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폐막한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자유무역'을 강조한 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가 불과 이틀 뒤에 "한일 간 신뢰가 훼손됐다"면서 경제보복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치적 문제로 경제보복을 하는 것은 자유무역의 정신과 정반대라는 점에서, 오는 21일 참의원 선거에 우익 표 결집을 위한 정치적 노림수로 해석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오는 4일부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패널 핵심소재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1일 공식 발표했다. 수출 규제 대상이 된 핵심 소재는 △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등에 쓰이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 반도체 기판 제작 때 쓰는 감광제인 리지스트, △ 반도체 세정에 사용하는 에칭가스(고순도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이다.
일본은 전 세계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및 리지스트 생산량의 약 90%, 에칭가스는 약 70%를 점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규제가 장기화되면 한국의 삼성전자·LG전자·SK하이닉스 등 주요 기업들이 대체가 불가능한 소재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이 대체 수입선을 찾아 소재를 공급해온 일본 기업들에 타격을 입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일본 재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들 3개 품목의 수출 규제 강화 더불어 한국을 외국환관리법상 우대제도인 '화이트(백색) 국가' 대상에서 한국을 아예 제외하는 내용으로 정령(한국의 시행령에 해당)을 개정하기 위해 이날부터 의견수렴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현재 일본 정부는 한국을 비롯해 미국·독일·영국 등 우호국 27개 나라를 '화이트 국가'로 지정, 자국 기업이 이들 나라에 첨단소재 등을 수출할 땐 신청 및 허가에 간소화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되면 앞으로 일본 업체로부터 첨단소재 등을 수입할 땐 개별적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개별 신청 및 허가 땐 건당 90일 정도 심사 기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정부 스스로 '경제보복' 시인…참의원 선거 겨냥?
경제산업성은 "관련 부처에서 검토한 결과 '한일 간 신뢰관계가 현저히 손상됐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이에 따라 수출관리에도 부적절한 사안이 발생할 수 있어 제도 운용을 보다 엄격하게 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수출 규제를 발표한 주무부처 스스로 '경제보복'이라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NHK 등 일본 언론들조차 "한일 간 신뢰가 현저히 손상됐다는 평가는 한국의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를 뜻한다"면서 "타국과의 갈등 국면에서 통상규칙을 자의적으로 사용해 후폭풍이 우려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관방 부(副)장관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안보 차원에서 수출관리 제도가 적절히 운용되고 있는지를 재검토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책임을 일본기업에게 부과한 판결과 무관하다"고 강변했다.
이 설명에 따른다고 해도 안보를 내세워 무역장벽을 세우는 방식은 현재 미중 무역분쟁과 닮은꼴이다. 이에 <환구시보> 등 중국 언론은 "일본이 미국에서 배워 무역 제재를 한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인민일보>는 "일본이 한국에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을 제한하는 조치로 인해 한일 관계가 더욱 악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 내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 한일 간 입장 차이는 좀처럼 해소되기 어려운 문제다.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한국 측에 제공한 총 5억 달러 상당의 유무상 경제협력을 통해 모두 해결됐다는 입장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0월 이후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한 한국 대법원의 징용 관련 손해배상 판결이 잇따르자 "국제법 위반"이라고 반발해왔다.
하지만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따른 한일 간 갈등을 경제보복으로 대응한 아베 총리의 이율배반적인 행보에 일본 언론의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G20 회의에서는 다른 19개국을 대표해 공동성명에 들어갈 ‘자유무역’ 관련 문구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협상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성명에는 "자유롭고 공평하며 무차별적이고 투명성이 있는 무역과 투자 환경"이라는 문구가 들어갔는데, 일본 정부는 아베 총리가 조정 능력을 발휘해 이런 문구를 제안했다는 점을 내세웠다.
정부는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대응 조치를 다각도로 검토해 맞대응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일본의 보복성 조치가 나온다면 가만있을 수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은 이날 오후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또한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일 수출상황 점검회의를 열어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현재 한일청구권 협정상 분쟁해결 절차인 중재위 구성을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등 한일관계는 전방위적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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