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가 악화된 지 1달 반이 지났다. 참 많은 일들이 많은 뉴스들이 쏟아졌다. 돌이켜보면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들도 많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한국 매스컴들이 일본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관련 뉴스를 생산해내는 것을 보며 때론 흐뭇하기까지 하다.
일본의 정치·종교 구조를 들여다보는가 하면, 야후재팬을 비롯한 일본 포털 사이트를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반평화적인 주장을 일삼는 일본잡지와 화장품회사 뉴스까지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렇게 많은 가짜뉴스가 일본에 떠돌아다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한국 매스컴의 자세 전환이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사실 그동안 야후재팬을 들여다보기가 불쾌했고, 구글재팬을 켜면 보여주는 맞춤형 뉴스를 보기가 짜증났다. 작년 한해 한국에 교환교수로 가 있으면서 제일 먼저 호소했던 것도 야후재팬에 뜨는 한국 관련 가짜뉴스 대책을 좀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짜뉴스가 아닌 제대로 된 뉴스를 일본에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사실 일본 매스컴은 한국의 현 정권이 탄생할 때부터 우호적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국의 현 정권에 친북-반일 프레임을 덧씌운 일본 매스컴의 한국 때리기는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았다. 진보적이라 불리는 일본 A티비 뉴스의 새로 등장한 젊은 앵커가 시종 비웃는 표정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비아냥대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역시 한국발 가짜뉴스와 일본에서 확대 재생산된 한국비하 뉴스/정보들 때문이었다.
참다못해 야후재팬에 올라온 조선일보 기사들을 캡쳐해 SNS에 올렸는데, 정말 이 정도였냐는 듯, 한국발 가짜뉴스 관련 기사들이 몇 주 동안 봇물 터진 듯 쏟아졌다. 한편 반가웠지만 지금까지 대체 일본 주재 한국 공관들은 뭘 하고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짜뉴스 아닌 팩트 전달할 매체 절실
일본의 수출규제에 50-70%의 일본 사람들은 왜 찬성하는 걸까? 보통의 일본 사람들은 일본이 그토록 사과를 많이 했고, 돈도 많이 갔다 줬는데 한국은 왜 자꾸 돈을 더 달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경제 전문가는 그 이유를 한국의 높은 취업난에서 찾기도 한다. 일본의 유효구인배율(구직자 1인당 일자리 수)이 1.61인 반면, 한국은 0.60에 그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의 상대적 고학력(대학진학률 일본50%, 한국70% 수준)에 따른 구인배율 저하, 전문기술직 산업예비군의 증가, 단순기능직 이주노동자의 증가 등을 설명했지만, 한국 경제가 곧 쓰러질 것이란 확고한 신념을 단념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한국발 가짜뉴스와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일본의 매스컴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이다.
한국의 현 정권은 손가락만 갔다대도 곧 쓰러질 것이고, 한국 경제는 간단한 수출 규제만으로도 제2의 IMF를 맞이할 것이라는 판단 역시 이들 가짜뉴스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 정권은 오히려 단단한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규제된 수출 품목은 우회통로를 개척해 가고 있으며, 규제된 일본 기업은 판로 개척에 애를 먹는 듯하다.
가짜뉴스를 생산하던 한국의 신문들은 일본을 향한 터무니없는 가짜뉴스 생산을 자제하기 시작했고, 대기업과 중소 소재 기업들은 상생관계 구축을 통한 양극화 해소(유효구인배율의 개선)로 나아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 포털사이트엔 왜곡과 헤이트, 마타도어가 넘쳐나고 있다. 한국발 가짜뉴스 생산은 줄어들었다지만, 한국의 제대로 된 정보가 일본에 제공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매스컴이 제대로 된 한국 관련 정보/뉴스를 인용할 것인지도 문제(혐한팔이=애국마케팅과 시청률)지만, 일본어로 번역된 제대로 된 한국 관련 정보/뉴스가 제때 공급되고 있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자막을 단 한국의 뉴스방송(지난 촛불항쟁 당시라면 JTBC 뉴스룸)을 일본의 포털 혹은 유튜브 채널(알릴레오와 같은 형식의 일본채널)을 통해서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제공한다면(일부분이라도), 최소한 한국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현주소가 어떠한지를 보통의 일본사람들에게 전달해 최소한의 균형잡힌 정보를 접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일 시민연대의 출발점은 올바른 정보-팩트의 공유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자체 교류중단은 일본의 보통사람들을 평화연대의 길 아닌 반평화세력 아래로 떠미는 것
평화와 공생의 관점에선 다양한 정보/팩트도 아쉽다. 한국에 관심을 갖고 애정을 지닌 일본의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에게 동아시아 시민(한국 혹은 일본의 국가/국민이 아닌)의 평화와 공생의 관점에 선 다양한 정보/팩트(특히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 또한 우리들의 당면과제라 할 수 있다.
영화 <동주>를 본 학생들이 하나같이 일본의 식민지 시기가 이 정도인줄 몰랐다며, 처음으로 상대방의 관점에서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특히 한국어(본인들이 그토록 열심히 배우고 있는)가 당시에는 금기시되었을 뿐 아니라, 창씨개명처럼 한국 이름을 버려야만 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 일본의 한류팬 학생들은 좋아하는 한국 뮤지션의 한글 명찰을 가방에 달고 다닌다.
우리 지역에서 개최되는 한국어·K-POP대회에 출전하는 백여 명의 중고생들이나, 도쿄 신오쿠보의 한국음식과 문화 쇼핑을 즐기기 위해 줄지어 늘어선 일본 청소년과 대학생들 역시 단지 모르고 있었을 뿐,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영화 <동주>는 차가운 당대 현실과 마음 따뜻한 일본인을 함께 그려 학생들의 공감능력을 배가시킬 수 있었는데, 이처럼 따뜻한 형식의 평화와 공생의 정보-팩트를 얼마만큼 잘 공급하느냐가 한일 평화시민연대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일본에 있는 연구자들의 몫이란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현지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한일간의 문제는 사실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촛불'을 경험한 한국의 시민들은 NO를 외치되 일본인 전체가 아닌 일본의 반평화세력에만 초점을 맞추기(NO재팬에서 NO아베로) 시작했는데, 이는 한일간의 평화와 공생을 향한 거대한 진보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시민을 평화연대와 공생의 파트너로 인정한 일대 사건이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생 공동체는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져 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래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환경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한일-동아시아 환경 문제로, 이주노동자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선 다문화공생을 테마로, 생활협동조합이나 마을 만들기, 공정무역, 지속가능한 개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각각의 테마를 중심으로 교류하고 연대해 나갈 때 비로소 동아시아의 평화-생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서울시를 비롯한 각 지자체가 풀뿌리 연대와 교류를 중단시키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풀뿌리 시민교류의 중단은 일본의 보통사람들을 평화의 길이 아닌 반평화세력의 발아래로 떠미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각 지자체와 시민단체들은 모처럼 형성된 한일 시민 평화 연대의 기운을 꺾지 말아주길 바란다.
필자 신명직은 일본 구마모토 가쿠엔대학(熊本學園大學) 동아시아학과 교수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