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폐막한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 9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서원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으로 이번 계기를 맞아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우리 역시 더욱 소중히 지켜나가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서원 등재에 중국은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한동안 중국에서 유행했던 '申遗之争'(세계문화유산 등재 다툼의 중국식 표현)이 다시금 불붙고 있다.
중국 서원의 역사
중국이 우리의 서원 등재에 큰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중국이 서원을 창시(創始)했기 때문이다. 서원은 중국에서 창시한 교육기관으로 학생을 교육하고 학문을 연구하던 장소였다. '서원(書院)'이라는 명칭은 당 현종(685~762) 시기 낙양에 세워진 여정서원(麗正書院)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여정서원은 주로 책의 정리·편찬 등 업무를 맡았던 국가기관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서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의 역사에서 서원이 본격적으로 출현한 시기는 과거제도가 관리 임용의 주요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던 송대(960~1279)이다. 이 시기는 혈통만을 강조하던 귀족이 몰락하며, 과거 시험을 통해 입신양명을 하던 사대부들이 존중받는 사회였다. 과거라는 수요가 높아지자 곳곳에 이를 위한 교육기관들이 생겨났고, 이들이 점차 정착·제도화하여 서원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중국의 유명한 서원들이 중 대부분은 이 시기에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원명청 시대를 거치며 서원은 더욱 규모가 확장되었고, 조선 등지에도 전파되었다. 또한 본연의 임무인 지식인 양성 외에 중국의 문화와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말 부패와 환관의 전횡에 맞서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중심으로 사대부들이 펼쳤던 '동림운동(東林運動)'일 것이다.
동림서원의 대련(對聯, 두 기둥에 쓴 대구)인 '風聲雨聲讀書聲聲聲入耳,家事國事天下事事事關心(바람소리·빗소리·책 읽는 소리 모든 소리를 듣고, 집안일·나랏일·천하의 일 모든 일에 관심을 갖는다)'를 보면 서원이 중국 사회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고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 수 있다.
청대에는 그 규모가 더욱 커져 중국 각지에 약 2000여 곳의 서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듯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서원도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학당(學堂)'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고,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한국은 중국 문화의 약탈자?
앞선 서원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서원은 먼저 중국에서 유래하였다. 현재 중국에서 한국의 서원 등재에 가장 불만을 갖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자국의 서원 문화를 배워간 한국이 마치 자신의 것인냥 중국의 서원 문화를 '약탈했다(抢, 빼앗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이 '중국 문화의 약탈자'라는 이미지가 생겨난 것이 이미 10년도 더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명예스런 이미지가 덧씌워진 건 2005년에 강릉단오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한국이 자국의 고유 명절인 '단오(端午)'를 약탈했다고 비난하며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사실 우리가 강릉단오제를 등재 신청할 당시 분명히 '강릉'·'단오제'·'풍습'이라는 특별한 '장소'·'시기'·'내용'을 공시하였다. 하지만, 자극적인 뉴스거리 날조를 좋아하는 건 어느 나라 언론이나 비슷한가 보다. 중국 언론들은 이런 자세한 내용은 보도하지 않고 마치 한국이 '단오'라고 하는 명절 자체를 등재 신청했다는 듯이 보도했다.
이러한 내용은 성난 중국인들 사이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으며, 후에는 한자가 한국인이 발명했느니, 공자가 한국 사람이었다느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위 '한국 기원설'마저 여기저기에서 날조되었다. 이렇듯 한국을 자신들 문화의 '약탈자'라고 여기고 있는 중국에서 이번에도 자신들이 창시한 서원을 한국이 UNESCO에 등재했다고 하니 또 '약탈'해 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문화의 창시자 중국과 그 수용자 한국, 그리고 현재
4대 문명과 4대 발명으로 유명했던 중국은 과거 초강대국이자 동아시아 문화의 종주국이었다. 우리가 중국에 사대를 해온 것은 어쩌면 중국의 강요보다는 우리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실제로 우리가 흔히들 치욕으로 알고 있는 조공(朝貢)은 사실 우리 스스로 경제·문화적 이익을 위해 주도했던 면이 적지 않다. 사대의 극에 달했던 명대에 조선이 너무 많이 오자 재정에 문제가 발생하자, 오죽하면 황제가 '3年 1使(3년에 한 번 사신을 보내는 것)'를 고집했을까? 물론 조선이 끝까지 고집하여 '1年 3使(1년에 세 번 사신을 보내는 것)'로 확정하였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이 갔다.
우리가 이처럼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던 이유는 그들의 선진문화를 흡수하기 위함이 가장 컸다. 실제로 우리는 중국의 많은 것을 받아들였고, 우리의 현실에 맞게 변용해왔으며,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이룩해낼 수 있었다. 현재 중국과 문화유산 등재에서 갈등을 겪는 핵심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과거 '문화의 창조자'로서 중국이 만들어낸 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자'인 우리가 받아들여 왔고, 원류는 비록 중국이더라도 이미 오랜 기간 우리의 문화에 융화되어, 이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는 점이다. 과거 중국에게서 받아들인 문화들을 제거한다면 아마도 우리의 전통문화는 아마 끔찍한 모습이 될 것이다.
서로 공유하는 문화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것은 문화를 약탈한 것이 아니라 이를 더욱 잘 보존하기 위함이 핵심임을 숙지해야 한다. 한중 양국은 수천 년 동안 일의대수(一衣帶水, 중국에서 한중관계를 형용할 때 자주 사용하는 고사성어로서 <南史·陳後主紀>에서 인용한 말. 옷과 같이 좁은 물이라는 의미. 비록 강이나 바다가 중간에 위치하지만, 거리가 멀지 않아 서로 왕래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함)의 관계를 이어왔다.
비록 근현대의 특수한 역사를 거치며 단절되었지만, 다시금 종전의 밀접한 관계를 재개하고 있다. 현재 한중 양국은 각각 일본과 미국에 의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한중간 문화유산에 대한 충돌과 반목으로 서로의 발목을 잡기보다는 서로 힘을 합해 이 곤경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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