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뉴욕타임스(NYT)는 15일(현지시간) “농사는 한국의 삶, 이경해씨 절망 속에서 삶 마무리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개막된 10일 개최지인 멕시코 칸쿤에서 자살한 전 한국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 회장 이경해씨의 고향 장수마을을 찾아 그의 삶과 죽음을 자세히 보도한 르포기사를 게재했다.
NYT는 이 기사에서 이씨의 삶을 조망하고 주변 인물들의 말을 통해 이경해씨의 활동상과 “만일 우리가 외국에서 더 많은 식량을 수입해온다면 더 많은 농지가 버려질 것”이라는 한국 농촌 사회의 절망적인 상황을 전했다.
이어 NYT는 “이경해씨는 농민들을 구하려 자살한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보도하며, 이경해씨 자살이 도시사람들에겐 하나의 극단적인 모습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으나 농촌사회에서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이자 보호자로 인식되고 있다고 전했다.
NYT는 또 WTO라는 세계화 물결이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인 장수 지역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현실을 전하면서 이로 인해 파괴되어 가고 있는 농촌경제와 농촌사회를 그려내고 있다.
NYT의 이번 르포기사는 고 이경해씨의 죽음이 세계에 던지는 메시지를 잘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독자들도 반드시 일독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음은 이경해씨 삶을 보도한 NYT의 기사내용 전문이다.
***농사는 한국의 삶, 이경해씨 절망 속에서 삶 마무리해**
이경해씨는 한국 농민을 보호하려는 그의 마지막 일을 앞두고 멕시코로 떠나기 전에 예전부터 가꾸어온 사과 과수원 뒤쪽에 있는 언덕에 올랐다. 언덕에서 이경해씨는 부인 무덤 주위에 자란 풀들을 손질하고 다듬었다.
수요일 칸쿤에서 농민단체 지도자인 이경해(55)씨는 WTO 회의장 바깥에 설치돼 있던 철제 저지선에 올라 오래된 스위스 군용칼로 가슴을 찔러 치명상을 입고 절명했다.
남향의 그 부인 무덤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던 건 자그마한 그의 벽돌집과 4만평정도의 농지였을지도 모른다. 이 농지에서 그는 1970년대 도시 대학생들에게 귀농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가 자살한 이후 한국의 여러 방송에서 방영한 것처럼 이경해씨는 학생들에게 신품종 사과를 키우는 것과 새로운 관개 기술을 이용하는 방법, 새로운 품종의 소를 기르는 것 등을 가르쳤다. 이런 노력은 모두 한국 농촌에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는 4년 전에 (이러한 노력이 배어 있던) 농지를 담보물로 잡혀 잃게 됐다.
경사진 농지이외에 비옥하고 푸르른 낮은 지대 농토도 시야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농지는 이전에는 논이었으나 이제는 잡초만 무성하게 변하고 있다.
이경해씨 이웃인 안승현(65)씨는 골짜기 주변의 버려진 논밭을 가리키며 “심지어 지금도 농토가 버려지고 있다”며 “만일 우리가 외국에서 더 많은 식량을 수입해온다면 더 많은 농지가 버려질 것”이라고 강변했다.
안씨는 이어 “이경해씨는 농민들을 구하려 자살한 것”이라며 “그는 나 같은 농부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이나 뉴욕 등지에 거주하는 도시사람들에게 이씨는 어쩌면 한국에서 최근에 발생한 극단적인 저항의 한 단면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농촌사회에선, 3선의 도의원인 이경해씨는 단지 두 세대 만에 제조업이 주류산업이 된 국가에서 농촌산업의 보호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경해씨가 살아온 전북 장수 지역 강변 다리에는 “고 이경해, 당신은 애국자이자 영웅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목표를 이어갈 것입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우리는 WTO 세계화에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글귀도 눈에 띈다.
월요일날 장수군청에는 2m 높이의 카네이션이 이경해씨 초상화가 놓여진 빈소에 설치됐다. 이 빈소는 두개의 촛불이 애도하며 비추고 있었다. 하루 종일 햇볕에 그을린 얼굴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카네이션을 빈소에 놓고는 이경해씨 초상화 앞에서 절하며 추모했다.
이경해씨 친구이자 화가인 이영진씨는 “경해의 이미지는 폭력적인 것으로 비추어졌지만 그는 매우 강하면서 부드러운 사람”이라면서 “그는 신념을 지키며 농촌지역 사람들에 대한 충성심을 끝까지 지켰다”고 말했다.
하지만 농촌에 대한 그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이영진씨는 농민들로 가득한 방에서 “경해는 대학생인 두 자식이 농사를 잇게 하지는 않았다”면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이 농사를 짓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농촌에는 희망이 없다. 아이들은 농사짓는 데서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농촌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한국은 1백42개 농산품에 대해 1백%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이로 인해 소비자들은 쌀을 구입하는데 세계시장보다 5배 정도 더 비싼 값을 지불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실질 소득은 전 세계에 자동차와 배, 핸드폰 등을 팔아서 얻고 있으며, 한국 경제는 전 세계 12번째 국가로 성장했다. 한국은 이러한 제조업에 대해 세계시장이 계속 개방을 하도록 하기 위해 농산품 수입에 관해 양보를 했다.
이런 변화의 파고 가운데 하나는 WTO다. 칸쿤이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에서 이루어진 (제조업을 위해 농업경제를 희생시킨) 거래는 전북 장수 등의 골짜기에까지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WTO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관한 영자 가이드책이 활동가 이경해씨가 살았던 집의 한쪽 방 책장에 놓여 있었다. 이경해씨 옷이 아직도 걸려있는 방에서 이씨의 딸인 이고은 양은 한국 농촌을 대표해 활동한 그의 30년 저항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신문 스크랩 등을 펼쳐보였다. 그는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전세계 도시로 활동 공간을 넓혀왔다.
그는 1992년에도 이번에 이용한 칼과 같은 스위스제 칼로 제네바 WTO 본부에서 배를 찔렀다. 지난 2월 그는 제네바로 돌아와 WTO본부 바깥에서 텐트생활을 시작했고 한 달간 단식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경해씨 누나인 이경자씨는 “경해는 30차례나 단식시위를 벌였다”고 말했다. 이경자씨도 실은 1990년대 대부분을 칠레에서 살았지만 이경해씨의 저항운동을 따랐다. 이경자씨는 이어 “경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농촌사람들과 부모님, 세 딸이었다”며 애도했다.
이경해씨 딸인 이고은 양은 10월 28일 결혼할 예정이나 지금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었다. 결혼식은 연기됐다.
이고은 양은 “솔직히 말해, 나는 정말로 ,정말로 아빠를 존경해요”라면서 “왜냐하면 아빠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셨잖아요”라고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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