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13> 불한당들의 시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13> 불한당들의 시대

그림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제1부 이야기의 서막 ⑬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14. 원광(圓光)의 죽음

원광법사는 흰그림자에게 목 졸린 이후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원안(圓安)이 처음에는 비형랑을 의심하였으나 왕이 직접 오해를 풀었다. 왕은 어의(御醫)를 보내 돌보았으나 법사는 골골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 쉴 뿐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왕은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법사가 빨리 회복하여 흰그림자와 있었던 일을 말해주기를 원했으나 부질없는 기대였다. 맥을 짚은 어의들이 앞으로 호부 칠일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왕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죽음이 예고된 칠일 째의 날.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법사가 이른 아침부터 황룡사 경내 이곳저곳을 맨발로 돌아다녔다. 깜짝 놀란 비구들이 말렸으나, 법사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마냥 나다닐 뿐이었다. 버선발로 뛰쳐나온 수제자 원안(圓安)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법사는 언제나 그렇듯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었으나 알 수 없는 말을 숙설숙설했다. 낯선 모습이었다. 스승은 정이 많아 누구를 만나던 반가워했고, 노여운 일이 있어도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고, 말을 할 때에는 항상 웃음을 머금으며 할 말만 조리 있게 했다. 그러나, 인자한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그 주절거림은 낯설다 못하여 섬뜩할 정도였다. 스승은 작은 목소리로 자질구레하게 끊임없이 주절거렸다. 원안은 스승이 병환에서 막 회복되어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스승의 주절거림은 명확하지 않았으나, 곰곰이 듣던 원안이 이와 같이 되물었다.

“왕을 직접 뵈어야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스승은 계속 환하게 웃으며 숙설숙설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모든 것을 망실(亡失)하여 실성한 사람 같았다. 원안은 서둘러 수레를 준비했다. 대국통(大國統:승단의 최고 우두머리)이 쾌차하여 수레를 타고 월성(月城)을 향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은 직접 마중을 나갔다. 왕의 면전에서도 법사는 계속 구시렁구시렁거렸다. 낯선 법사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왕은 대전어상(大殿御床:행사용으로 특별히 마련되는 수라상)을 차리도록 명했다. 사옹방(司饔房)의 반감(飯監:주방장)들이 느닷없는 어명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왕은 또 금장(錦匠:비단옷을 만드는 박사)을 불러 법사의 몸에 맞는 비단옷을 새로 짓게 했다.

이윽고, 대전어상이 침전으로 들어왔다. 반감의 지시에 따라 내관과 설리(薛里:사옹방의 하급관리)들이 산해진미가 차려진 대반(大盤:큰 소반)을 줄지어 날랐다. 왕과 법사 사이에 수라상들이 도열하듯 겹겹이 쌓여갔고, 마지막으로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쌀밥이 들어왔다. 왕은 번쩍이는 놋쇠 수저에 따뜻한 밥을 담아 법사에게 다가갔다. 깜짝 놀란 내관들이 왕을 부축하고 시중 들려하였으나, 왕은 허락지 아니하고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법사 앞에 놓인 종지에 밥을 담았다.

"드시오... 깨끗하고 흰 쌀밥, 정반(淨飯)이오. 법사께서 만들어 준 정반!"

석가모니의 부왕(父王), 수도다나(Suddhodana)를 자처하던 왕은 수도다나의 한역어(漢譯語) 정반왕을 스스로 참칭 했다. 깨끗하고 흰 쌀밥은 그 뜻을 말함이다. 마지막 만남을 예감한 왕은 법사를 상전 모시듯 하였고 그 공경함이 감동을 자아낼만하였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사옹방의 내관과 반감들이 그 광경을 보고 왕이 오로지 혼자서만 복을 받으려 하는 것이라 시기하는 자도 있었다.

왕의 극진한 공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법사는 밥과 찬을 그릇째 들고 볼이 터지도록 음식을 우걱우걱 집어삼켰다. 그러면서 들리지도 알 수도 없는 말을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왕은 할 말을 잃고 법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법사는 포식을 했다. 낯선 모습이었다.

“탐식이 생기셨구려. 앓던 사람이 완쾌되면 그렇다더니... 대국통께서 쾌차한 것이 분명하십니다 그려~”

왕은 애기(噫氣)를 뿜으며 길게 트림하는 법사를 쓸쓸한 표정으로 찬찬히 살폈다. 그때였다. 자질구레하게 지껄이는 법사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피신하시오. 허나 다른 살길이 없소. 태후의 원혼이 더 이상 살 길을 바라지 말라고 하셨소. 태후께서 복수를... 피신하시오. 허나 다른 살 길이 없소.”

왕이 들고 있던 수저가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법사의 중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왕은 거구의 몸을 힘들게 일으켜 물렸던 시자들을 다시 불렀다.

“대국통께서 편찮으시니 어서 모셔라. 대국통께서 하는 말은 병환이 깊어 그런 것이니 너희들은 들려도 아니 들은 것으로 해야 할 것이니라!”

원안과 시자들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법사는 주절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사라져 가는 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노망한 늙은 여우가 기어코 지실(어떤 재앙으로 해가 되는 일)을 만드는구나. 앙화(殃禍)가 덮치기 전에 어서 후사(後嗣:대를 잇는 자식)를 서둘러야겠거늘...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이로다.‘


어의들의 예단은 틀리지 않았다. 법사는 다음 날 아침 단정히 앉은 채로 임종을 맞이했다. 왕이 하사한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흰 비단옷에 반사되어 서기로운 빛으로 일렁였다. 원광의 죽음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법당 앞마당을 소지하던 행자들이었다. 원안은 또다시 버선발로 스승에게 달려갔다. 전날의 월성 행차로 스승이 쾌차할 것이라 일말 기대했던 원안은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월성 행차는 사도태후의 앙화를 왕에게 알리려는 스승의 마지막 분발이었다는 것을 원안은 알지 못했다.

원광법사의 장례는 대국통답게 왕의 장례와 버금갔다. 각처의 승려들과 신도들이 황룡사로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중국의 당나라에서도 황제의 조서(弔書)를 보냈다. 장례행렬은 승려들이 피운 침향 연기가 자욱하였다. 그 광경은 마치 구름 속을 지나는 것과 같았고, 장중한 천축(天竺)의 음악소리가 행렬을 이끌었다. 그 소리는 마치 창공(蒼空)에서 들려오는 듯하여 경이로웠다. 향기와 음악에 취한 승려와 신도들은 모두 슬퍼하면서도 울상을 짓지 않고 다만 경건할 뿐이었다. 정반왕이 다스리는 불국(佛國)에는 일체의 슬픔도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으므로, 대국통의 장례는 마치 경사(慶事)처럼 치러져야 했다.

당(唐)의 사신들은 조서와 함께 황제의 하사품을 실어왔는데, 그 양이 수십여 대의 수레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사신들은 그들의 황제를 천가한(天可汗)이라 불렀다. 이전에는 전쟁에서 패하는 법이 없다며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 했으나, 돌궐을 비롯하여 여러 서융(西戎:서방의 이민족)을 물리친 이후로 유목민족들이 최고의 지존(至尊)에게만 붙이는 극존칭을 자발적으로 바쳤다고 했다. 천가한은 '하늘에서 내려온 칸(Khan)'이란 의미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수레 행렬에 정반왕과 대신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가한의 배포는 이와 같았다. 당나라의 씀씀이는 신라와 비교하여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천가한이 보낸 선물 중에는 다섯 자(尺)가 넘는 황금빛 횡축(橫軸:가로로 길게 꾸민 족자)도 있었는데, 그 거대한 족자에는 큰 대야 크기의 붉고 흰 모란꽃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계속...

글 그림 : 노길상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