피족일 수도 더러 있다. 이 경우 문제가 더더욱 심각해지고 복잡해진다.
'주고받기'라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돈에 얽힌 경제관념이라는 것이라기보다, 생활에서 행해져야할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 상식이 돈이나 물질이 오가는 상황에서 더 분명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더치페이는 16세기에 세계상권을 쥐었다는 네덜란드식 상도덕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앞서 말한 그 철면피족이 더치페이를 습관화한 윗사람을 만났다고 하자. 이때 윗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철면피족은, '거참 인정머리없는 냉정한 사람'으로 생각되고 서먹서먹한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나이에 의해서 위와 아래로 구분되어진 공동사회의 한 풍습은, 이제 이해관계가 실제로 얽혀있는 이익사회에서는 갈등요소로 이미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장유유서의 질서를 사회의 미덕이라고만 해버리기에는 때로는 그 삐걱댐의 결과가 너무 크게 보인다. '한쪽으로 기우는 관계의 청산'이 평등관계라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모두들 더 넓은 의미의 더치페이족이 될 필요가 있다.
사실, 이와 같은 이유때문에,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나 회사에서는 이 주고받는 사고 (넓은 의미의 더치페이)를 생활화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회사라는 첨예화된 이익사회를 벗어나서, 선후배 관계라던지, 한 가족 내에서라든지 한쪽으로 기우는 잣대에 의해 발생되는 삐걱댐은 아직 비일비재하다.
***위 아래가 바뀌었을 때의 속쓰림**
장유유서의 질서가 바뀐 경우, 문제가 조금더 심각해진다.
가령 직장상사가 '어린 녀석'이라던지, 아랫사람이 경제적으로 눈에 띠게 나은 생활을 하는 경우, 나이는 한참 어린데 손위동서가 되어 있는 경우...이런 경우 심리적으로 습득되었던 장유유서의 질서가 마음속의 갈등을 자아내게 된다.
나이어린 상사에게 깍듯이 존칭을 붙혀야 된다면...
또 아랫사람이 삼계탕값을 서너번이나 내어 주었다면...
나이 어린 손위동서에게 깍듯하게 '형님'이라는 칭호와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면...
그 속들이 아리고 쓰린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틀어진 갈등관계는 이 현대사회에 올수록 그 농도가 희석되긴 하였지만 횟수나 기회는 더 많게 된다.
직장이란 것이 우선 실력에 의한 것이므로 나이와는 일단 무관하게 돌아간다는 것, 호주머니 사정이란 것이 어디 나이와 관련이 있을 리 없다는 것, 나이차와 상관하지 않고 결혼하는 커플이 늘었다는 것...
이미 우리사회는 예전과 다르게 복잡한, 그래서 그 순서나 질서가 나이에 의해서만 매길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나이순으로부터 사고하기 때문에, 심리적 갈등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설령 본인은 이를 털어버렸다고 해도 가족적인 사회의 '눈'들이 끊임없이 관심을 두고 있다는 그 한계를 느끼게 되고... 다시 이를 갈등하는 심리적 이중고를 겪게 된다. 사회에서 어렵게나마 할 수 있는 장유유서의 질곡을 깨버리는 방법은 언어사용에 있다.
존칭 비칭을 줄이고 대등한 관계로서의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 한 마디로 우리사회에서 좀더 객관적인 칭호, 즉 '씨'나 '님'이라는 칭호를 많이 쓴다면, 이런 물리적 변화로 사람들 인식까지 바뀔 수 있다고 본다. 인간 하나 하나에게 동등한 개개의 인격체임을 부여해 주는 말은 평등관계에 기점을 둔 인간관계를 키우게 된다.
나이가 많은 것은 좀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상대적으로 많이 갖았다는 것이 외에 무슨 차이를 둘 수 있을까. 나이라는 척도 하나만을 가지고 서로 기대고, 바라고, 선심쓰는, 우리 사회의 감성적인 부분이 적어져야만 소위 상식적이고 공정성이 살아있는 사회로도 나아 갈 수 있다.
***타인에 대한 예의**
우리말을 보면, 그 존비칭어미가 다양하게 발달한 것을 특히 느끼게 된다. 이는 또한 외국인들이 한국말을 배울 때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이 유례가 드물게 발달했다는 상하구분이 분명한 어미들은, 물론 바로 유교적 사고체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은...' 하시면서 이 존비칭 사용을 못한다고 걱정하시고, 학교 프로그램에서는,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는 청학동 서당식의 존비칭 어미들까지도 '학습형태'로 가르치며 강조되는 것을 보면, 실제와 이론과의 거리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존비칭들도 시대가 지나면서 이미 많은 부분 없어졌다. 그 이유는 물론 언어는 사회가 바뀜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아버님, 진지 드셨는지요.'는 '아빠 식사하셨어요?'로, 또 더 일상적으로 '아빠 식사 했어요?' 하고 말하는 사고체계로 또 다시 '아빠 밥 먹었어?' 로 서서히 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들 가운데는 아직 이 존비칭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신세대에게는 이미 다른 세대의 말이 되어버리고 있을 것이고, 어른들이 원하던 원치않던, 우리 사회가 권위의 세계에서 이미 평등의 관계로 나아갔다는 말이다.
***상하개념이 줄어드는 언어의 현상들**
다른 나라 언어의 발달을 살펴보아도, 그 사회의 사고가 변천되었음을 알 수도 있다. 독일어나 불어, 영어 모두, 전에 사용하던 높힘말의 형태가 많이 사라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가령, 영어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직책이 자신보다 높다고 곧바로 'sir'나 'madam'을 쓰는 경우는 요즘 드물다.
마찬가지로 독어의 Sie나 불어의 Vous같은 존칭들도 Du, Tu의 평준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되었다.
신분사회에서 계약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짐에 따라, 신분이 잣대가 된다기보다는 이런 호칭이 변화된 것은 처음에는 존칭을 부르더라도 친해지면 곧 평칭을 사용한다는 '친한 정도'에 따르게 되었으며, 이들 사회에서는 쉽게 이 친할 수 있는 범위를 일단 열어놓는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직책이 높더라도,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그냥 부르게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혹시라도 상대편이 지나친 존칭 사용한다면, 상위직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한 불편함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기까지 하다.
한 마디로 이들의 호칭의 변화를 보면 과거 신분사회로 부터 현대에 올수록 나이나 직책에 관계없는 평등사회로 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상에서도 이들 언어에 'would you...'의 형태로 쓰이는 말들도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한 사회의 권위구조가 평등구조로 바뀌었다는 것을 그대로 말해준다. (물론, 이때 권위구조가 강하게 존재하고 있는, 예를 들어 영국의 황실에서 쓰고 있는, 말들은 아직 높힘말이나 권위를 인정해주는 호칭 사용을 그대로 있다.)
한 마디로, 존칭이란 권위적 관계에 의거한 사회가 계약에 의한 평등관계로 나아갈 때 퇴색됨을 본다.
행정직에 종사하는 자들의 '특권의식'이 적어져서, 어떤 특권을 가진 자들도 사회의 '일환'으로서 그 직책을 수행한다는 뜻으로 직책에 붙던 존경의 뜻을 가진 말들도 현대사회에서는 사라지는 것이다. '...대통령 각하'도 '...대통령'정도가 된 것이다.
우리사회로 돌아와 보면, 의사, 검사 등도, 하나의 직업으로 즉 돈벌이의 수단으로 그 직업을 택한 경우가 많다. 혹자는 직업 고유의 나름대로 숭고한 이념이 있겠지만, 기실은 돈과 명예를 얻기위해 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의사 선생님'이라는 말 대신에, '의사 ...님 계세요? 바꿔 주세요' 정도로... 언어의 민주화가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또 바뀌는 쓰여지는 행동들이 언젠가는 있을 것이다.
이런 행동들이 이어질 때, '선생님'이란 원래의 뜻이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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