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창녕지역은 낙동강 전투 및 영산지구 전투가 벌어진 치열한 격전지였다. 그 격전을 딛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호국의 중심지이다.
전쟁이 남긴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창녕, 69년 전 이곳 창녕에서 벌어진 전쟁의 현장에서 우리들의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집단 학살 당하는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보도연맹사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국가에 의한 학살로 인정, 지난 2010년부터 매년 합동위령제가 창녕군 후원으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도천면 논리 및 창녕읍 여초리 학살사건은 창녕군민들에게서 조차 잊혀져가고 있다.
도천면 논리 민간 학살 및 미군 폭격 사건은 이렇게 일어났다. 1950년 8월 9일과 10일에 마을을 떠나라는 미 24사단의 지시에 따라 도천면 일대 1000여 명의 주민이 피난하기에 적당한 골짜기가 있는 도천면 어만리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인 8월 11일 아침 국군이 와서 다시 마을을 떠날 것을 지시했다.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전선에서 떨어진 밀양 방면으로 이동하기 위해 낙동강 변으로 떠났다.
이날 오전 10시 강변에 도착하기 전 도천면 논리 내미리들에서 아침을 먹으려던 피난민들에게 미 공군의 폭격이 가해졌다.
처음에는 폭격기 4대가 날아와 둑 위에 2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를 피하려 피난민들이 흩어지자 이들을 쫓아가며 30분 동안 기총사격을 가했다.
이 공격은 미 공군 8폭격대대의 폭격기록과 일치한다.
한편 피난민에 대한 공격은 미 공군에 의해서만 저질러진 것은 아니었다. 근처 도로에 있던 미군과 국군이 이들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고 희생자 원혼을 달래 줄 위령탑 건립 및 유족들에 대한 보상 등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현장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장 및 창녕군수 명의의 표지판과 유해매장 추정지 훼손 금지를 위한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제초작업은 되어 있었지만, 울타리도 낡았고 접근금지 표지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안타까운 상태였다.
마을 어르신은 “들판 한가운데 봉분에 유해가 있을 것이다. 저기 울타리는 왜 쳐놨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이곳은 유해매장 추정지역으로 관리할 곳이 아니라 하루속히 유해발굴 등의 조치가 필요한, 창녕이 간직한 아픔의 현장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