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월 23일, 뉴욕에서 기후행동 정상회담(Climate Action Summit)이 예정되어 있다.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레스가 기후위기가 과학자들의 예상보다 더 심각하다며 소집한 회의다. (중략). 7월 23일에 용산의 그린피스 회의실에서 70여 명의 시민과 단체 활동가들이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한국 시민, 종교, 사회단체, 정당 집담회'를 개최한 후, 2주 만에 모인 사람들은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중략) 9월 21일 오후 3시, 서울 대학로에서 집회를 갖고 종각까지 행진한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져서 준비되고 있다."(☞ 관련 기사 : 9월 21일, 기후정의를 위해 대학로에 모이자)
예상보다 속도가 빠르다. '기후변화'는 어느새 '기후위기(climate crisis)'로 변했고, 나아가 기후재앙(climate catastrophe)이란 말이 유행할 기세다. 급한 일로 치면 유엔이 말하는 기후행동 정도가 아니라 '응급(climate emergency)'이라 불러도 모자란다고 할 분위기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본 그대로, 한국에서도 시민사회 단체와 활동가들이 나서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행동을 확산하려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9월 21일 서울 대학로 집회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한국 시민사회의 대응을 보이고 국제적 연대를 표현하는 전환기적 '운동'이 되리라 전망한다.
솔직히 위기에 대한 감각을 확언할 처지는 되지 못한다. 9월 21일 집회를 비롯한 기후위기 대응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공감하고 참여할지 잘 모르겠다. 사실 이 집회부터 무슨 구체적 행동이 아니라 위기임을 알리고 전파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초보적 실천이다.
한국이 좀 심한 축이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 사정도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 기후위기의 실재를 부인하는 정도면 이런 대응이나 행동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개인의 이해관계가 개입하여 과학적 인식과 판단까지 왜곡하면 인간 문명의 한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몇 가지 이유로 한국에서(그리고 세계적으로) 기후행동이 여러 번 머뭇거리고 때로 좌절하리라 전망한다. 특히 기후위기와 대응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제약 요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러한 객관적이되 비관적인 전망은 한국 사회가 해결해 나가야 할 집단적 과제이자 '의지의 낙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첫째, 기후변화는 위기가 아니라 아직 '정보'에 머물러 있다. 과학자와 연구자, 지식인(?), 언론 등은 지식으로서의 기후변화를 말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변화와 위기를 실감하기 어렵다. 더위와 가뭄, 외래 전염병 또는 미세먼지의 정보로부터 기후변화라는 지식을 떠올릴 수 있어도 개인과 연결되는 관계는 느슨하고 모호하다.
나를 바꾸자고 하면 더 어렵다. 지식이 사회적이고 보편적 차원으로 확립되어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모두가 불평등을 알고 이야기해도,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기후 또한 '나'를 움직이기에는 힘에 부친다.
둘째, 기후위기는 아직 내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기후변화는 기껏해야(?) 더 무더운 여름, 열사병과 쪽방으로 상징되고, 한참 더 가도 열대 질병에 대한 '점진적 적응' 차원을 넘지 못한다. 기후위기가 현실이 될 2050년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너무 먼 미래다.
아예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이기도 하니, 위기의 주장은 설 자리가 더 좁다. "경기 북부에도 열대성 작물 '멜론' 재배…친환경이 경쟁력"이라니….(☞ 8월 27일 자 <KBS 경제타임> '경기 북부에도 열대성 작물 '멜론' 재배…친환경이 경쟁력') '열대성'과 '친환경'의 모순이 진정한 위기를 상징한다.
셋째, 효과가 있으면서 가능성이 큰 대응 방법을 찾기 어렵다(또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는 전적으로 기후위기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지구적 차원의 원인에 대해 개인이나 개별 국가가 어떤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화석 연료 사용을 줄이자는 제안에 반대를 찾기 어렵지만, 실행 가능성이나 효과는 기후위기와 잘 연결되지 않는다. 음식이나 여행과 같은 실천은 개인 '윤리'로 해석되기 일쑤다. 나와 우리의 작은 행동으로는, 또는 한국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판단은 실천의 효능감을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한다.
또 한 가지, 겉으로는 '방법'으로 보이지만 바탕에는 강고한 국제 정치경제 구조가 도사린다. 한 마디로, 책임 주체-문제 주체-행동 주체의 분리. 기후위기의 피해자(잠재적 당사자까지 포함)는 남태평양 어디 섬나라 사람들이거나 미래 세대지만, 그 원인과 책임은 이미 지나간 세대 그것도 주로 산업화 국가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부터 행동해야 할 주체는 또 다르다. 이제 막 공업화를 추진하는 국가까지 모두 책임을 분담하자고 하면, 누가 순순히 그러자고 할까? 이제야 자동차를 대중화하는 국가에 화석 연료를 줄이자고 요구하면? 개별 국가의 '최선'이 지구적 재앙의 원인이 된다.
구조로 보면, 국민국가의 틀로 지구적 문제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은 인류사 전체에 처음이 아닐까 싶다. 말 그대로 전에 없던 도전, 아예 틀이 바뀌는 중이다. 위기에 대응해야 하는 이유는 '세계 시민'의 윤리에 기초해야 하나, 행동은 국제 정치와 경제에 메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닌가.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실천이 필요하나, 이에 필요한 토대는 언제나 가능할지 기약하기 어렵다.
기후변화 그 자체보다 사람들과 사회가 그 대응에 실패하는 것, 즉 정치의 실패가 진정한 위기다. 뻔히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미루며 다음으로 책임을 넘긴다. 아니 내 책임이 아니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설득하는 정치. 기후위기의 정치를 '창조'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긴급한 과제라 생각하는 이유다.
어떻게? 일차적으로 불평등(소득, 교육, 지역, 건강)이나 남북 평화체제 구축과 비슷한 수준으로 힘 있는 말과 상식을 만들어야 한다. 지식 권력 또는 담론 권력이라 해도 좋다. 무슨 정교한 이론과 높은 수준의 과학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 사회가 축적한 현실 경험과 고통이 더 큰 원천일 수 있다.
생각과 관점의 틀이 출발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의 모순과 불평등을 기후위기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또는 그런 틀로 개혁을 상상하기. 누구나 그렇게 이해하고 믿으며 판단하는 것, 설득하고 수용하는 프레임이 있어야 힘이 생긴다.
그런 것이라야 개인도 집단도 그 방향으로 행동하고 또한 요구할 것이 아닌가. 국민국가에 영향을 미쳐 간접으로 국제를 움직이는 바탕도 결국 그런 종류의 힘이다. 9월 21일 집회가 그런 지식과 힘을 축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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