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아픔의 현장…창녕 민간인 학살 및 미군폭격 사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아픔의 현장…창녕 민간인 학살 및 미군폭격 사건

들판 한 가운데 봉분, "저기 울타리는 왜 쳐 놨는지 모르겠다"

한국전쟁 당시 창녕지역은 낙동강 전투 및 영산지구 전투가 벌어진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 격전을 딛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호국의 중심지이다.

전쟁이 남긴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창녕, 69년 전 이곳 창녕에서 벌어진 전쟁의 현장에서 우리들의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집단 학살 당하는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창녕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은 200여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보도연맹 사건, 1950년 8월 11일 도천면 논리 내리미들에서 희생자가 수백명으로 추정되는 미군 폭격 사건, 1950년 8월 25일 창녕읍 여초리에서 자행된 민간인 70여명 희생 사건 등이며 희생자를 헤아리는 것 조차 가슴 아픈 역사다.

이 가운데 보도연맹사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국가에 의한 학살로 인정, 지난 2010년부터 매년 합동위령제가 창녕군 후원으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도천면 논리 및 창녕읍 여초리 학살사건은 창녕군민들에게서 조차 잊혀져가고 있다.

도천면 논리 민간 학살 및 미군 폭격 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1950년 8월 9일과 10일에 마을을 떠나라는 미 24사단의 지시에 따라 도천면 일대 1000여 명의 주민이 피난하기에 적당한 골짜기가 있는 도천면 어만리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인 8월 11일 아침 국군이 와서 다시 마을을 떠날 것을 지시했다.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전선에서 떨어진 밀양 방면으로 이동하기 위해 낙동강 변으로 떠났다.

이날 오전 10시 강변에 도착하기 전 도천면 논리 내미리들에서 아침을 먹으려던 피난민들에게 미 공군의 폭격이 가해졌다.

처음에는 폭격기 4대가 날아와 둑 위에 2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를 피하려 피난민들이 흩어지자 이들을 쫓아가며 30분 동안 기총사격을 가했다.

이 공격은 미 공군 8폭격대대의 폭격기록과 일치한다.

한편 피난민에 대한 공격은 미 공군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것은 아니었다. 근처 도로에 있던 미군과 국군이 이들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고 희생자 원혼을 달래 줄 위령탑 건립 및 유족들에 대한 보상 등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미군 폭격사건 희생자 추모비 ⓒ프레시안 (이철우)
25일 <프레시안> 기자는 창녕군 도천면 논리에 위치한 창녕군 미군 폭격 사건 희생지를 찾아 참배했다.

현장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장 및 창녕군수 명의의 표지판과 유해매장 추정지 훼손 금지를 위한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제초작업은 되어 있었지만, 울타리도 낡았고 접근금지 표지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안타까운 상태였다.

마을 어르신은 “들판 한가운데 봉분에 유해가 있을 것이다. 저기 울타리는 왜 쳐놨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이곳은 유해매장 추정지역으로 관리할 곳이 아니라 하루속히 유해발굴 등의 조치가 필요한, 창녕이 간직한 아픔의 현장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