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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불한당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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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불한당들의 시대

그림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제1부 이야기의 서막 ⑮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16.미륵공주의 현현(顯現)

장륙삼세불 앞으로 천가한(天可汗:당 태종)의 선물이 줄지어 들어왔다.

내관과 사인들이 삼채(三彩)의 빛으로 장식된 화려하고 기기묘묘한 도자기를 하나하나 펼쳐 보였다. 대신과 화상(和尙:고위 승려)들을 비롯한 대중들은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광채에 놀라고, 일찍이 없었던 크기에 다시 놀랐다. 낙타와 당인(唐人) 형상의 도자기는 그 정교한 만듦새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옥피리 소리를 내며 우는 야명조(夜鳴鳥)를 비롯하여, 금강신상의 이마에 끼워 넣는 보석으로 유명한 명주(明珠)는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영롱한 빛을 뿜었다. 금함(金函)에는 일 촌(寸)이 넘는 크기의 오색 보석이 찬란하였고, 밤에도 빛을 내는 야광주가 은 냄비와 주병 속에 아무렇게나 담겨 있었다. 뒤를 이어 거센 바람과 파도를 그치게 한다는 정풍침(定風針)과 소금을 먹고 진주 똥을 싼다는 오귀(烏龜) 모양의 검은 돌, 사람 몸속의 기름으로 만든다는 옥랍촉(玉蠟燭)을 비롯하여 진귀한 향초(香燭) 수십여 개가 비단 보자기에 싸여있었다.

당(唐) 황제가 보낸 선물 구경은 계속 이어졌다. 호국(胡國) 왕자 뱃속의 괴병(塊病)을 완치했다 하여 천금을 호가하는 소어정(銷魚精)과 함께 진귀한 약초 냄새가 장내에 퍼졌다. 물에 넣어도 젖지 않고 불에 던져도 타지 않는다는 빙잠사(氷蠶絲)로 짠 비단 수십여 필을 내관들이 들어 보였다.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에 다들 어안이 벙벙할 정도여서 거대한 상아(象牙) 조각이 흔한 돌덩어리로 여겨졌다. 이번에는 내관들이 백옥으로 만든 합자(盒子)를 들어 보였다. 그 속에는 파란빛의 청니(靑泥)가 가득 들어 있었다. 오로지 황제의 서간을 봉니(封泥)할 때만 쓰이는 진귀한 흙인데, 이제 정반왕의 서간도 그리될 참이었다.
이어서 다섯 자가 넘는 황금빛 횡축(橫軸:가로로 길게 꾸민 족자)과 종축(縱軸:세로로 긴 족자)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펼쳐진 족자에는 서성(書聖) 왕희지를 비롯하여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의 글씨가 있었다. 대신과 화상들이 앞을 다투어 족자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말로만 듣던 중국 명필들의 현묘한 자법(字法)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일절일휘(一折一揮:꺽이고 휘갈기는 붓의 움직임)를 신랄하게 따지며, 측(側,점)과 늑(勒,가로획)과 노(努,세로획)와 적(趯,갈고리모양의 삐침)과 책(策,오른쪽 치킴)과 약(掠,왼편의 긴 삐침)과 탁(啄,왼편의 짧은 삐침)과 책(磔,파임)에 대해서 구재(口才)를 남김없이 털었다.

그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필치 하나하나에 드러나는 천하제일의 묵적(墨跡)에 다시 한 번 감탄을 쏟아냈다. 그 뒤를 이어 삼색(三色)의 모란꽃 화본(畵本)이 펼쳐졌으나... 있으나마나 했다. 대신과 화상들은 이미 명필들의 진적(眞跡:친필)에 관심이 쏠려 모란꽃 그림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천가한의 선물은 그 종(種)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진귀한 것을 총망라하였고, 그 양(量)에 있어서도 일찍이 신라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을 통일한 천가한의 배포는 이와 같았다.

그러나...

황제의 예물이 이와 같았음에도, 장륙삼세불의 미래불 석상을 보기 위해 모여든 대중들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예물을 실은 수레 행렬이 모두 끝났을 때, 왕의 어가(御駕)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이 행행 할 때 쓰이는 황금 연꽃 모양의 수레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대중들이 웅성대자 어가의 문이 열렸다. 그 속에서 온통 황금빛으로 찬란한 공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대중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광경을 설명할 마땅한 언설을 찾지 못해 다만 말을 더듬을 뿐이었다. 공주의 모습은 새롭게 공개된 미래불 형상과 다름이 없었으나, 눈앞에 실재하는 미륵의 현신(現身)에 대신과 화상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금빛 찬란한 공주가 걸으며 발꿈치를 드러내거나, 몸을 굽히며 허벅지살을 드러내거나, 걸음마다 젖가슴이 살랑거리거나 할 때, 도처에서 경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계단의 상단에 오른 덕만(德曼:후일의 선덕여와)공주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아랫도리를 감싼 비단은 마치 천축(天竺)에서 전해진 비천(飛天:천의를 입고 강림하는 천사)의 옷자락과 다름이 없었다. 금사로 짠 천의가 바닥을 쓸며 나는 소리는 천상에서나 있을 법했고, 대중들을 향해 돌아서는 순간에는 서방정토가 생생한 현실로 눈앞에 펼쳐진 것만 같았다. 살아서 움직이는 미륵상과 정반왕, 황제가 보낸 세상의 모든 진귀한 보물들, 그리고 이제 완성된 장륙삼세불의 거대한 광경은 일찍이 신라 땅에 있어본 적도 없었거니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덕만공주가 천의(天衣)를 나풀거리며 걷는 모습만으로도 신화와 전설이 순식간에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억만 겁의 장구한 세월 동안 그 어떠한 권세도 범접할 수 없었던 지존(至尊)의 대상이 드디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 것이었다. 경탄의 함성이 파도처럼 휩쓸고 지나간 이후, 장내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그것은 경외감이었다.

걸음마다 공주의 가슴이 넘실거렸고 황금 천의(天衣) 사이로 공주의 속살이 여지없이 드러났으나, 그 광경은 모두 경외적 장관이었다. 숨죽인 대신과 화상들의 눈초리가 공주의 알몸을 샅샅이 훑었다한들, 그것은 입 밖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공주의 몸은 세상의 것이 아니었고 정욕(情慾)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모습을 하고는 있었으나, 미륵의 현신이었고 황금빛 찬란한 미래불의 강림이었다. 공주의 벌거벗은 몸은 세속의 것이 아니라 수미산 꼭대기 이십사만 유순(由旬) 높이의 창천(蒼天)에 있는 도솔천의 것이었다. 단, 비형랑 김용수 만이 판이하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정반왕은 유희좌로 기대 누워 모든 대신들과 화상들의 표정을 빠짐없이 관찰했다. 그들은 미륵공주의 등장에 압도되어 미처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막을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정반왕의 목소리였다. 공주가 부왕 앞에 예를 표하고 대중을 향해 돌아서자 왕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왕의 목소리는 쇠락이 역력하였으나, 그 순간만큼은 대신과 화상들 사이를 거친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내 일찍이 여식만 허락하는 하늘의 연유를 원망하고, 때문에 근심이 자심하였으나... 그것은 세속의 사소하고 미미한 번민이었다. 대자대비께서 신라의 왕실에 공주를 보낸 이유는... 미륵불이 억겁 윤회의 본모습을 밝힌 이후로 그 뜻이 드러난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짐과 덕만공주의 예정된 운명을 맞이하라는 계시이었다."

왕은 힘에 부친 듯 말을 끊고 장내를 두루 굽어보았다. 숨소리마저 유난할 정도로 모든 대중들이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왕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유독 고개를 숙인 김용수가 눈에 띈 것은 그 때문이었다.

숨을 고른 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인즉슨... 짐(朕)이 정반왕의 윤회를 타고났던 것은 바로 미래불 여왕을 맞이하고자 했던 것이니... 덕만공주는 불국 신라의 미래불로 온 장차 미륵 여왕이 될 몸이다. 모든 대신과 승려들은 이와 같은 복음을 만방에 공포하고, 불국 신라에 강림한 미래불을 경배하고 찬양하라!"

그로부터 축하연은 사흘 밤낮 동안 계속되었다. 왕은 서라벌의 국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아낌없이 하사했고, 저잣거리에는 전대미문의 축제를 즐기기 위한 선남선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천가한의 예물은 대신들과 화상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졌다. 특히, 서성(書聖)과 당(唐) 삼대가들의 진적을 하사 받은 고관대작과 화상(和尙)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다만, 삼색의 모란꽃 그림은 아무도 가져가지 않아 왕이 직접 거두었다.

다음 왕은 미래불 덕만공주가 될 것이라는 공포(公布)는 방방곡곡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포고였으나, 곧바로 이어진 축제는 신라 땅을 온통 들썩이게 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왕의 계획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도 김용수는 왕의 침전에 나타났다. 시위삼도(侍衛三徒:왕실직속경호부대)들이 지밀(至密:왕의 침실) 주변을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김용수를 막아서지 않았고 보더라도 못 본 체 했다. 그것은 불문율이었다. 병사들은 김용수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김용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침실에는 공주 홀로 있었다. 서까래에서 늘어트려진 붉은 비단이 침상을 장막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 속에 미륵처럼 황금빛 몸을 반짝이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장륙삼세불 낙성식(落成式)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공주의 모습은 강렬했다. 황룡사의 지중에서 왕이 정반왕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던 미륵상도, 그 모습 그대로 거대 석상으로 옮겨진 장륙삼세불의 미래불도 덕만공주의 등장에서 받은 대중들의 충격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미래불 미륵의 현현(顯現)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데, 그 광경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충격과 경외감이 저절로 발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강시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용수는 달랐다. 자신이 밤마다 탐하고 있는 황금빛 알몸이 덕만공주라는 사실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영흥사의 감실에서 미륵상을 처음 보았을 때 일생 처음으로 주체 못 할 정도로 폭발했던 자신의 양물(陽物)이 보인 반응에 따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앞뒤를 재거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냥 본능이 인도하는 길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의 안중에는 공주도 없었고, 오직 미륵의 발가락을 위시하여 몸 곳곳을 핥거나 깨물거나 그마저도 아니면 발기된 양물로 미륵의 중심을 향해 사정없이 돌진하는 일만이 유일했다. 그것은 발정 난 짐승의 흘레와 다를 바 없었다.

미륵공주와 김용수는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몸을 섞었다. 공주는 김용수의 무작스런 발정을 교묘한 손놀림과 혀 놀림으로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제서야 격하게 요동치던 김용수의 몸은 떨림을 멈추고 순순히 공주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음사(陰事)의 기술이었다. 일찍이 미실(美室)이 막 왕이 된 소년 백정(白淨)에게 시전(施展)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미륵의 음사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던 김용수가 밤마다 교접하는 몸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이후였다. 공주의 몸은 두 종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어떤 날은 차갑고 기계적인 음사(陰事)의 느낌이라면, 어떤 날을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정사(情事)였다. 외양으로 구분할 수는 없었으나, 김용수의 몸이 어느 순간부터 그 차이를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왕은 김용수를 기다리는 공주들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김용수는 칼집에서 삐져나온 칼과 같다. 그 칼날은 적을 베기도 하지만 너의 목을 딸 수도 있다. 그것은 유용한 칼이긴 하나, 또한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한 것이기도 하니... 고이 접어서 네 품속에 보관하는 방법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명심하거라. 김용수가 기꺼이 너의 수족이 될 수 있도록 음사의 기술로 그의 온 정신을 지배하고 조종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김용수는 위험하다."

왕은 다시 말했다.

"김용수를 눈뜨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가 이치를 분간하고 사리를 밝히면... 사도태후와 미실의 대원신통(大元神統:법흥왕의 첩 옥진궁주로부터 비롯되어 모녀지간에 이어지는 정치 세력으로, 음사를 통해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절대적인 막후 권력을 누리려 했다)보다 더한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너희 둘은 서로 한 몸처럼 힘을 모아 신성한 성골(聖骨)의 왕가를 보존하여야 할 것이니라!"

왕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과 긴장이 묻어났다. 부왕의 엄명을 덕만공주와 천명(天明)공주는 지극한 몸짓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반왕이라 하여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두 예측할 수는 없었다. 인간사라는 것은 사사건건 변수가 있는 법이었다. 왕이 경계했던 위험은 김용수가 아니라, 이미 백골이 된 원광법사에게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일찍이 없었던 역성(易姓)의 기미(機微)였다.


계속...

글 그림 : 노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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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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