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창녕 성씨 고가'에서 역사여행를 떠나보자!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창녕 성씨 고가'에서 역사여행를 떠나보자!

6.25때 소실 '노스페이스' 영원무역 복원

최근 양파 값이 떨어져 재배 농민들이 울상이다. 농민들은 양파를 수확하면 비용이 더 든다며 밭에서 갈아엎기도 한다.

이런 창녕 양파재배 농민들을 지켜보는 '창녕 성씨 고가'는 농민만큼이나 속이 아프다. 바로 '고가의 주역'이 양파를 맨 처음 도입한 까닭이다.

창녕군 대지면 석동리에 위치한 '성씨 고가'는 멀리서 봐도 기와지붕이 첩첩으로 이어져 있어 예사롭지가 않다. 얼핏 보면 한 지붕으로 이어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리에 위치한 창녕성씨고가 ⓒ창녕군 제공
여름방학을 맞아 자녀와 함께 손잡고 돌아볼 수 있는 '창녕 성씨 고가'는 여러 사연을 안고 있다. 역사의 현장이 여기에 오롯이 스며들어 있다.

면적이 약 1931㎡에 이르는 성씨 고가는 가옥에서 가옥으로 이어지는 규모가 한마디로 옛날 부농의 삶을 느끼게 한다. 한옥은 무려 130여 칸에 이른다.

겉모습을 보기 전, 창녕이 양파시배지로 불리는 사연은 성씨 고가의 주인 성낙안 선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성낙안 선생은 사재를 털어 근대교육기관인 '자양강습소'를 설립, 후학을 가르쳤다. 당시 세 명의 교사가 아홉 과목을 가르치며 1924년까지 유지됐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그 자리에 지금의 '대지국민학교(초등학교)'가 됐다.

성씨 고가가 양파를 들여온 건 1909년경의 일이다. 성낙안 선생의 아들인 성재경 선생이 일본에서 양파를 보고드려와 여러 농가에 보급했다. 당시 일제의 수탈에 피폐해진 농촌과 농민의 삶에 '황금작물'로 등장했다.

창녕군에는 지금도 '양파연구소'가 있어 양파를 6차 산업 시대를 여는 소득 작물로 탈바꿈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고가 관람은 솟을대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집은 외삼문 외에 내삼문이 따로 있다.

▲창녕성씨고가 구연정 ⓒ창녕군 제공
성씨 고가는 한때 37개 동 130칸의 대규모 한옥 고대광실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됐다. 성씨 고가는 크게 구연정, 경근당, 아석헌, 석운재 등 4개 영역으로 나뉜다.

직접 둘러보는 것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성씨 고가는 집 뒤쪽에 길게 늘어선 대나무 숲이 특히 일품이다. 대나무 숲속에 들어서면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도 서늘한 한기가 목덜미를 타고 내린다.

성씨 고가는 천천히 걸어가며 살펴봐야 제맛을 볼 수 있다. 바로 완상((玩賞) 의 맛이다. 숨겨진 고가는 검은색의 오죽(烏竹)으로 둘러싸여 운치를 더한다.

고가는 6·25 때 대부눈 소실됐지만, 2000년대 들어 성기학 회장이 대부분 복원했다. 2004년 7월 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5호로 지정됐다.

인근에 우포늪과 우포늪생태관, 산토끼 놀이동산, 우포유스호스텔 등이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