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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아이들'의 영원한 선생님 가시다

이오덕 선생 지병으로 타계, "즐겁게 돌아갔다" 유언

또하나의 큰 별이 졌다.

'일하는 아이들'의 영원한 스승인 이오덕 선생이 25일 오전 7시께 충북 충주시 신리면 광월리 710 자택에서 78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 수년간 지병인 신장병을 앓다가 지난해 건강이 일시 회복돼 두 편의 평론집을 내는 등 왕성한 집필활동을 펼쳤으나 지병이 최근 다시 악화돼 이날 아침 타계했다.

고인을 모시고 농사를 짓던 큰아들 이정우씨는 "부친께서 부고를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말고 장례가 끝난 뒤 '즐겁게 돌아갔다'고 전하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일하는 아이들의 영원한 선생님**

고인은 '일하는 아이들'의 영원한 선생님으로 유명하다.

고인은 1925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1944년 초등학교 교사가 된 이래 43년동안 교직에 몸담았다. 재임기간중 부산과 경남 함양에서 7년간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고향인 경북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고인은 특히 60, 70년대 농촌에서 어린 초등학생들과 생활하며 그 아이들의 생활글을 모아 책으로 펴냈는데, 그것이 유명한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일하는 아이들>이다. 농촌 아이들의 살아있는 감성과 말, 생각이 담긴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이 책은 고인의 벗인 김녹촌 선생의 <마을 심는 아이들>과 더불어 '아동문학' '노동문학'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문학평론가인 김이구 창작과 비평사 실장은 몇해 전 고인을 "이오덕은 일하는 아이들만이 진정한 아동이고, 참된 아동문학은 일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활과 감정과 꿈을 그들의 편이 되어 그리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는 '이오덕 평'을 했었다.

이에 대해 고인은 지난해 펴낸 생애 마지막 평론집에서 "1990년대이후 지나친 사교육과 컴퓨터에 대한 몰두로 옛날처럼 뛰어놀지 않는 등 아이들의 생활이 크게 바뀌었다"며 "아동문학도 이런 현실속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자신의 아동관을 보완설명했다.

고인은 "이제 '일하는 아이들'은 과거처럼 노동에 종사하는 아이들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일도 하고 무엇을 만들고 기르고 관찰하는 아이들로 확대해석해야 한다"며 "아이들의 그런 현실을 제대로 알고 정확하게 그리기보다는 책상에 앉아 상상만으로 글을 쓰는 요즘 아동문학 작가들의 태도에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우리말 지킴이**

고인은 생전에 고 미승우 선생, 백기완 선생 등과 더불어 50여권의 우리말 관련 저서를 펴낸, 우리말 지킴이로도 유명했다.

"신문이나 잡지에 나온 글, 방송에서 쓰는 말을 보면 참 답답하고 서글프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됐나 하는 참담한 생각이 든다.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 겨레말이 다 망가졌다.

우리 말글을 제대로 살려 써야 하는데, 부모들로부터 잘못된 말글을 배우고 자랐으니 아이들이 제대로 배울 수가 없다. 배울 사람들이 일본 글을 자꾸 읽다 보니까 머리속에 한자말만 떠오르고 그걸 또 뒷세대가 배우고 하는 거다.

예를 들어보자. '전혀'라는 말을 참 많이 쓰고 있는데 그건 '아주' '도무지' '조금도' 이렇게 써도 된다. 그러나 일본말 번역어가 몸에 배어서 그 말만 쓰고 있다.

배운 사람들이 책이나 강연에서 '벌써'라는 살아있는 우리 말을 두고 '이미'라는 생활공간에서는 죽은 옛말을 쓰는 것도, 일본말 '스데니'의 번역말로 '이미'를 쓰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먼저 말이 있고 그 다음에 글이 있는 것인데, 보통사람들이 밥먹고 일하고 잠자고 하면서 쓰는 말을 살려 글로 써야 한다. 그런데 그게 거꾸로 돼서 지금은 아이들조차 책에서나 나오는 우리 말이 아닌 말을 쓰고 있다."

고인이 생애 마지막으로 지난 5월말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개탄이다.

***"반민주 망령 부활은 용납할 수 없다"**

고인은 생전에 민주-민족운동에도 헌신적이었다.

고인은 1986년 2월 천직으로 여기던 교직을 떠났는데, 고인의 표현을 빌면 이유인즉 "전두환이 하두 발악을 하고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까 그만 몸서리가 나서"였다.

그후 고인은 주요 시점마다 위협에 개의치 않고 여러 민주인사들과 함께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지난해 11월말에는 대선과정에 냉전세력의 준동이 극에 달하자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만길 상지대 총장, 고은 시인 등 지인들과 함께 '현 정국을 우려하는 지식인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냉전 근본주의자들과 극단적 세력이 되살아나는듯한 상황을 바라보며, 반민주적 망령의 부활을 보는 것 같아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민주주의에서 반민주주의로, 남북간 화해와 협력에서 갈등의 길목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만큼 반민주-반통일세력을 상대로 제2의 민주화운동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평생을 곁눈질함이 없이 일하는 아이들과 우리말, 그리고 우리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살다간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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