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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불한당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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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불한당들의 시대

그림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제1부 이야기의 서막⑪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12. 정반왕(淨飯王)의 태평성대

어떤 연유로 미륵상(彌勒像)이 황룡사 금당 앞에 묻혀 있었는지, 어떤 연유로 왕이 섬돌을 밟는 순간 땅이 꺼지며 미륵이 나타난 것인지, 그 어느 것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못했다. 임금의 길인 어도(御道)에 아무나 접근할 수 없어 자초지종을 조사할 수 없었고, 더욱이 왕의 옥체(玉體)가 훼상될 수도 있었던 사고였음으로 황룡사의 화상(和尙:고위 승려)들은 몸을 사리고 입을 닫았다.

은폐되고 왜곡되는 것은 결국 드러나지 않음으로 해서 신령한 힘을 갖는다. 저자에는 이런 소문이 나돌았다.


천여 년 전 대향화국(大香華國:고대 인도의 국명)의 아육왕(阿育王:아쇼카대왕)은 인연 있는 나라에 닿아 불사(佛事: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부처나 사찰을 세우는 일)를 일으킬 것을 기원하며 용선(龍船:용 모양의 배)을 띄웠다. 용선에는 황철(黃鐵) 40만 7천근과 황금 3만 푼이 실려 있었고, 그 속에 미륵상을 감추었다. 아육왕이 미륵상을 숨긴 것은 미래의 부처가 하생(下生)할 땅이 아니라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는 석가모니의 수기(授記:예언) 때문이었다. 용선은 사해(四海)를 떠돌다 진흥왕 대에 신라 땅 하곡현(河曲縣:지금의 울주군)에 다다랐다.

거대하고 화려한 용선과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에 놀란 국인들은 진흥왕에게 알렸고, 왕은 서둘러 서라벌로 옮길 것을 명했다. 인양된 용선은 바퀴를 깔고 수천의 승려들이 끌거나 밀어서 서라벌로 옮겨졌다. 그러나, 월성을 코앞에 두고 연못에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용선을 떠받친 판자가 무너진 것이었다. 황철과 황금이 물속으로 쏟아졌고 용선은 늪에 빠졌다. 승려와 군사들이 허겁지겁 황철과 황금을 수습했지만 온전하지 못했다. 용선은 뻘에 묻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국인들은 황금과 용선이 빠진 연못을 황룡지(黃龍池)라 불렀다. 진흥왕은 고민 끝에 황룡지에 흙을 덮어 대지를 만들었다. 그 위에 사찰을 건립하니, 그것이 바로 황룡사(皇龍寺)였다.

진흥왕은 용선의 황금 무더기 속에 미륵이 비장(秘藏)되었으리라곤 까마득하게 몰랐고, 미륵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몸을 숨겼다. 당시의 신라는 미래의 부처를 맞이할 만한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석가모니의 수기를 품은 신령한 미륵상은 땅 속에서 때를 기다렸다. 진흥왕은 아육왕이 보낸 황철과 황금으로 장육삼세불(丈六三世佛:크기가 육척에 달하는 거대 불상)을 계획했다. 그러나, 연등불(燃燈佛:석가모니의 탄생을 예언했던 과거의 부처)과 현세불(現世佛:지금 이 세상에 도래한 현재의 부처, 즉 석가모니)이 완조 된 이후로 불사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황철과 황금이 동이 나기도 하였지만, 불상들이 눈물을 흘려 바닥이 1척이나 젖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연못을 메운 땅 위에 세워져 그런 것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국인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미래의 부처 건립은 차일피일 미뤄지기 시작했다. 이는 필시 땅속에 묻힌 미륵이 신통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그랬던 미륵이 이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치 아버지에게 안긴 아이처럼 왕의 품에 안겨서 말이다.

저자에 떠도는 풍문이었으나 모든 기이(奇異)를 설명하고도 남았다. 항상 그렇듯 저자의 소문은 왕에 관한 의문을 말끔하게 해소했다. 국인들이 잡다한 가설과 억측으로 소란을 피우기 전에, 소문은 모든 것을 진정시키고 해소했다.

국인들은 지금까지 미래불(未來佛) 자리가 비어있던 이유에 고개를 끄덕였고, 더욱이 미륵이 현재의 왕을 기다렸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 어느 누구도 원광법사가 왕을 정반왕(淨飯王, 석가모니의 부친 슈도다나의 한자식 이름)이라 일컫는 데 있어 그것을 참람(僭濫)하다 말하지 않았다. 설사 그렇게 여기는 자가 있더라도 입을 닫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왕의 기골(肌骨:살과 뼈대)이 다시 회자되었다. 자그마치 11척에 달하는 거대한 몸집은 석가족(釋家族:석가모니 일족)의 표지(標識)이었다는 것과, 말로서만 전해지던 '성골(聖骨:'성스러운 골상'이란 뜻으로 신라의 왕이 될 수 있는 순수 혈통의 왕족을 가리킴)'의 진면모가 드러난 것이라고 국인들은 왕을 우러렀다.

이와 같이 소문은 백고좌회에서의 기이(奇異)로 야기된 의심과 불안과 동요를 명확하게 설명하거나 해소했고, 국인들은 저자의 소문을 쫓으며 안정을 찾았다.

수나라 사신 왕세의는 흡족했다. 그는 신라왕을 걸출한 성군(聖君)이라 추켜세웠다. 왕세의는 수문제(隋文帝:수나라 고조 양견)의 마지막 친서를 전달했다. 왕은 황금 보료에 무릎을 꿇고 황제의 친서를 받들었다. 왕은 황제의 신하로서 예를 다하려 했다. 부처의 아버지, 정반왕은 온데간데없었다. 왕세의는 그런 왕의 태도를 만족해했다. 황제가 보낸 친서의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왕은 서둘러 원광법사를 찾았다. 법사는 수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왕의 친서를 적어 내려갔다. 걸병표(乞兵表)였다. 고구려가 자주 신라의 강역을 침범하므로 수나라의 병사를 빌려 고구려를 공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원광법사는 왕의 말을 순순히 글로 옮겼다. 그 문장의 아취(雅趣)란 왕세의 마저도 경탄케 했다.

제자 원안(圓安)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참다못한 원안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스승에게 말했다.

"심사숙고하시옵소서. 전쟁을 위해 병사를 구걸하는 외교 친서이옵니다. 이는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승려의 길이 아닌 듯하옵니다."

법사는 문장을 멈추고 깊이 고민하더니, 눈길을 돌려 원안을 바라보았다. 스승은 제자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것은 체념의 표정이었다.

"왕의 나라에 있어 왕의 수초(水草)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명령을 쫓지 않을 수 있으리오."

원광은 걸병표가 신라의 왕이 아니라 수나라 황제의 요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수나라와 신라 간의 강고한 결속을 원했다. 왕세의가 원광법사의 귀국길을 따라왔던 것은, 신라의 내부 사정을 살펴보고 그 굳세고 튼튼한 결속의 여부를 타진하기 위함이었다. 원광은 제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망설일 뿐이었다. 모든 사실을 제자에게 설명할 길 없어 난감하기만 했다.

수문제(隋文帝)는 신라를 원조하여 고구려 후방의 국경을 위협할 것이다. 그것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준비 작업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황제는 마지막 과업으로 고구려를 정벌하려 했다. 그래야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것은 통일 왕조의 천명(天命:하늘의 명령)이나 다름이 없었다. 요하(遼河)의 동쪽과 발해(渤海)를 지배하고 있는 고구려를 굴복시키지 않고서는 패권(覇權)을 인정받지 못했고, 이것은 중원의 불안을 야기했다.

이와 같은 국제적 정치 상황을 요해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여,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표정이 그랬던 것이다. 원광은 걸병표가 불러올 역사적인 거대 파장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신라가 군사를 구걸했다는 사실을 외부로 흘릴 것이고, 고구려는 수나라의 계략임을 알면서도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에서 전란이 일어날 것은 자명했다. 그리고, 백제 또한 호시탐탐 신라와 고구려의 틈을 노릴 것이다. 원광의 걸병표 때문에 잦은 전란이 끊이지 않을 것임은 자명했다. 어쩌면, 원안이 모든 일을 예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세의는 매우 흡족해했다. 당대 최고의 문장(文章)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제 신라왕의 친서, 즉 걸병표(乞兵表)를 무사히 황제에게 전달할 일만 남았다. 환송식은 떠들썩했다. 국인들이 큰길로 나와 사신이 탄 수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서역의 미인들이 춤을 추며 길을 열었고, 낙타에 올라탄 악사들의 음악이 끊이지 않았다. 왕과 법사는 항구까지 나와 그를 배웅했다. 왕은 웃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속내를 다 드러낸 것은 아닐 것이었다. 법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둘을 지켜보는 비형랑만이 지금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꿰뚫어 보고 그들의 속내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비형랑 또한 깊은 고민에 빠져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친서로 야기될 전란의 예감에 대해 왕은 무대책이었을까? 미래의 일을 대비하기보다 당장의 일에 급급했던 것일까? 그것은 왕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왕은 어느 누구보다 국제 정세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왕은 수나라가 중원 통일의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정복하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원광 또한 그랬다. 그는 수나라 황실의 사정을 손바닥 살피듯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고구려는 수나라에 빌붙은 신라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백제 또한 호시탐탐 신라의 약점을 노릴 것이다. 걸사표는 신라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고 적의 준동을 부추긴 꼴 밖에는 되지 않았으니, 도대체 왕과 원광법사가 수문제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왕세의가 돌아간 이후로 국경의 전란을 알리는 파발마의 발굽 소리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고구려 군사들이 북한산성을 공격하였고, 북쪽의 국경을 침략하여 팔천 여명을 사로잡아 갔으며, 급기야 우명산성(牛鳴山城)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호시탐탐 아막성에서의 복수를 노리던 백제도 가잠성(가岑城)을 공략하여 현령(縣令) 찬덕(讚德)을 죽이고 성을 빼앗았다. 국경의 사정은 지극히 긴박했고 위태로웠다.

그러나, 서라벌만은 그런 국경의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국인들은 석가모니의 아버지가 신라를 다스린다는 초현실적인 현실에 도취되어 있었다. 각각의 사찰로 돌아간 백고좌들은 황룡사에서 일어난 기이(奇異)에 대해 온갖 과장을 덧붙여 떠벌렸다. 기적적이며 요술적인 왕의 이야기는 국인들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켰다. 당면한 죽음의 위기도 현실적 감각으로 실감되지 못했다.

신라는 부처의 아버지가 환생하여 다스리는 불국(佛國)이 아닌가! 고구려 군이 침략하여 마을에 불을 지르고 인명을 도륙하고 납치해도, 백제군이 성을 함락하여 유부녀를 겁탈하고 죽여도... 그 시절의 정서는 마치 온몸의 신경이 마비된 것처럼, 곧 도래할 서방정토(西方淨土:극락)의 현현(顯現)을 오매불망하였으며 미륵의 하생(下生)을 앙망하기만 하였다. 이제 곧 신라 땅에 억겁(億劫)의 시간 동안 예고되었던 극락(極樂)이 펼쳐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곧이어 도래할 불국을 고구려와 백제 따위가 그러 치지는 못할 것이란 믿음이 국인들을 지배했다. 왕과 원광법사가 모의했던 바가 너무나도 완벽하게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반왕의 치세는 국경의 잦은 변란에도 불구하고 바야흐로 굳건한 반석(盤石) 위에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왕은 거리낌이 없었다. 모든 정적은 제거되었고, 수문제의 신임도 받았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무엇보다 부처의 아버지로서 모든 국인들이 신처럼 받드는 존재이다 보니 잦은 변란에도 국인들은 왕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했다. 어떤 이들은 이 시절을 일러 신라의 태평성대라고도 하였고, 극락(極樂)이라고도 하였고,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도 하였다.

신라의 태평성대, 아니 정반왕의 불국(佛國)은 이후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었다.

신라에서 전례 없는 태평성대가 이어질 즈음, 중국의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수(隋) 나라에서는 고조(高祖) 문제(文帝)가 죽고 양제(煬帝)가 등극했다. 수양제 양광(楊廣)은 돌궐(중국 북방의 유목 세력)과 토욕혼(티베트 지역의 유목 세력)을 공격하여 이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부황(父皇)이 중단했던 대운하를 재개하여 고구려 침략을 준비한다. 통일된 중국의 모든 물자와 군사들이 대운하를 통해 속속 연경(燕京:현재의 북경)으로 모여들었다. 수양제는 1차 정벌에서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요하의 동쪽으로 진군했다. 출발하는 데만도 40일이 걸렸고, 군사들의 대열은 1천여 리(里)에 달했다. 그러나, 살수(薩水:현재의 청천강)에서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의 공격을 받은 30만의 별동군이 거의 전멸하며 퇴각하고 만다. 수양제는 집요했다. 그 이듬해에도 35만의 대군을 일으켜 재침공을 하지만 낙양(洛陽)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회군하다 고구려군의 기습에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달아났다. 그 이듬해에도 3차 원정이 있었다.

결국, 수양제는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내긴 하였으나 영광뿐인 상처였다. 곳곳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고구려 원정 준비에 혹사당한 인민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반란에 가담했다. 극심한 가뭄과 수해는 이들을 더욱 준동케 했다. 전역에서 120여 건의 반란이 일어났고, 날이 갈수록 반란군의 규모는 관군을 압도했다. 반란군의 우두머리 중에는 태원(太原)의 유수(留守:군사적 요충지의 사령관) 이연(李淵)이 있었다.

이연은 자포자기한 양제를 암살하고 당(唐)나라를 개국한다. 그러나, 각지에서 일어났던 반란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당고조(唐高祖) 이연은 둘째 아들 진왕(秦王)을 시켜 이들 반란 세력을 진압케 한다. 진왕은 전쟁에서 패하는 법이 없었다. 반란은 진왕에 의해 평정되었다. 당고조는 진왕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하늘이 낸 상장군)'이라는 칭호를 상으로 내렸다. 천책상장이 바로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었다.


중국의 정세는 급박하였으나, 신라는 정반왕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의 시절이었다.

봄은 안온(安穩)하였으며 가을은 풍요로웠다. 여름의 지독한 더위는 논과 밭을 마르게 하고 급기야 우물과 강이 말라비틀어질 지경이었으나 민심은 동요하지 않았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폭설은 모든 생명을 얼어 붓게 하고 동상으로 사지를 절단하거나 얼어 죽는 자들이 속출하였으나 세상은 지극히 평안하였다.

이 모든 성세(盛世)는 정반왕에서 비롯되었다. 국인들은 병이 들어도 약을 구하지 않았고, 입을 것이 없어도 시절을 원망하지 않았고, 굶어 죽어도 왕을 탓하지 않았다. 어지럽고 비극적 세상 또한 부처의 섭리로 지극히 온당한 것이었고, 부처의 아버지가 다스리는 신라에는 어떤 불온(不穩)도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그래야 불국(佛國)이고 그래야 정토(淨土)인 것이었다.

이토록 풍진세상(風塵世上:편안하지 못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음에도 사람들은 봄과 가을을 기억했다. 봄에는 온 산에 솟아나는 나물로 굶어 죽지 않았고, 가을엔 들판의 곡식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세월의 다른 말은 춘추(春秋)였다. 오래전 노사구(魯司寇:노나라의 사법관, 즉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긴 하였으나, 정반왕은 그와 별개로 춘추라는 말을 즐겼다. 왕은 이렇게 말했다.

"하동(夏冬:여름과 겨울)은 세상의 본질이 아니다. 우생(優生:우수한 생명)을 위해 열생(劣生:열등한 생명)이 드러나는 순간일 뿐이다. 열생이 멸해야 정토(淨土)가 순화되고 지속된다. 겨울이 결국 봄이 되는 것과 여름이 종국엔 가을이 되는 이치는 이 때문이다. 여름과 겨울은 봄과 가을을 위한 정화의 시간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월을 달리 일러 '춘추'라 부를 수 있을진저~"

그즈음부터 밤마다 월성의 달빛 아래로 흰 그림자가 나타났다. 흰 그림자는 흰개(白狗)가 되어 대궐 담 위에 올라 서성거리기도 하였고, 흰무지개(白虹)가 되어 우물가를 휘휘 감돌며 들락거리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흰여우(白狐)로 변하여 대궁(大宮:왕의 침전)의 용마루 위를 발로 구르며 뛰어다니기도 하였다. 불길한 징조였다. 일관(日官:별자리를 관찰하여 매일의 운수를 왕에게 보고하는 관리)들은 토성이 달을 범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정반왕은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든 일은 자신이 뜻한 대로 이루어졌기에 그 어느 누구의 말도 곧이듣지 않았다. 왕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흰 그림자가 나타난 이후로 왕의 늙음은 급속했다. 매일 아침 왕이 배변한 것을 확인하는 상분직(嘗糞職)은 설사를 마셔야 했다. 맥을 짚은 어의(御醫)는 옥체의 정기(精氣)가 소멸했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갖은 보약이 무효했고, 대국통(大國統:승단을 지도하고 총괄하는 최고위 승려) 원광법사의 원력(願力)도 별무소용이었다.

왕은 과도한 음사(陰事:성교) 때문이라 생각했다. 몽정에 눈뜰 때부터 왕은 미실(美室)과의 교합으로 열락(悅樂)을 맛보았고, 매일 밤 수십여 차례의 파정(破精)을 했다. 아무리 타고난 기골이 장대한들 정기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흰 그림자의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밤 왕의 침전에 나타났다. 날랜 시위삼도(侍衛三徒:왕실 직속 경호부대)의 군사들이 사로잡으려 했으나 희롱만 당했다. 왕은 몸소 알아볼 엄두를 못 냈다. 왕의 건강은 터진 둑과 같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짙푸른 윤기가 반짝이던 왕의 머리칼은 하루아침에 백수(白首)가 되었고, 피부는 두꺼비의 그것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연이어졌다. 왕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노인이 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었다. 변함없을 것 같던 정반왕의 성골(聖骨:성스럽고 거룩한 외모)은 이제 오간데 없어졌다.

노인이 된 왕은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대(代)를 이을 후사(後嗣)를 걱정해야 했다. 늙음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왕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명경(明鏡)에서 저승꽃 활짝 핀 얼굴을 발견하곤 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측은하고 힘없는 눈빛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었다.

왕은 비로소 두 딸이 보이기 시작했다. 덕만(德曼)과 천명(天明)이었다. 둘은 쌍둥이처럼 누가 누군지 분간이 어려웠다. 여식(女息)을 왕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세상에 없는 법도였다. 딸을 후사로 세우는 순간 그동안 몸을 사리고 숨죽였던 세력들이 고개를 치켜들 것이다. 노인이 된 왕을 두려워할 리 없다. 왕은 더욱 무거워진 왕관의 무게를 느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왕은 어좌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걸음을 내딛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다. 걷는 것마저도 이렇게 부자유하다니... 비형랑이 왕을 부축했다. 왕은 비형랑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몇 걸음에도 숨이 차 왔기 때문이었다.

"나의 늙음은 분명 흰 그림자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밤마다 그놈이 침전 지붕 위에서 날뛸 때면 온몸의 정기가 모두 빨려 나가는 듯했다. 무심코 넘길 일이 아니었는데 내가 안일했다. 시위삼도들이 쫓았다는데... 어림없는 일이겠지. 네가 나서 주어야겠다. 나의 생각엔 놈의 정체가 밝혀지면 나의 늙음도 그 원인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흰 그림자 놈이 어디에서 나타나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말이다. 네가 나서 주겠느냐?"

명을 받은 비형랑이 읍(揖)을 했다. 내관들이 왕을 부축하여 어가(御駕)에 태웠다. 노인의 몸이긴 하였으나 거대한 몸집 때문에 애를 먹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어가의 바퀴가 굴렀다. 왕은 창문을 열어 다시 한 번 비형랑을 쳐다보았다. 비형랑은 왕의 어가가 시야에서 사라질 동안 읍을 한 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가는 황룡사를 향했다.

처음이었다. 간곡한 부탁의 어조로 비형랑에게 명을 내린 것은.

한동안 비형랑은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계속...

글 그림 : 노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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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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