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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고대왕국’ 속에 즐비한 전통 집성촌들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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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잃어버린 고대왕국’ 속에 즐비한 전통 집성촌들 볼 만하다

2019년 10월 고을학교는 <의성고을>

*강의 마감됐습니다^^

고을학교 제71강은 ‘잃어버린 고대왕국’이라는 삼한시대 소국(小國) 조문국(召文國)의 경덕왕릉과 고분군 등 유적과 사촌마을·산운마을 등 집성촌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의성고을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낙동강변 3대 누각의 하나인 관수루(觀水樓)는 강변의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언덕 위에 세워져 낙동강의 유장한 흐름을 굽어보고 있다.Ⓒ의성군

고을학교 제71강은 2019년 10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1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서의성IC-안계면(비안향교)-금성면 조문국(조문국고분/경덕왕릉/고분전시관/탑리리5층석탑)-금성면 산운마을(학록정사/소우당/운곡당/점우당)-춘산면 빙계계곡(빙계서원/빙혈/빙산사지5층석탑)-점심식사 겸 뒤풀이-의성읍(문소루/의성향교)-점곡면 윤암리(서계당/이계당/소계당)-점곡면 사촌마을(가로숲/만취당/후산정사/영귀정)-단촌면(관덕리3층석탑)-단밀면(낙정마을/관수루)-동상주IC-서울 순입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의성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71강 답사지인 <의성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경북의 중앙에 위치
의성은 경북의 중앙에 위치하며, 북쪽은 안동시와 예천군에 접하고, 동쪽은 청송군, 남쪽은 군위군과 구미시, 서쪽은 상주시와 인접하고 있습니다.

의성의 산줄기는 낙동정맥에서 갈라져 나와 영천 보현산을 거쳐 춘산면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한줄기는 북쪽으로 산두봉, 황학산, 갈라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서쪽으로 굽어 봉암산, 독점산, 비봉산을 지나 남쪽으로 예천군 풍양면 건지봉을 이루며 의성군의 동쪽, 북쪽과 서쪽 일부의 군계가 됩니다. 또 한줄기는 어봉산에서 서쪽으로 선암산, 왕제산에 이르러 의성군의 남동부 군계를 이루며, 대구 팔공산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군위군에서 서쪽으로 꺾어 청화산, 장자봉, 만경산을 만들어 의성군의 남서부의 경계를 이룹니다.

의성의 물줄기는 모두 낙동강으로 유입되는데 크게 위천, 미천, 광산천, 신평천 등이 있습니다. 위천은 군위군 고로면 학암리에서 발원하여 쌍계천, 남대천, 안평천, 위양천, 비산천, 봉정천을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데 쌍계천과 합류지점에 넓은 충적평야가 있습니다. 미천은 의성군 옥산면과 단촌면을 흐르는 하천으로 북쪽으로 흘러 안동시 일직면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으로, 지류는 달곡천, 망률천, 안망천, 옥곡천, 하화천 등이 있습니다. 신평천과 광산천은 의성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하천의 양안에 산지가 나란히 있어 하폭이 좁고 규모가 작아 충적평야가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사촌리 가로숲은 고려 말 안동김씨 김자첨이 사촌으로 이주해 오면서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설과 샛바람을 막아 삶의 터전을 보하려고 심어 가꾼 방풍림이다.Ⓒ의성군

삼한시대 소국이었던 조문국 등 위치
의성지역은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하여 청동기시대에 삼한의 소국인 난미리미동국(단밀면), 여담국(금성면 탑리리), 조문국(금성면) 등이 존재하였다고 비정되고 있습니다.

특히 조문국(召文國)은 <대동지지>와 <읍지>에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에 조문국이 있었다고 하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벌휴이사금이 조문국을 벌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로써 조문국은 삼한시대 의성지역에 번성했던 국가였고 벌휴이사금 때인 185년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벌했다’는 의미를 “멸(절)했다” “취했다” “진했다” 등으로 해석하여 마치 이때에 조문국이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벌’자를 어떤 뜻으로 사용했는지 그 쓰임새를 살펴보면 신라본기에 나해왕 19년(214) 7월에 백제를 벌했고, 무렬왕 6년(659) 4월에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벌했고, 5월에도 백제를 벌했다 하였는데, 백제는 문무왕 3년(663)에 멸망했습니다. 파사왕 29년(108) 5월에 군대를 파견하여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벌하고 병합했다, 또 고구려본기에서 대무신왕 27년(44)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파병하여 낙양을 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 현으로 만들었다 하여 벌을 멸망시켰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여암전서> 강계고에서도 “조문국은 <삼국사기> 한 곳에 벌했다는 글에 불과하므로 언제 신라에 종속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조문국이 언제까지 존속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196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탑리 고분을 발굴한 결과 금동관, 금동관장식품, 금동제귀걸이 등의 화려한 장신구와 함께 토기, 철제무기류, 마구류 등이 출토 되었는데 신라 토기편년전기(350∼450)의 것입니다. 이중 금동관은 조문국의 왕관으로 보입니다. 6세기에 들어와서 514년(지증왕 15) 1월에 지금의 안계지방인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했는데 이곳이 당시 아시혜현입니다. 525년(법흥왕 12) 2월에는 지금의 상주시인 사벌주에 군주를 배치하여 의성 주변의 통치권을 강화한 것을 보면 이때 조문국은 이미 멸망한 뒤가 됩니다. 고분의 출토유물의 제작연대와 주변정세를 감안하면 조문국은 5세기 말경에 멸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고대왕국’ 조문국 고분군은 금성면의 대리리, 탑리리(탑리), 학미리 일대에 크고 작은 고분 370기가 남아있다.Ⓒ의성군

‘잃어버린 고대왕국’ 조문국의 유적들
조문국 고분군은 금성면의 대리리, 탑리리(탑리), 학미리 일대에 크고 작은 고분 370기가 남아 있는데 그중 대리리에는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60여기의 중대형 고분이 있습니다. 조문국은 ‘잃어버린 고대왕국’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어떤 기록들보다도 먼저 금성(金城)이라는 땅의 이름이 그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분에는 대부분 묘석이 없으며 1호, 2호라는 숫자가 묘석을 대신하고 있고 단 하나의 무덤만이 묘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1호 고분인 조문국의 경덕왕릉입니다. 능 앞은 ‘召文國景德王陵(조문국경덕왕릉)’이라고 쓰인 비석과 문인석, 장명등, 상석으로 단장되어 있습니다.

경덕왕릉을 발견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지방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어 온 이야기로 지금의 능지는 약 500년 전 오이밭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밭을 지키던 농부의 꿈에 금관을 쓴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신라시대 조문국의 경덕왕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 위에 있으니 속히 철거 하라”고 명하고는 농부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잠에서 깨어난 농부는 등의 글이 그대로인 것을 보고 놀라 현령에게 고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미수 허목의 문집에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농부가 오이밭을 갈다 커다란 구멍을 발견하고 구멍으로 들어가자 금칠을 한 석실 한가운데에서 금관을 쓴 금소상(金塑像)을 보게 되는데 욕심이 난 농부가 금관을 벗기려 하자 손이 금관에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의성 군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경덕왕이다.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고 말했고 이후 봉분을 쌓고 관리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1725년(영조 원년) 현령 이우신이 경덕왕릉을 증축하고 하마비 등을 세웠고 그때부터 왕릉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경덕왕릉에 관한 전설 중 오극겸이 꿈에서 얻은 시 “천년 지난 오늘에 경덕분만 남았도다” “조문의 거문고 가버린 지금”이란 구절 등에서 전설의 발상 시기가 현령 이우신이 묘를 증축하였다는 1725년(영조 원년)과 맞물려 나가므로 이 1000년은 조문군이 폐한 때부터의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신라는 부족국가를 정복하면 나라를 폐하고 주, 부, 군, 현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면서 이름은 그대로 두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삼국사기>에 “조문왕 2년(231) 7월에 조문국을 토파하고 그 땅을 군으로 하였고” “법흥왕 19년(532) 3월에 금관국의 왕 김구해가 항복하므로 그 땅을 금관군으로 하였다”는 예로 보아 조문국이 멸망하고는 조문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무왕 13년(673) 9월에 조문성을 쌓았는데 이 이름은 당시 조문군의 명칭에서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서기 700년경에 축조한 것으로 보는 탑리리의 5층석탑도 처음에 조문탑이라 한 것을 조문군이 폐하고는 산운탑으로 개칭했으며 김정호의 <대동지지>(1864)에 “조문국이 멸망하고 조문군이 되었다” 한 것도 위와 같은 견해입니다. 여헌 장현광이 쓴 백장령의 비봉설에 관한 기문에서 “조문이 800년간의 긴 복록을 누렸다” 함은 조문국이 기원 전후에 건국하여 조문군을 거쳐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문소군이 된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185년(벌휴이사금 2) 조문국을 정벌한 신라는 조문군을 설치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난 후 행정구역을 개편한 757년(경덕왕 16) 문소군이라 개칭하고 진보현, 비옥현, 안현현, 단밀현을 영현으로 관할했습니다.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각축
후삼국시대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일 때 의성지역은 군사적으로 요충지에 해당하여 왕건과 견훤이 호시탐탐 노리는 지역이었습니다. 의성의 호족 홍술(洪術)이 왕건에게 귀부하자 의성부를 설치하여 우대하였습니다. <경상도 지리지>에 의하면 의성부는 태조 때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 기록에 의성부에 관한 기록이 929년(태조 12)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929년 이전에 의성부가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성부로 승격되면서 일계현, 고구현을 합병해 의성부의 영역은 대폭 늘어났습니다.

1018년(현종 9)에 의성부는 의성현이 되어 경상북도 안동인 길주의 속읍이 되었고 주읍은 수령이 파견되는데 속읍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음으로써 주읍인 길주의 행정적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때 현재의 의성군에 속하는 비옥현, 단밀현, 안정현은 신라 경덕왕 때 의성, 즉 문소현의 영현이었지만 상주목의 속읍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의성지역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에 의성현에는 피촌향(皮村鄕)과 골라소(骨羅所), 신촌부곡, 굴어곡부곡, 우곡부곡 등의 부곡제 영역이 존재하였습니다.

의성현은 1143년(인종 21)에 주읍으로 승격되어 현령이 파견되었지만 무신정권 성립 이후 경상도지방은 1193년(명종 2) 남적(南賊)이라 불린 농민봉기가 일어났고, 또 최충헌정권 때 신라 부흥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하였습니다. 의성현은 신종 조에 신라부흥운동군에 함락되었기 때문에 감무로 강등되었다가 충렬왕 때 일시 대구에 병합되었지만 곧 현으로 복구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오면 오늘의 의성군 영역에는 의성현과 안정현이 주현으로 있고, 비옥현은 안정현에, 단밀현은 상주목에, 다인현은 보주(예천)의 속현으로 있었습니다. 비옥현은 1421년(세종 3) 안정현과 합쳐서 안비현으로 되었고, 1423년 비안현으로 개명되었습니다.

1895년 갑오개혁에 의해 전국이 23부로 편성되자 세 지역 모두 군으로 되어 대구부에 소속되었다가,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자 경상북도에 소속되어 의성군은 2등 군, 비안군, 의흥군은 4등 군으로 되었습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비안군, 의흥군은 의성군에 병합되어 오늘날의 의성군으로 발전되었으며, 1940년 의성면이 의성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비안과 의성에 읍치구역
의성에는 비안과 의성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의성향교(義城鄕校)는 1545년(태조 3)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며 좌묘우학의 배치형태를 보입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5성, 송조의 4현, 동국 18현 등 27현이 모셔져 있습니다. 대성전 지붕에는 1681년의 것으로 보이는 ‘강희 이십년 신유 사월 일 의성관(康熙二十年辛酉四月日義城官)’ 기와와 1890년의 것으로 파악되는 ‘경술 윤이월 의성관……(庚戌閏二月義城官……)’ ‘강희 이십년 신유 사월 일 의성관(康熙二十年辛酉四月日義城官)’ 등 다수의 명문와가 남아 있습니다. 명륜당에는 ‘의성향교학자기(義城鄕校學資記)’ ‘학령(學令)’ 등 다수의 기문이 걸려 있고 명륜당 앞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습니다. 광풍루(光風樓)에는 ‘의성향교광풍루중수기(義城鄕校光風樓重修記)’가 걸려 있습니다. 이 밖에 교직사, 비각, 협문 등이 있습니다.

비안향교(比安鄕校)는 비안현과 안정현의 교육기관으로 전학후묘의 배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 송조의 6현, 해동 18현을 배향하였고 대성전 앞에서는 동무와 서무가 있습니다. 명륜당은 내부에 다수의 기문이 걸려 있고, 동재, 서재는 없습니다. 1716년에 건립된 광풍루는 원래 강궤루(降軌樓)라는 이름의 단층건물이었는데, 1985년 개축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밖에 교직사, 협문, 연못 등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덕양서원(德陽書院)은 원래는 1805년 공주지방 유림의 협조를 받아 김녕김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요당서사(蓼塘書社)라고 하였는데 김문기를 비롯하여 단종의 삼정승, 성희, 조순생, 윤원, 정천경, 윤각 등 세조가 왕위를 찬탈할 때 순절한 충신들을 함께 배향한 사묘입니다.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 김녕김씨 종가가 합천에서 의성군 춘산면으로 이주함에 따라, 공주와 의성지역의 유림과 문중의 공의로 194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 복원하였습니다. 상충사, 사당, 제물대, 경의당, 동재, 서재, 유의문 등이 남아 있으며 전학후묘의 배치양식을 하고 있습니다.

동강서당은 이황의 삼종손이자 문인인 동강 이희정이 세운 서당으로, 지붕에 ‘순치 7월 8월 일(順治七年八月日)’이라는 연호가 새겨져 있는 명문와가 발견되어 이를 근거로 1650년(효종 1) 무렵에 건립되었다고 봅니다. 1780년 보수를 하였습니다.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입니다.

▲사촌마을은 안동김씨, 풍산류씨, 안동권씨의 집성촌인데 40명 넘는 과거급제자가 나온 ‘인재의 요람’으로 “정승 3명 나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영남 8대 명당’ 중의 하나다.Ⓒ의성군

‘영남 8대 명당’ 사촌마을
의성에는 집성촌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사촌(沙村)마을은 안동김씨, 풍산류씨, 안동권씨의 집성촌인데 40명 넘는 과거급제자가 나온 ‘인재의 요람’으로 “정승 3명 나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영남 8대 명당’ 중의 하나입니다. 사촌마을은 이름이 붙여진 유래가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을 주변의 협곡에 의해 사토(沙土)가 퇴적되어 마을의 땅이 비옥하기 때문에 사촌이라고 붙여졌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중국 동한시절에 서유자라는 선비의 고향이 사진촌(沙眞村) 또는 사촌이었는데 안동김씨 입향조가 서유자를 동경했던 까닭에 마을 이름을 사촌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마을에 처음 자리잡은 이는 나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고운 최치원의 장인 나천업 정승이 살았다고 하는데 마을의 뒷산에 나정승의 묘가 있다 하여 한때 후손들이 마을을 찾아 묏자리를 찾기도 했습니다. 구전에 따르면 서변을 지나 삼거리쪽에 있는 ‘나분두들’에 나씨가 살았다고 하고 최치원과 관련된 사촌마을의 장인과 그의 부인이 쓴 시문과 사랑에 관한 시, 명언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씨가 떠나고 난 뒤에는 손씨가 마을에 들어왔는데 현재 경북 포항의 장기고을에 살았던 손장기가 살았다고 합니다. 손장기가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문경새재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이 나타나 오갈 곳이 없으니 섬겨달라고 했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손장기가 말을 끌고 길을 나서려 하자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아 땅을 파보니 방울이 나왔고, 문경새재의 산신을 모시고 마을로 돌아와 동신(洞神)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후 충렬공 김방경의 5대손인 감목공 김자첨이 부친인 김구정과 함께 사촌마을에 자리 잡았고 김자첨은 여말선초에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에서 이주해 사촌마을을 본격적으로 개척, 후손들이 터전을 잡고 살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750년 경 병촌 류태춘이 이곳에 이주하여 비로소 안동김씨, 풍산류씨 등이 1백 여 년 동안 세거한 반촌이 되었으며 송은 김광수, 서애 유성룡, 천사 김종덕 등 많은 유현들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촌마을은 풍수상의 명당으로 마을 뒷산으로는 문필봉이 버티고 있고, 왼쪽으로는 좌산이 있어 좌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우측은 광활하여 우백호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어 있는 우측을 비보하기 위하여 사촌의 서편 매봉산 기슭을 따라 길이 약 1,040m, 폭 40m의 방풍림을 조성하였는데 이것이 사촌리 가로숲이 되었습니다.

마을 주변은 경관이 뛰어나고 전통마을인 만큼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김치중 의사의 전적지로 유명한 건마산성과 송은 김광수의 강학처였던 영귀정 등이 절경을 이루고 있고, 특히 만취당은 규모가 웅장하고 건축 양식이 특이합니다. 또한 사촌마을은 주요 유적들과 마을사람들의 살림집들이 한데 붙어 있으며 그밖에 유적으로는 사촌리 후산정사, 사촌리 향나무 등이 있습니다.

사촌리 가로숲은 고려 말에 안동 김씨 김자첨이 사촌으로 이주해 오면서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설과 샛바람을 막아 삶의 터전을 보하려고 여러 종류의 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조성하며 생긴 것으로 경상북도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풍치림입니다. 수종은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를 주종으로 10여 종이며, 수령은 400~600년이고 나무의 높이는 20~30m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길이가 800m나 됩니다.

만취당(晩翠堂)은 이황의 제자 만취당 김사원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582년(선조 15)부터 3년간에 걸쳐 세운 건물로, 만취당은 김사원의 호입니다. 김사원은 조선전기 문신으로 천성이 인자하여 자신의 재산을 털어 기민을 진휼하여 지방민의 추앙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인 정제장(整齊將)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원래 안동김씨 종실로 사용하기 위해 정면 3칸, 측면 2칸 대청으로 건립하였으나, 거실로 사용하기 위해 1727년에 복재 1칸을 증축하였으며 1764년에는 서소익실 2칸을 증축하여 현재와 같은 T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현판 글씨는 한석봉이 썼습니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건물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촌리 향나무는 만취당 앞 골목에 있는 향나무로 수령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보존 상태가 매우 좋고, 향나무의 수관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어 풍기는 매력도 좋습니다. 연산군 때 송은 김광수가 이 향나무를 심었으며, 만년 동안 푸르게 살라는 의미로 만년송(萬年松)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영귀정(詠歸亭)은 조선 전기의 학자 김광수가 연산군 때 귀향해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사촌(沙村) 앞 냇가에 세운 정자입니다. 대문 안과 밖에 돌계단을 두어 이를 통해 진입하도록 되어 있고 좌우측은 온돌방이며, 어간은 대청방으로 하였습니다. 김광수는 1501년(연산군 7) 32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혼란한 정국을 뒤로하고 낙향하여 영귀모암(詠歸茅菴)을 세우고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습니다. 김광수는 김사원의 증조부이자, 류성룡의 외조부입니다.

후산정사는 자하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만취당을 추모하고 후손들이 공부하고 수양하는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경내에는 강학을 주로 하는 정자(후산정사)가 있고, 향사를 지내는 사당, 그리고 음식을 제공하는 주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후산정사는 원래 종택의 동쪽에 지어져, 청소년의 독서실로 사용됐다가 1767년(영조 43) 마을 뒷산인 자하산 아래로 이건했습니다. 이곳에는 수령 350년이나 된 향나무 두 그루와 회화나무 고목이 있어서 고택의 정취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영남학파의 구심처이자 유림의 본거지
유자정은 유학자 천사 김종덕이 64세 되던 해(1787년) 그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과 영남 유림에 의해 세워진 정자입니다. 김종덕은 당시 영남학파의 유종(儒宗)으로 ‘소 퇴계’로 불릴 정도였으며, 아우 종경, 종발, 종섭과 아울러 사체(사형제) 선생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당시 영남학파의 구심처이자 유림의 본거지로 꼽혔습니다.

안동김씨 종택은 송은의 증손 김사원이 1576년(선조 9) 60여 칸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현손 이중이 중수하면서 그 규모를 반으로 줄였으며, 1789년(정조 13) 만취당을 중수하면서 이중의 손자 종탁이 종택 내실을 함께 수리했습니다. 1816년(순조 16)에는 규모를 다시 10여 칸으로 줄였고 지금은 중간에 길이 있어 별가가 되었지만 임진왜란 후 종택 앞에 후송재 종택을 건축하면서 회랑을 만들어 비를 맞지 않고 다녔다고 구전되어 옵니다.

▲산운마을은 의성에서 ‘대감마을’로 불리는 전통반촌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한 영천이씨 집성촌이다.Ⓒ의성군

‘대감마을’로 불리는 전통반촌
산운(山雲)마을은 의성에서 ‘대감마을’로 불리는 전통반촌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한 영천이씨 집성촌입니다. 마을 북쪽과 북동쪽에 수정사를 사이에 두고 금성산과 비봉산이 위치하고 금성산의 마을 쪽 골짜기에는 저수지가 있어 골짜기를 따라 논이 펼쳐져 있고 마을의 남쪽에는 쌍계천이 흐르고 있어 주변에 농경지가 발달하였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에 '선녀가 거울 앞에 않아 머리를 빗는 절묘한 형국'이라 합니다.

마을이름은 수정계곡에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산운(山雲)’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선조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 이광준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이후 광해군 때 승지를 지낸 경정 이민성, 현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운곡 이희발 등이 이곳에 살았습니다. 학록정사, 수락당, 운곡당, 소우당, 점우당, 자암종택 등 40여 동의 고가들이 남아 있습니다.

학록정사(鶴麓精舍)는 영천이씨 입향조인 학동 이광준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750년(영조 26)에 건립한 정사로 현판은 표암 강세황이 썼습니다. 토석 담장을 돌린 일곽 정면에 있는 ‘소시문(蘇始門)’이 있고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강당 뒤에는 사당인 광덕사가 있습니다. 강당의 평면은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킨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으로 온돌방의 전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였습니다.

수락당(壽樂堂)은 이민성이 거처하던 곳으로, 이정기를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산운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며 경정종택(敬亭宗宅)의 사랑채로 쓰이고 있습니다. ‘수락당(壽樂堂)’이라는 현판은 본래 1603년(선조 36) 한호가 이민성을 위해 쓴 글씨를 1720년(숙종 46) 이민성의 증손인 이수규가 새겨서 게시하였다고 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건물과 함께 소실되었고 현재 있는 현판은 이민성의 10세손인 이홍이 건물을 중건하면서, 새로 현판을 쓰고 건물의 내력을 적어 둔 것입니다.

운곡당(雲谷堂)은 이희발이 건립한 영천이씨 문중의 고택입니다. 북쪽에 솟은 금성산을 뒤로 하고 남동쪽을 향해 있으며 전면의 토석 담장 사이에 세운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ㅁ자 형 정침이 배치되어 있고 정침의 양측 칸은 앞으로 익사(翼舍)가 돌출되어 대문채와 함께 ‘일(日)’자 형의 배치를 이루고 정침의 왼쪽 뒤편에는 사당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습니다. 안채의 평면은 앞 왼쪽으로 ㄱ자형의 사랑채, 우측의 ㄱ자형의 고방채는 중문칸을 통해 연접되어 ㄷ자형을 이루어 안채와 상하 병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문 칸 앞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시선을 차단할 수 있게 ㄴ자형 차면(遮面)담을 설치하였습니다. 안채의 마루를 높게 만들어 사랑채 손님으로 누가 오는지를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점이 특이합니다.

소우당(素宇堂)은 산운마을 한가운데에 소우 이가발이 19세기 초에 건립한 주택입니다. 전면에 세운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 마당을 사이에 두고 ‘ᄂ’자형의 사랑채와 ‘ᄀ’자형의 안채가 튼 ‘☐’자형의 배치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一’자형의 문간채가 있고 서쪽에는 외측간이, 안채의 북서쪽에는 내측간이 있습니다. 안채의 서쪽에는 별도의 담장을 돌려 공간을 형성하고 그 안에 안사랑채(별당)를 배치하였습니다. 주위에는 연못과 각종 나무를 심어 정원으로 꾸몄습니다. 살림집 공간은 사랑마당, 안마당, 뒷마당을 햇볕을 받아들이게 밝게 트이게 하여 서쪽 별원과 대조적인 경관을 만들었습니다.

점우당(漸于堂)은 산운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죽파 이장섭이 1900년경에 건립하였으며 안채, 사랑채, 헛간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자리 잡고 사랑채는 안채와 연결되어 ‘ㄷ’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 있는 ‘一’자형의 헛간채와 어우러져 전체적으로는 튼 ‘□’자형의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윤암리는 영양남씨 세거지
윤암리는 영양남씨 세거지로 1652년 남해준과 아들 남몽뢰가 점곡면 월촌(동변리)에서 이주한 이후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며 살고 있는데 서계당, 이계당, 소계당 등 가문의 고택들이 남아 있습니다.

서계당(西溪堂)은 1800년대 말 남용진이 건립하였고, 손자인 남동욱이 증축하였다고 합니다. 一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가 내정(內廷)을 감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의 평면배치이며 동쪽으로 난 대문간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초당과 고방 등이 있고, 우측으로는 남향하여 배치된 사랑채와 안채가 있습니다. 안채 고방의 외벽과 사랑채 사이에는 경계 벽을 두어 외부인의 시선과 출입을 통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옛날 하인들이 살던 3칸 초가와 방앗간, 우물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생활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계당(伊溪堂)은 이계 남몽뢰가 1651년(효종 2)에 건립하여 강학하던 서재로 전면 칸을 통칸 대청으로 꾸민 후 후면 칸에는 온돌방을 설치하였습니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전면주의 하부에는 하층주를 세워 전면의 마루칸은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으며 마루의 주위에는 계자각을 세운 헌함(軒檻)을 둘렀습니다.

소계당(小溪堂)은 현 소유자인 남석구의 6대조인 남정기가 1800년경에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사랑채, 안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평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一자형의 사랑채가 남향하여 있고 그 뒤편에 ㄷ자형의 안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마루에 편액이 걸려 있고 안채는 중앙에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안방을 두었으며 회담한 곳에 부엌을 두었습니다. 대청의 좌측으로는 상방과 마루방을 두었고 마루방은 판벽을 두르고 서쪽으로는 2짝의 판문을 설치하였습니다.

낙정마을, 천 년 된 역마을

낙정마을은 1400년대 초 윤관이 개척했다고 전해지나 그보다 더 오래전 <고려사>에 낙동역(洛東驛)으로 등장하므로 근 천 년에 이르는 역마을입니다. 낙정은 원래 낙동강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낙동이라 했는데, 약 200년 전, 마을에 좋은 우물이 생겨나면서 ‘낙정(洛井)’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영남 각 지역의 세곡과 사람은 모두 낙정마을을 거쳐 갔습니다. 배로 실어온 낙동강 하류의 물자는 여기서 수레로 옮겨져 문경새재를 넘었는데 마을에는 주막이 가득했고, 강변에는 역마와 수레가 빼곡했습니다. 물길 가까이에는 소금창고도 있었으며 소금 실은 배가 올라오면 마을 사람들은 지게에 곡식을 지고 가 소금과 맞바꿨습니다. 낙동강 물길을 1300리라고 하지만 포구를 중심으로 볼 때는 구포에서 낙정까지 700리 입니다. 낙정나루는 낙동강 물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나루였으나 그곳에 다리가 놓여 나루터만 남았습니다.

낙동강변의 3대 누각 중 하나
관수루(觀水樓)는 낙동강 변에 깎아지른 벼랑이 솟아올라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언덕위에 세워져 낙동강의 유장한 흐름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관수루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정취를 즐긴다’는 뜻으로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더불어 낙동강변의 3대 누각 중 하나입니다. 관수루는 고려 중엽에 세워졌고 하는데 누각 안에는 이황, 주세붕, 김종직, 김일손 등 조선의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낙동강을 노래한 시 열 편이 걸려 있습니다. 정자에 오르면 낙동강은 물론 의성, 상주, 구미 세 고을의 주름진 산과 드넓은 들판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은 그 뱃길에 484m 길이의 낙단교가 강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의성 탑리리 5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1962년 국보 제77호로 지정되었다.Ⓒ의성군

문화재 가치 높은 석탑들
의성지방에는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석탑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의성 탑리리 5층석탑(국보 제77호)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전체적인 형태에서 벽돌 모양으로 쌓아 올린 전탑과 목조건축의 수법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단층 기단위에 5층의 탑신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기단구조와 옥개석 상하면에서 전탑의 양식을 볼 수 있고, 초층 옥신의 우주 및 탱주의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엔타시스 수법, 추녀 전각부의 반전 등 목조 건축양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초기 석탑양식의 형성과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정확한 건립경위는 알 수 없으나, 축조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초기인 700년 전 후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의성 관덕리 3층석탑(보물 제188호)은 신라하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하층기단에는 비천상, 상층기단에는 보살상과 사천왕상, 초층 옥신에도 보살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원래 상층 기단 갑석의 네 모퉁이에는 암수 1쌍씩 네 마리의 돌사자가 배치되었는데, 한 쌍은 1940년경에 잃어버렸고 나머지 한 쌍은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의성 관덕동 석사자 보물 제202호).

의성 빙산사지 5층석탑(보물 제327호)은 의성 탑리리 5층석탑의 형식을 모방한 나말여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모전석탑 형식의 5층 석탑입니다. 1973년 석탑을 완전 해체하여 수리하였는데 사리구 일체가 출토되었습니다. 사면에 양식화된 봉황을 투조한 사각 금동제 사리합과 그 안에 녹유리 사리병이 안치되어 있었고 금동 보주형 두광배, 금동 뒤꽂이, 청동 소령, 청동 부젓가락, 석제 구슬 등도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빙산사(氷山寺)라는 절이 있었다는데 조선 태종 때 왕명으로 폐사되었다 합니다.

▲빙계계곡은 약 2억5천만 년 전에서 6천500만 년 사이에 생성됐으며, 풍혈(風穴), 빙혈(氷穴), 석탑(石塔), 인암(仁巖), 의각(義閣), 물레방아(水礁), 용추(龍湫), 불정(佛頂)의 빙계8경이 있다.Ⓒ의성군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빙계계곡
의성에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빙계계곡이 있습니다.

빙계계곡은 약 2억5천만 년 전에서 6천500만 년 사이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전설에 의하면 어느 날 이곳에서 부처님과 용의 한판 대결이 있었는데 부처님의 쇠스랑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다 절벽 위 봉우리에 푹 찍혔고, 용은 대기를 휘저으며 결국 절벽 아래로 머리를 부딪쳤는데 쇠스랑이 찍힌 봉우리는 불정(佛頂)으로, 용의 머리가 부딪혀 움푹 파인 웅덩이는 용추(龍湫)라는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풍혈(風穴), 빙혈(氷穴), 석탑(石塔), 인암(仁巖), 의각(義閣), 물레방아(水礁), 용추(龍湫), 불정(佛頂)을 빙계 8경이라 합니다. 계곡에 들어찬 암괴 중 유난히 도드라진 바위에 ‘빙계동(氷溪洞)’이란 커다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필적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석학 고운 최치원이 이곳 빙산에서 자주 노닐었다 하며 1,000년이 지나 19세기 방랑시인 김삿갓도 이곳에 와서 “굽이치는 냇가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떨어질 듯 매달린 틈에는 꽃이 피어 드리워졌구나”라고 시를 읊었습니다.

빙혈(氷穴)은 네다섯 명이 함께 있을 정도의 작은 규모이며 벽에는 부적과 같은 난해한 그림과 문구들이 빼곡합니다.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원효대사>에 보면, 요석공주가 젖먹이 아들 설총을 데리고 원효대사를 찾아 이곳에 이르러 원효대사의 거처를 묻자, 사람들은 “빙산사 빙혈 속에 기도하는 이상한 스님이 있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빙혈을 지나면 찬바람이 씽씽 불어오는 풍혈(風穴)이 있는데 얼마나 깊은지는 아는 사람이 없소. 그 끝이 저승까지 닿았다고도 하지요”라고 적고 있습니다.

풍혈은 빙혈에서 약 100m 거리에 있는데 찬바람이 냉동고보다 강력하게 불어오는 바위틈의 좁은 굴입니다. 아주 먼 옛날에는 아주 큰 동굴이었다는데 언젠가 무너져 지금처럼 좁아졌다 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풍혈을 누에를 기르는 잠실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미수 허목은 “이곳을 찾은 선남선녀들이여, 여기에 만고의 신비를 간직한 제일의 풍혈이 있다”고 했는데, 선남선녀와 풍혈이 무슨 관계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인암(仁岩)은 오층석탑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가 갈라놓은 커다란 바위로 정오가 되면 어질 인(仁)자 모양의 그늘을 드리운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빙산사지의 일주문 같기도 하고, 빙혈의 관문 같기도 합니다.

빙계서원(氷溪書院)은 빙계계곡의 초입에 있습니다. 1566년(명종 11)에 창건되어 모재 김안국을 봉향했습니다. 당시에는 남대천 상류 장천에 세워 장천서원이라 했는데 선조 때 사액을 받아 빙계리로 이건했다. 그때 회재 이언적을 합향하여 빙계서원이라 개칭하고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여헌 장현광을 추향했습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것을 2006년에 재건하고 학동 이광준을 추향해 6현을 봉향하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 9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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