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뮤지컬은 지난 2016년 6월에 만든 창작 뮤지컬 '아름다운 청년 윤현진'을 부활한 작품이다.
민선7기 문화융성 일환으로 마련한 이날 뮤지컬 공연에는 윤영석 의원(양산갑)과 김일권 시장을 비롯해 내빈, 시민 등 900명이 참석했다.
뮤지컬은 20명의 청음오케스트라 시작으로 양산시립합창단의 연기와 노래, 러브엔젤합창단의 합창으로 1~3막으로 그려졌다.
그는 1914년 도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해 김성수, 신익히, 송진우 등과 조선유학생 학우회와 조선광복동맹결사단을 조직해 항일눈동에 앞장 섰다.
그후 그는 1916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양산으로 돌아와 대동청년단을 가입하면서 많은 독립투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그는 1917년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해 후진을 양성했고 사재를 털어 경남은행을 창립해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운현진은 경남은행 마산지점장 시절 3.1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에서 만세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일본의 탄압을 피해 3월말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 김구·안창호·이시영·이규식·여운형·신익희·이승만 등과함께 대한 임정을 조직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됐다. 재무차장에 선임된 그는 임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사재 30만원(현재 300억)을 헌납했다.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1921년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해 중국과 함께 항일운동을 결의 하기도 했다.
이처럼 구국투쟁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윤현진은 상하이에서 30세로 요절했다.
임정은 윤현진 공로를 높이 평가해 국장으로 치루고 상하이 정안사의 묘지에 안장했다.
양산에서는 1959년 국민의 이름으로 춘추공원에 기념비를 건립해 추모했으며 그는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에 추서됐다. 유해는 1995년 대전국립묘지에 이장됐다.
현재 양산시립박물관에는 윤현진의 손자 윤석우가 기증한 친필편지와 인장, 사진 등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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