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섬 픽턴(Picton)에서 북 섬 웰링턴(Wellington)으로 가는 페리는 저녁 6시 45분에 출발한다고 같은 버스를 탄 한국인 여행객이 알려줬다.
페리 예약을 하지 않아 픽턴에서 하룻밤 묵고 가려고 했는데 잘하면 오늘 밤에 북 섬으로 건너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오늘 꼭 북 섬으로 건너가서 해야 할 일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그냥 목적지를 향해 얼른 가려는 마음뿐이다. 이 생각은 일행들과 이심전심이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각자 역할을 나눴다. 인천 총각은 버스에서 자전거를 내리고, 만능 키는 조립하고, 나는 페리 터미널 체크인 코너로 달려갔다.
“예약하지 못했는데요. 마지막 배 탈 수 있을까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네, 갈 수 있습니다.”
“네 명, 그리고 자전거 네 대가 있어요. 자전거 조립할 시간이 필요한데요.”
“서두르시면 탈 수 있습니다.”
티켓팅을 해가지고 나오자 자전거 조립은 이미 완료됐고, 곧바로 승무원은 빨간 선을 따라 우리 일행을 선착장 입구로 안내했다. 자전거 여행객의 출입문은 배 후미에 따로 있었다.
페리 출입문이 열리기까지 20분 정도 기다렸다. 자전거를 배에 싣는 사람은 우리 네 명 이외에 한 명 더 있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낯선 자전거 여행객에게 물었다.
“독일 퀼른에서 왔습니다.” 밝은 표정을 지었다.
“뉴질랜드엔 언제 오셨어요?”
“이제 3주 됐습니다. 모레 오클랜드 공항에서 독일로 떠납니다.”
“아, 그렇군요. 저는 한 달 후에나 오클랜드에 도착해요.”
“긴 여행입니다.”
“제 이름은 마틴(Martin)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진 같이 찍어요.” 셀카 봉을 꺼내들며 말했다.
“예, 좋아요. 난 최광철이에요. 여기 명함 드릴게요. 이쪽은 제 아내구요.” 일행을 소개했다. 사진기도 바꾸어가며 번갈아 찍었다.
“저는 북 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틴이 말했다.
“아, 그렇군요. 북 섬도 비가 많이 내렸나요?”
“북 섬은 비가 별로 내리지 않았습니다.”
“남 섬은 비가 참 많이 내렸어요.”
“그렇습니까?”
“마틴 씨는 어디서 숙박을 해요?”
“대부분 게스트 하우스를 이용했습니다.”
“오늘 밤은요?”
“웰링턴 시내 게스트 하우스, ‘워터루 앤 백패커’라는 곳입니다.”
“아. 그렇군요.”
“이쪽 남 섬에 건너오기 전에 미리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마틴 씨, 혹시 말이에요. 오늘 밤에 묶는 그 집에 전화해서 우리 네 명도 예약해줄 수 있어요?” 나는 가볍게 말을 던졌다.
순간 표정을 보니 움칫해보였다. 내 것과 남의 것이 분명하고, 지극히 냉정한 사고를 지니고 있다는 독일인의 모습일까.
“네∼. 으음∼. 전화해보겠습니다.”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일단 빈 방은 있는 것 같았다.
“신용 카드 번호. 네 명의 이름. 며칠 동안….” 전화기를 든 채 내게 물었다.
“1인당 이만오천 원. 한방에 침대 4개가 양옆 2층으로 놓인 방.”
“오케이. 좋아요.” 일행들도 함께 즉답했다.
‘쿠르릉.’ 페리 출입문이 열리고 승무원을 따라 배 안으로 들어가 벽면 쇠고리에 자전거를 밧줄로 묶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시죠?” 마틴이 말했다. 이 배를 탔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배의 구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여기가 전망도 좋고 의자도 편해요.” 마틴과 마주 보고 앉았다.
“건배∼. 즐거운 여행을 위하여!” 만능 키가 맥주 네 병과 사이다 한 병을 사들고 와 분위기를 띄웠다.
“‘땡큐’를 한국말로 어떻게 말해요?” 마틴이 물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요.”
“감사합니다.” 마틴이 어린애처럼 따라했다. 맥주 한 병에 대한 답례인 듯했다.
붉은 저녁노을이 점점 엷어지고 남 섬도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밤 10시, 웰링턴 항구에 도착했다.
“아래로 내려가시죠.” 마틴을 뒤따랐다.
‘꾸르릉∼ 꿍.’ 처음 탈 때 들었던 소리와 또 다른 굉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10여 분 뒤 거대한 출입문이 비스듬히 앞으로 기울더니 발판이 만들어지고 곧이어 배 안 어디에 있었을까, 기차가 레일을 타고 서서히 밀려나갔다.
나는 자전거 후미 깜빡이와 전조등을 켜고 바깥으로 나갔다. 찬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마틴 뒤를 따라 고가 도로를 건너고 비좁은 골목을 통과해 한참을 달렸다.
‘만능 키님이 안 보여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되돌아가보니 땅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밧줄로 동여매고 있었다.
웰링턴 중앙역 바로 앞에 위치한 게스트 하우스는 벙커 스타일(Bunker Style)의 2층 침대 방이었다. 네 명이 한 방에 들었다. 추니가 좀 불편하겠지만 이젠 그런대로 잘 적응하고 있다.
공동 화장실과 샤워장이 복도에 있었다. 침대 왼쪽 위엔 내가 올랐고 아래엔 추니가 자리했다. 오른쪽 위엔 인천 총각이 올랐고 아래는 만능 키가 차지했다. 추니가 옷을 갈아입을 땐 남정네들은 모두 밖으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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