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가 불법을 저지르고 처벌 받지 않은 세월이 15년입니다. 그 동안 법대로 해달라고 싸운 비정규직들 어떻게 살아왔나요. 해고 노동자 3명이 목숨을 끊었습니다. 전부 30대 초중반이었어요. 36명이 구속됐습니다. 196명이 해고됐고요. 오늘도 울산 현대차 공장에서 비정규직이 합법적인 태업을 했는데 공정에서 비정규직 다 빼고 정규직을 배치하겠다며 버스 12대로 용역깡패를 투입하고 있답니다. 단식을 어떻게 그만두나요."
법원 판결대로 불법파견 시정명령을 내려달라며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단식 중이던 김수억 기아차비정규직지회 지회장은 9월 1일 앰뷸런스에 실려 적십자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두통, 어지럼증, 가슴통증, 호흡곤란 등의 증상이 심했다. 의료진은 바로 단식을 중단해야 한다는 소견을 밝혔다. 단식을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 지회장은 응급조처만 받고 다음날 새벽 3시 농성장에 복귀했다. 오늘(7일)로 김 지회장의 단식은 41일을 맞았다. 4일부터는 이병훈 현대차전주비정규직지회 지회장, 김용기 기아차소하비정규직지회 지회장 등 현대·기아차 6개 지회 지회장도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 농성 39일차인 9월 5일 농성장에서 만난 김 지회장의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는 걸을 때마다 헐렁하게 늘어진 채 흐느적거렸다. 단식을 하는 동안 17kg이 빠진 탓이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김 지회장은 저릿한 느낌이 난다며 손을 주물렀다. 김 지회장을 정기적으로 진료하고 있는 오상훈 원장은 "예전에 쓰러진 채 용역에게 밟혀서 생긴 허리 디스크와 목 디스크가 단식으로 악화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지회장의 목소리는 천막을 때리는 빗소리를 뚫고 나가기 힘들 정도로 작았다. 의사들이 "말하는 것도 몸에 무리가 간다"고 조언하는 상황. 김 지회장이 인터뷰에 응한 것은 현대·기아차 불법파견 문제를 조금이라도 더 알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고용노동부는 법원 판결대로만 불법파견 시정 명령 내려달라"
김 지회장은 갑작스럽게 단식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가 기아차 화성공장에 불법파견 시정명령을 내린다는 언론보도를 접한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
"7월 25일 언론보도를 통해 노동부가 2018년에 약속한 직접고용 명령을 내릴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기자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쳤어요. 처음에는 반가웠죠. 15년 만에. 그런데 내용을 보니 법원 판결 기준이 아니라 검찰 기소 기준에 따라 시정 명령을 내리겠다는 거예요. 땅으로 꺼지는 느낌이었어요. 믿기지 않았죠. 어떻게 약속한 걸 그렇게 하루아침에 뒤엎고."
2018년 10월 노동부는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18일 간 단식농성을 한 김 지회장에게 법원 판결 기준에 따른 현대·기아차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그보다 앞선 2018년 8월 노동적폐 청산을 목적으로 출범한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도 노동부에 현대·기아차에 법원 판결 기준에 따른 직접고용 명령을 내릴 것을 권고했다.
이때 법원 판결 기준은 물류, 창고 등 간접 생산 공정을 포함한 현대·기아차의 모든 생산 공정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는 11차례에 걸친 법원의 일관된 판결을 뜻한다. 2017년 2월 서울고등법원 판결이 대표적이다.
노동부가 이번에 들고 나온 검찰 기소 기준은 컨베이어벨트를 활용한 직접 생산 공정 사내하청만 불법파견으로 본다. 검찰 기소 기준의 근거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이다. 당시 대법원은 불법파견 소송 원고가 현대·기아차 직접 생산 공정 노동자였기 때문에 직접 생산 공정 사내하청에만 불법파견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판결 이후 현대·기아차 간접 생산 공정 사내하청의 불법파견 여부에 대한 소송과 판결이 이어졌다. 현재까지 모든 법원이 원청 지시의 구속력, 하청의 근무 결정 권한 등 대법원이 적용한 것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간접 생산 공정 사내하청도 불법파견으로 판결했다.
노동부는 2018년 10월 김 지회장과 약속할 때와는 달리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지 않은 간접 생산 공정에 시정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노동부는 그간 파리바게트, 만도헬라 등에 대법원 확정 판결이 없는 상황에서 불법파견 시정 명령을 내렸다.
김 지회장의 주장은 이 같은 사정에 기초해 노동부가 법원 판결 기준에 따른 불법파견 시정 명령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9월 3일 양서정 고용노동부 차관과의 면담에서 확인한 노동부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문재인 정부, 노동 존중 이야기하려면 법원 판결만이라도 지켜달라"
김 지회장은 노동부가 직접 생산 공정에만 불법파견 시정 명령을 내린다면, 현대·기아차 불법파견에 절반의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김 지회장은 현대·기아차 만큼이나 노동부와 검찰에도 불법파견 문제의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거친 말을 쏟아내는 중에도 김 지회장의 목소리는 자꾸만 목에 걸려 좀처럼 커지지 못했다.
"불법파견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당연히 15년 동안이나 불법인 걸 뻔히 알면서도 오늘까지도 불법파견을 저지르고 있는 현대차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만큼이나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이 문재인 정부의 노동부와 검찰이라고 생각해요. 15년을 싸워서 이제는 법적으로도 불법파견이라는 게 명확한데 박근혜 정부 때 법원 판결 결과를 문재인 정부의 고용노동부가 뒤집으려 하고 있잖아요."
김 지회장은 한국도로공사 1500명 해고자에 대한 정부의 태도와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3일 김상조 정책실장이 민주노총 내방에서 남긴 노동존중 발언도 수긍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상조 실장이 노동존중 포기한 적 없다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불법파견 판결을 받은 톨게이트 노동자 1500명을 해고하지 말았어야죠. 또 김상조 실장이 삼권분립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기 어렵다고도 했잖아요. 그렇다면 직접고용 판결이 난 한국도로공사에 자회사를 만들지 말았어야죠."
김 지회장은 정부가 노동존중과 상식, 정의를 말하려면, 불법파견 문제에서 최소한 법원 판결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이라는 건 일반 국민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보루잖아요. 그런데도 노동자나 서민이 들어가면 열에 하나 정도 편 들어주는 곳이 법원 아닌가요. 그러면서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법 지키라고 노동자에게 국민에게 이야기하잖아요. 그 법원 판결을 정부가 부정해버리면 저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냐는 말입니다."
기댈 곳 없는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금도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단식과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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