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마감됐습니다^^
8월의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70강은 학문과 선비의 고장이며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전쟁의 격전지로 많은 충신열사를 배출한 장성고을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70강은 2019년 8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0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백양사CC-북이면(남문창의비/오산창의사)-북일면(서능정려비/칠현유적지)-황룡면(박수량백비/홍길동테마파크/필암서원/통곡대/난산비/김인후묘역/신도비/황룡전적지)-삼계면(관수정/송흠묘역/기영정)-삼서면(만곡사)-동화면(요월정원림)-점심식사 겸 뒤풀이-장성읍(방울샘/고경명묘역/신도비/장성향교)-진원면(고산서원/청계정)-서삼면(봉암서원/이진환가옥)-장성호-백양사IC-서울의 순입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70강 답사지인 <장성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국가 길흉 때 물빛 변하는 방울샘
장성의 산줄기는 북쪽으로 방장산, 입암산, 백암산이, 서쪽으로는 축령산, 고성산, 태청산이, 동쪽으로는 병풍산, 불태산이 연봉을 이루고 있으며, 물줄기는 황룡강이 젖줄마냥 군의 중심을 관통하며 흐르고, 장성호가 장성, 광산, 함평의 농지 13,900정보에 물을 보급해주고 있습니다.
장성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54국 중 고립국, 구사오단국, 임소반국으로 추정되며, 백제시대에는 고시이현, 구사진혜현, 소비혜현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16년 고사이현은 갑성군, 구사진혜현은 진원현으로, 소비혜현은 삼계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940년 갑성군을 장성군으로 개칭하고 1018년 장성군과 삼계현은 영광군의 속현이 되고 진원현은 나주목에 예속되었습니다. 1172년 장성군과 진원현이 영광과 나주에서 분리되어 감무가 파견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 장성과 진원이 현감고을이 되고 1600년 장성현과 진원현을 합병하였고 1665년 장성현이 도호부로 승격되었습니다. 1894년 동학군이 황룡싸움에서 관군을 대파하였고, 1895년 부(府)가 군으로 바뀌고 1896년 전남 장성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43년 장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75년 장성호 건설로 북상면이 폐지되었습니다.
장성의 읍치구역에는 진원성, 장성향교, 이진환가옥, 방울샘 등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진원성(珍原城)은 진원현의 현성(縣城)으로 고려 초기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대동지지>의 성지조에 병진성과 동일성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표고 40m쯤의 대체로 낮고 평평한 분지형의 두 개의 작은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성한 퇴뫼식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800m로 추정되며 가장 양호한 동벽의 높이는 3m 내외로 한국전쟁 때 진원지서의 방호벽을 구축할 때 거의 훼손되었고, 그 후에도 새마을사업 등에도 성곽돌을 사용하였습니다.
장성향교는 1394년(태조 3)에 오산리에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져 1600년(선조 33)장안리로 옮겨지었습니다. 이때 진원현이 장성현과 합해짐에 따라 진원리에 있던 진원향교를 없애고, 장성향교에 합치게 되었습니다. 1658년(효종 9)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명륜당, 동재, 서재, 대성전, 내삼문 등과 부속건물들이 있습니다.
이진환가옥의 사랑채인 야은재는 야은 이용중이 만년에 주거하던 집으로 안채와 나란히 배치된 ‘一’형 가옥으로 전면과 측면에 넓은 마루가 구성되었으며 내부공간은 방이 3개, 수장고가 1개로 전체적으로 마루를 포함하여 5개의 단위공간으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기단은 외벌대로서 화강석을 사용하였으며 기단 위에 놓인 주초는 막돌 덤벙 주초입니다. 처마의 형식은 홑처마, 처마도리의 형식은 굴도리로서 대청마루 위 천장은 구조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며 지붕은 볏짚을 사용한 초가입니다. 1832년 건립된 사우의 강당 건물을 이건하여 민가의 사랑채로 활용하고 있는데 전통 건물의 변용 과정을 알 수 있어 학술적, 향토사적 가치가 높습니다.
방울샘은 호남정맥의 줄기인 봉황산과 제봉산을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영천리 오동촌 입구에 있습니다. 방울샘은 국가 길흉 때 물빛이 변하는데 풍년에는 흰색, 흉년에는 검은색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방울샘은 마을의 수호 상징이 되어 매년 보름에 샘제와 당제를 지냈으며 국태민안(國泰民安)과 관련된 여러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동촌은 400여 년 전에 여양진씨, 김해김씨, 금성나씨 등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250여 호에 이르는 대촌이었으나 지금은 120여 호가 남아 있습니다.
“장성에서는 학문을 논하지 말라(問不如長城)”
장성은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고을입니다.
장성에서는 학문을 논하지 말라(問不如長城)고 할 정도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입니다. 조선시대만 하여도 송흠. 박수량, 김인후, 김경수, 기효간, 윤진, 변이중, 정운룡, 기정진, 기삼연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들 중에 으뜸인물은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입니다.
송흠이 으뜸 인물인 이유는 첫째 50여 년간 벼슬을 하면서 청렴결백을 실천한 청백리이며, 둘째 나이 77세에 전라관찰사를 사직하고 99살 어머니를 정성스럽게 모신 효자이며. 셋째 조선의 선비 중에 가장 선배로서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보다 50년 먼저 태어난 호남 유학의 제1세대로 호남사림의 튼튼한 맥을 잡아준, 사림의 아버지입니다.
‘사림의 아버지’ 송흠
그의 학통을 이어 받은 수제자들은 양팽손, 양응정, 최경희, 백광훈, 최경창, 김경희, 정명세 등이 있는데 특히 송흠에게 제일 먼저 수학한 양팽손은 많은 제자가 그를 따르고 있는데 그 중 아들 양응정과 김경희가 중심인물입니다. 양응정은 화순, 영암, 장흥 등지를 중심으로, 김경희는 고창, 정읍 등지를 중심으로 제자를 길러냈습니다. 양응정 문하에는 당대에 시문으로 이름을 떨친 백광훈과 최경창이 수학했고 최경훈, 최경창과 함께 임진왜란의 3형제 의병장으로 유명한 최경희도 그 문하입니다.
양팽손은 16세 때 나세찬, 송순 등과 함께 송흠을 찾아가 학문을 닦기 시작했는데 9세 때 조광조와 지란지교를 맺고 1510년 조광조와 동방으로 같이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한 다음 1516년 문과에 급제한 인물입니다. 양팽손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당해 능주로 돌아와 있었는데 그때 20리 밖에 유배와 있던 조광조가 죽자 홀로 적소를 지키고 손수 염하여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와 같은 양팽손의 학문과 절의는 스승인 지지당의 영향이 매우 컸으며 양팽손의 제자들 역시 청백리와 절개를 지키며 민중의 관리로 향리의 어른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청백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로서 청백(淸白)은 ‘청렴결백’하다는 말의 약칭으로 가장 이상적인 관료의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217명의 청백리 중 장성 출신은 재상급인 송흠과 박수량이 있습니다.
김인후 모신 필암서원
장성은 학문과 선비의 고장답게 필암서원, 고산서원, 가산서원, 봉암서원, 모암서원, 만곡사 등 서원이 많이 있습니다.
필암서원(筆巖書院)은 1590년(선조 23) 김인후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1624년(인조 24)에 다시 지었습니다. 1662년(현종 3) ‘필암서원’으로 사액되었고 1672(현종 1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고 1786년 하서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도 함께 모셨습니다. 전학후묘의 배치로 확연루, 청절당, 동재와 서재가 자리 잡고 북쪽으로는 별도의 공간에 사당을 두었습니다.
청절당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 현판이, 대청마루에는 송준길이 쓴 현판이 있습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송시열이 쓴 것입니다. 경장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에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김인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동국 18현 중 한 분이며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 호는 하서 또는 담재입니다. 김안국, 유희춘, 최산두에게 배웠고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된 이래 홍문관 박사, 부수찬, 옥과 현감을 지냈으며,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두루 갖춘 인물로 널리 기림을 받았습니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에도 정통하였으며, 제자로는 정철, 조희문 등이 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장성의 필암서원, 옥과의 영귀서원 등에 모셔졌고, 시호는 문정(文正, 처음 시호는 文靖)으로 1796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아울러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은 김인후와 관련된 문서들을 새긴 목판으로 1568년(선조 1)에 새긴 <백련초해> 13판, ‘유묵’ 4판, 1610년(광해군 2)에 새긴 <초서천자문> 18판과, <해자무이구곡> 18판, 그리고 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판> 3판 등 모두 56판입니다. 안진경체에 바탕 한 김인후의 초서체 글씨는 당시 성리학자 특히 호남학자들 사이에 전형적인 모범 글씨가 되었습니다. <백련초해>는 100가지 시구를 한글로 해석한 것인데, <백련초해> 한글판 가운데 연대가 가장 앞섰고 인종의 판체인 <묵죽도판>은 판각의 변천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됩니다.
필암서원 <하서문집목판>은 김인후 문집을 새긴 목판으로 그가 죽은 후 8년 만인 1568년(선조 1)에 처음 간행되어 1686년(숙종 12) 중간본과 1797∼1802년에 걸쳐 세 번 간행되었습니다. 초간본 목판 1매, 중간본 목판 258매, 세 번째의 목판 391매로 총 650매입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판각연대가 올라가며 누락된 목판이 없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습니다.
김인후 난산비(卵山碑)는 김인후가 매년 인종의 기일인 7월 1일 맥동마을 앞 난산에 올라 북망 통곡한 것을 기리기 위해 1843년(현종 9)에 세운 비로서 국상에 따른 당시 제도사를 알 수 있는 등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며 석재 윤행임이 비문을 짓고 이익회가 글씨를 썼습니다.
기정진의 고산서원
고산서원(高山書院)은 노사 기정진이 1878년(고종 15)에 정사를 지어 담대헌이라 이름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인데 후손들이 1924년에 중건하여 1927년에 고산서원이라고 편액을 걸었습니다. 기정진은 조선 말 성리학의 6대가의 한 사람으로 사당에 주향되었으며, 조성가, 김록휴, 정재규, 이최선, 조의곤, 기우만, 김석구, 정의림 등 8위의 신위가 함께 배향되어 있습니다. 경내에는 외삼문, 강당, 동재인 거경재, 서재인 집의재와 내삼문, 사당인 고산사가 있고 장판각에는 문집, 목판, 사용하던 서적, 생활용품, 직접 제작한 8도지도, 갓, 지팡이, 장도, 안경, 의신구 등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노사 기정진은 순창군 복흥면 대방동에서 태어나 18세 때 선대의 고향인 장성으로 이주해 왔으며, 183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강릉참봉을 지냈으며, 그 후 40여 차례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의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사색에 의해 높은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해 청나라 사신이 와서 ‘용단호장(龍短虎長)’이라는 글귀를 내놓고, 이에 대구(對句)를 맞추라 하였습니다. 이 글귀는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라는 뜻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에 조정 대신들은 해답을 얻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결국 장성의 노사에게 문의하였는데 노사는 “해[日]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해가 용[辰] 방향에서 뜨는 겨울에는 짧고, 호랑이[寅] 방향에서 뜨는 여름에는 길다는 뜻”이라고 하면서, 즉시 대구를 ‘화원서방(畵圓書方)’, 즉 ‘그림으로 그리면 둥글고 글로 쓰면 네모 난다’라고 맞추니 중국사신과 조정대신들이 크게 감탄하면서 ‘장안만목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이라는 말로써 노사를 찬양했다고 합니다.
고산서원 <노사선생전집> 및 <답문류편목판>은 성리학의 6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기정진의 문집과 그의 저서 <답문류편>을 1902년(고종 39)에 목판에 새긴 것으로, 문집은 653매, <답문류편>은 209매입니다. 목판에 새긴 연대는 늦으나 빠진 목판이 없을 뿐 아니라 간행처인 신안사가 조선 후기 경상도 일원의 출판기능을 담당했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간행된 책자가 전하는 것이 없으므로 그 사료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현과 이항복의 가산서원
가산서원은 익재 이제현과 백사 이항복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1498년(연산군 4) 익재의 5대 손 재인이 장수현감에 재임 시 종손 원이 김종직의 문도로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음을 보고, 익재의 영정을 모시고 낙남하여 현 삼계면 백산촌에 집을 지어 영정을 봉안해왔습니다. 1559년 후손 대정이 사우를 지어 백산사(白山祠)라 하고 익재의 위패를 모셨으며 1776년 후손 언경이 낭월산 남쪽 기슭, 지금의 가산마을로 옮겨 가산서원이라 이름하고 익재의 영정과 위패를 주벽으로 모시고, 8대 방손인 백사를 함께 배향하였습니다. 1868년(고종 5) 훼철되었으나, 영정만은 가산마을 중앙에 지은 영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위패는 옛 터에 묻어 지금까지 쌍분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변이중 모신 봉암서원
봉암서원은 1697년(숙종 23)에 변이중(邊以中)의 학덕을 기리고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던 것을 1976년 유림과 후손들이 1차 중건하였고, 1984년 새로 복원하였습니다. 경내에는 외삼문, 강당, 동, 서 양재로 강학공간을, 내삼문, 사당으로 배향공간을 이루어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변이중이 주향되었고, 자하 변경윤, 율정 윤진, 청류당 변휴, 휴암 변윤중, 명산 변덕윤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망암 변이중은 1546년(명종 1) 장안마을에서 태어나 27세에 문과에 합격한 후 예조좌랑, 형조좌랑을 거처 47세 때 어천찰방에 재직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의 파천 길을 수행하고 의주까지 갔다가 소모어사의 명을 받아 전라도에 내려와 많은 의병과 의곡을 모집하여 전선으로 보내는 한편 수원에 진을 치고 기호지방의 왜적들에게 항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왜군의 조총을 능가할 수 있는 화차를 구상하여 종제인 휴암 변윤중의 도움을 받아 제작하였습니다.
화차는 임진왜란 시 3대 발명품의 하나로서 튼튼한 나무에 쇠로 장갑을 씌었고 4면에 40개의 총구를 만들어 40발을 연이어 쏠 수 있게 하였으며, 300량을 만들어 40량은 배편으로 행주산성 권율장군에게 보내 행주대첩을 이루게 하였고 나머지는 경주 탈환전과 해상에서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명암은 함안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마침 큰 전쟁을 겪은 후 진원과 장성의 합병으로 인한 흉흉한 민심을 순화하기 위하여 향언 20조를 만들고 시행하는 등 사회운동에 전력하다가 광해군 3년 66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칠현유적지는 서능 등 7위를 배향한 모암서원(慕岩書院)이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된 뒤 그 유지에 설단하여 단비(壇碑)를 세운 유적입니다. 모암서원의 전신은 서능의 강학지소인 모암정사입니다. 모암정사가 서원으로 창건된 연유는 1587년(선조 20) 장성현감 이계와 향민들이 서능의 효행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당과 강당을 건립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서원이 창건된 지 5년이 채 못 되어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으로 사우는 모두 불타버렸고, 1649년(인조 27) 복설되었으며 복설된 이후 장성 출신으로 효행이 깊은 하곡 정운룡, 추담 김우급, 양산 조영규, 처사 조정로, 율정 최학령, 아곡 박수량 등이 추배되어 모두 칠현을 배향하게 되었습니다.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5년 모암리 서원의 옛 터에 단을 설립하고 춘추로 향사하였으며 1932년 서후창 등이 주축이 되어 북일면 성덕리 용전동에 절효공 만을 독향하는 단을 설치하였고, 1933년에는 모암서원에 배향된 칠현의 위패를 한 곳에 배향하고 용전단(용전사, 모암사현단)이라 하였으며 한국전쟁으로 불탔다가 1962년 단이 복설되었습니다.
만곡사(萬谷祠)는 1791년(정조 15) 송혜 봉유례, 풍애 봉즙, 묵헌 봉여해 등을 추모하기 위해 단을 설치하였던 곳으로 1793년(정조 17) 사우인 만곡사를 건립하여 묵헌 봉여해 만을 제향해 오다가 1862년(철종 13) 봉유례, 봉즙, 봉단의를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3년 봉준열 등 3인이 다시 중건하였습니다. 1974년에 별묘를 건립하고 입향조인 백강 봉문과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을 추배하였습니다.
건물은 사당인 만곡사, 별묘, 강당인 숭절당, 고직사, 내삼문, 외삼문이 남아 있습니다. 묵헌 봉여해는 조선 초 학자로 본관은 하음이며 병조판서 봉즙의 아들입니다. 일찍이 박팽년, 성삼문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비상한 재주와 뛰어난 학문으로 사옹원별좌에 학행으로 특채되었으나 1456년(세조 2) 사육신의 단종 복위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한 혐의로 사형 당했습니다.
음풍농월하던 정자들 즐비
또한 장성에는 선비들이 음풍농월하던 정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청계정은 1546년(명종 1) 박원순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박원순은 김인후의 문인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로 과거에 뜻을 끊고 이곳에 정자를 짓고 후진을 교육하며 지냈습니다. 정자의 경내에 은행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서 그 위로 홍교를 가설하여 구곡수를 끌어 들이는 등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박원순이 죽자 은행나무와 샘물이 모두 말랐다가 삼 년 후에 다시 소생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퇴락하여 13세손인 박정현이 앞장서서 이를 중수하였으며 김성갑, 김상현, 기정진 등의 기문이 남아있습니다.
기영정(耆英亭)은 1543년(중종 38) 전라도관찰사 규암 송인수가 왕명을 받들어 지지당 송흠을 위해 건립한 정자로, 관수정 건너편 용암천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송규암이 전라감사로 부임하려고 할 때 중종이 그에게 명을 내려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퇴관하여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송흠을 방문하여 중종 자신의 상회심(相懷心)을 전하고 동시에 그의 별업을 기영정이라 하는 소제기(所製記)를 전하도록 한 바, 송규암이 그 명을 받들어 부임하여 별업을 정자로 건립하여 주었다는 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후 병난과 화재를 당하여 폐허가 되었는데 다시 송규암의 10세 손인 송겸수가 영광군수로 부임하면서 1856년(철종 7)에 중건하였습니다.
관수정(觀水亭)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뜻으로 1539년(중종 34)에 송흠이 건립하였습니다. 1459년(세조 5)에 나서 1547년(명종 2) 89세로 사망하였는데, 연산군 때 퇴직하여 후진교육에 전심했고 중종반정 후에는 복직하여 내외의 여러 요직을 거쳤습니다. 특히 담양부사, 전주부사, 광주, 나주목사, 전라도관찰사 등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외직을 맡았는데 이는 101세를 산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효행으로 상을 받았고, 1538년(중종 33)에는 청백리에 녹선 되었으며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정자의 내부에는 친우인 홍언필, 전안국, 성세창, 신광헌, 김인후, 임억령 등의 제영(題詠)이 다수 있습니다.
정자의 경치가 ‘조선 제일’
요월정 원림은 조선 명종 때에 공조좌랑을 지낸 요월정 김경우가 말년에 낙향하여 산수를 벗하며 음풍농월하기 위해 건축한 것으로 1811년 1차 중건하였으며 1925년 후손 김계두가 다시 고쳤습니다. 당대의 명사인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웅정 등이 이곳에서 시를 읊었으며, 그 시가 현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일화에 의하면 후손 김경찬이 이 정자의 경치를 찬양하여 조선 제일 황룡리라 현판 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나라에서 장성 황룡이 ‘조선제일’이면 한양은 어떠하냐는 질문에 ‘천하제일’이라고 해서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황룡강과 마주하여 세워진 요월정에 올라서면 강 건너로는 옥녀봉과 대하고 아래로는 탁 트인 들판이 보이며, 정자 주위에는 송림과 100년 수령의 60여 그루 자미나무, 배롱나무가 둘러져 있어 특히 여름철이면 그 풍취를 더해줍니다.
충신과 효자들의 묘역
그리고 장성에는 충신과 효자들의 묘역과 정려각이 많이 있습니다.
송흠의 묘역은 선방산 정상에 있습니다. 맨 위쪽 묘가 판중추부사 지지당 송흠 묘이고 바로 앞의 묘는 후손인 공조참의 송공의 묘이며 맨 아래 비석 없는 조금만 묘 하나가 더 있는데 이묘가 평양할머니 묘입니다. 평양할머니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송흠의 제삿날 같이 모신다고 합니다.
송흠은 자는 흠지, 호는 지지당(知止堂), 본관은 신평입니다. 기묘년에 태어나서 경자년에 사마시에 뽑혔고,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으며 기사(耆社, 늙은 정승들의 모임)에 들고 청백리로 뽑혔습니다. 시호는 효헌공(孝憲公)이고 나이 90세에 죽었습니다. 청백하고 검소하고 벼슬에 욕심이 없음이 조원기와 같았고,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할 때에 신영하는 말이 겨우 세 필밖에 안 되었습니다. 지지당이 타는 말이 한 필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각각 한 필씩 탔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여산 군수가 되었을 때, 고을이 큰 길 옆이어서 손님은 많은데 대접할 것이 없어, 특별한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호산춘(壺山春)’이라 합니다.
김인후의 묘는 부인과의 합장묘로서 묘역 앞부분에 있고, 뒤에는 하서의 부모 묘가 있습니다. 묘비명은 김수항이 지었습니다. 김인후 신도비는 묘역 입구에 있는데,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비로 귀부,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으며 1742년(영조 18)에 세웠습니다.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비문 글씨는 이재, 전서는 김진상이 썼습니다.
박수량백비는 박수량의 비문 없는 비석을 일컫는 것입니다. 박수량은 호는 아곡이며 시호는 정혜공으로 청백리에 녹선 되었습니다. 25세에 등과하여 64세까지 39년간을 관직에 있으면서 오직 공직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했을 뿐 명예와 재물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었습니다. 명종은 박수량이 너무 청백하다는 말을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그의 생활을 알아보았더니 생계를 겨우 연명할 정도이며, 집은 낡아서 비가 샐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박수량이 1554년(명종 9) 64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에 장사를 지내되 묘를 너무 크게 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명종이 아곡의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사람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판서까지 지낸 분이 운상비가 없어 고향으로 가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는 비용을 마련해 주고 예장을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서해 바다의 돌을 골라 비를 하사하였는데, 비문을 새기다가 선생의 고결한 삶에 자칫 누를 끼칠까 염려되어 그대로 묘 앞에 비문이 없는 돌을 세우니 이 비가 유명한 ‘백비(白碑)’입니다.
고경명(高敬命) 묘역은 장성읍 영천리 오동촌에 있는데 뒤로는 제봉산이 평풍처럼 둘러쳐져 있습니다. 원래 장군의 묘는 화순군 흑토평에 있었으나 임금께 받은 사패지가 장성에 있었고, 이곳이 묘 자리로 좋다하여 이장하였다 합니다. 묘역은 가족 묘역으로 우측 맨 위쪽에 고경명과 부인 울산김씨 부부 묘, 그 아래쪽에는 여섯째 아들 고용후와 부인 행주기씨 부부 묘, 그 왼쪽에는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첫째 아들 고종후의 부인 철성이씨의 묘가 있습니다.
고경명은 광주 압보촌 출생으로 본관 장흥, 호는 제봉. 태헌으로 조선시대 문인으로 도승지에 이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의 포충사, 진주의 충민사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효열(孝烈)입니다.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의 나이로 의병들을 이끌고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이때 제봉이 수천 명의 의병을 소집하였던 명문장이 ‘마상격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7,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을 위해 서울을 향하다가 여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당초 계획을 바꾸어 왜군을 물리친 후 북상하기로 하고, 진산에 진을 치고 있는 전라도방어사 곽영과 왜군을 관군, 의병의 연합작전으로 공격하자고 합의하였습니다. 마침내 임진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에 걸쳐 의병장 고경명이 7,000 의병을 이끌고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합세하여 금산성을 탈환하고자 했으나 관군과 의병의 연합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고경명은 금산 눈벌[臥隱坪]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고종후는 자가 도충, 호는 준봉이며 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고경명의 뜻에 따라 아우 고인후와 함께 각지에 흩어진 군졸들을 설득해 다시 모아 수원에 있는 광주목사 정윤우에게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에 태인에서 고경명의 의병군과 합류하였습니다. 다시 아버지의 명에 따라 금구, 김제, 임피 등지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여산의 본진에 돌아왔습니다. 이 때 왜적이 황간, 영동에 머무르며 장차 금산을 공략하고 전주를 경유하여 호남 지방을 유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금산으로 가서 방어사 곽영과 더불어 왜적의 침략을 막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적이 침입하자 싸우기도 전에 관군은 붕괴되고 의병군마저 흩어져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듬해 400여 명의 의병을 규합, 복수의병군을 조직해 하동에 이르러 왜적의 형세를 살폈습니다. 이때 왜적은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지방으로 침입하려 하므로 진주를 지키기 위해 휘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가 김해부사 이종인,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병사 최경회 등과 진주성을 사수하기로 했습니다. 진주성이 적에게 포위되어 격전이 계속된 지 9일째인 6월 29일 목사 서예원이 겁을 먹고 도망치자 진중은 혼란을 일으켜 무너지게 되었으며 왜적이 성안으로 물밀듯이 몰려와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고종후는 북향재배한 뒤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했는데 이들 세 사람을 ‘삼장사(三壯士)’라고 합니다.
고용후(高用厚)는 호가 청사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0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조좌랑이 되었습니다. 그 뒤 병조좌랑, 병조정랑을 거쳐 1616년(광해군8) 남원부사가 되었으며 1624년(인조 2) 고성군수를 역임하였습니다. 1631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판결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청사집> <정기록> 등이 있습니다.
서능정려비(徐稜旌閭碑)는 1578년(선조 11)에 세운 고려 고종 대 효자 서릉의 효행정려비로 1669년(현종 10) 변휴 등 12인이 주동이 되어 비각을 중건하기 시작하여 1694년(숙종 20) 완성하였으며, 송준길이 편액을 썼습니다. 서능은 본관 이천, 자는 대방, 호는 송암, 시호는 절효입니다. 북일면 작동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심과 학문이 지극하였고 문화시중을 지냈으며 <거가십훈(居家十訓)>을 지었습니다.
어머니가 목에 큰 종기가 생겨 살아있는 개구리만이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다 하여 집 앞 나무 아래에다 약탕관을 걸고 약을 끓이자 나무에서 청개구리가 떨어져 약탕관에 들어갔고, 이 약으로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조정에서는 이를 알고 정려를 내려 포상하였는데 하늘을 감동시킨 효자로서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장성현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수는 개구리 형상을 하고 있으며, 비문은 박순이 짓고 백광훈이 글씨를 썼으며, 음기는 서태수가 지었고, 전액은 조억수가 썼습니다.
금성나씨 삼강문은 금성나씨의 충효열(忠孝㤠) 삼강을 기린 정려각입니다. 삼강문내에는 3인의 명정 편액이 걸려 있는데 충신 가선대부 행종성판관 동지중추부사 나통서, 효자 성균관 진사 나봉서, 열부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나덕규의 처 옥천설씨입니다.
변씨 삼강정려문은 정유재란 때 후암 변윤중이 집안 종들과 장정 200여 명을 모아 왜군과 싸우다 패하고 부엉바위로 올라가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그 부인과 아들 대신 며느리가 강물에 순절하여 일문에 삼강이 났으며 고종 때 삼강정려를 명하였다고 합니다.
오산창의비와 오산창의사
장성에는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전쟁의 전적지가 있습니다.
오산창의비(鰲山倡義碑)는 임진왜란 때에 장성 남문(현 북일면 오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장성현감 이귀, 전좌랑 김경수, 기효간 등 의병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1802년(순조 2)에 북이면 사거리에 건립한 것입니다. 비의 앞면 중앙에 호남오산남문창의비(湖南鰲山南門倡義碑)라고 새겨져 있고, 양 옆에 의병단의 중요인물 77명의 이름을 신분별로 나누어 기록하였는데 여기에는 사노비와 천민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의 좌, 우측 옆면과 뒷면에는 창의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홍문관대제학 홍양호가 짓고, 글씨는 홍문관제학 황승원, 전서는 춘추관 수찬관 김이도가 썼습니다.
1차 남문창의는 1592년 8월 24일, 김경수를 맹주로 일어났으며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고 격문을 보내니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의병이 모여 들어, 그해 11월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삼고 1,651명의 의병이 496석의 군량미를 가지고 북상하여 직산과 용인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시켰습니다. 그 후 고향에 돌아온 의병들은 일본과 조정의 협상을 관망하였으나 화의가 결렬되자 김경수는 1593년 5월 29일, 다시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열어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였으며, 장성현감 이귀는 관군 가운데 강한 군사 40명을 선발하고 읍병(邑兵) 300명을 조련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였는데 이것이 2차 남문창의로, 김경수는 두 아들 극후, 극순과 의병 836명을 이끌고 같은 해 6월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진주성 함락과 함께 모두 순절하였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백양사 의승 70명과 1천여 명의 의병이 3차 남문창의를 일으켰는데 이들은 안성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도 커서 회군하였습니다.
오산창의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장성현 남문에서 의병청을 세우고 오천 김경수 선생을 맹주로 하여금 의병과 군량을 모집해 3차례나 의병활동을 펼쳤던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1794년에 창건된 사우입니다. 이곳에는 당시 의병활동에 나섰던 선비, 관군, 승려뿐 아니라 노비까지 총 72명이 배향돼 있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가 엄연히 존재하던 당시에 사민평등(四民平等)의 이상을 실현한 신성한 장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최대 격전지, 황룡전적지
황룡전적지는 1894년 4월 23일, 봉건의 압제와 외세의 핍박을 깨치고자 반봉건의 제폭구민과 반외세의 척양척왜를 들고 일어선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서울에서 파견된 경군을 무찌른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격전지입니다. 황룡전투는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고창, 영광, 함평현을 차례로 점령한 후, 전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경군과 일대접전을 벌였던 전투입니다.
이 싸움은 동학농민군이 서울의 정예부대를 격파한 의미 있는 전투로서 동학농민군에게는 사기와 자신감을 주고, 경군에게는 낭패와 당혹감을 주어 그들의 행동반경을 위축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곧바로 전주성을 점령하게 되었으며 몇 차례 공방전을 벌인 후 휴전을 서두르면서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했던 전주화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 8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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