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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암(朝宗巖)의 의미 새기고 명지계곡의 시원함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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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종암(朝宗巖)의 의미 새기고 명지계곡의 시원함에 빠지다

2019년 7월 고을학교는 <산 좋고 물 좋은 가평고을>

7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69강은 경기도의 최북단 가평을 찾아가 조종암(朝宗巖)의 숭명배청(崇明排淸) 유적과 가평이 배출한 고려의 보우(普愚)국사, 대동법 시행자 김육(金堉), 최초의 양명학자 남언경(南彦經)의 자취를 찾아보고 맹하의 더위를 씻어낼 겸 명지계곡에서 잠깐 트레킹도 할 예정입니다.

▲한여름 불볕더위도 얼찐 못하는, 계곡 중의 계곡 명지계곡Ⓒ가평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69강은 2019년 7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6시 50분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4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9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조종면(연안이씨삼세묘역/이천보고가/연하리향나무/삼충단/조종암/대통묘)-두밀리(중종태봉)-가평읍(가평향교)-점심식사 겸 뒤풀이-명지계곡(승천사/명지폭포)-청평읍(잠곡서원유물)-설악면(미원서원터/별묘)-서울의 순입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가평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9강 답사지인 <가평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산 좋고 물 좋은 고을
가평은 경기도 동북 산간지역에 위치하여 대부분이 험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지형적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점차 낮아집니다. 가평은 동쪽으로 강원도 춘천시, 홍천군과 맞닿아 있고, 서쪽으로 남양주시, 남쪽으로 양평군, 북쪽으로 포천시, 화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평의 산줄기는 북쪽으로 화악산이 진산(鎭山)이 되어 촛대봉, 매봉, 국망봉, 강씨봉, 명지산, 수덕산, 계관산을 거느리며, 해발 700∼800m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한북정맥을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 중미산, 화야산, 장락산의 지맥이 용문산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 주금산, 축령산 등이 산줄기를 이어 갑니다.

가평의 물줄기는 북한강이 가평읍 대곡리에서 춘천시와의 경계를 따라 남쪽으로 흘러 청평호를 이루고 군의 남부를 가로지르며 북면 적목리에서 발원한 가평천과 하면 신판리에서 발원한 조종천이 각각 가평읍과 청평리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듭니다.

가평은 고구려 때 근평군 또는 병평군이라 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가평군으로 개칭하였고 1018년(고려 현종 9) 춘주(춘천)의 속군이 되었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어 현감이 부임하였습니다. 1507년(중종 2) 종래의 현을 군으로 승격했으며 1697년(숙종 23)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07년 군으로 다시 승격되었습니다. 1883년(고종 25) 강원도로 편입되었고 1895년 경기도 포천군에 일시편입 되었다가 1년 후 가평군으로 독립하였습니다. 1942년 설악면이 양평군에서 가평군으로 편입되었고 1963년 외서면 입석, 내방, 외방리가 양주군 수동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73년 가평면이 가평읍으로 승격하였고, 양평군 삼회리가 가평군 외서면으로 편입되었습니다. 2004년 외서면이 청평면으로 2015년 하면이 조종면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유적들이 전해오는 조종암(朝宗巖)Ⓒ가평군

가평향교와 미원서원지
가평에는 가평읍 읍내리에 가평향교, 설악면 선촌리에 미원서원지(迷源書院址), 외서면 청평리에 잠곡서원지(潛谷書院址), 상면 연하리에 이천보고가(李天輔古家)가 남아 있습니다.

가평향교는 1398년(태조 7) 세워졌으며 현재는 대성전, 서무, 내삼문, 재실, 명륜당이 남아있습니다. 1636년(인조 14)에 대성전 일부가 파손되어 개축하였고, 한국전쟁 때 대성전이 불타 휴전 후 새로 지었습니다. 1980년 가평군 유림들의 성금과 예산으로 대성전, 서무, 내삼문을 중건하고 재실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이며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다섯 분의 성인과 동쪽 벽으로는 송준길 등 열 분과 서쪽 벽에는 주희를 비롯한 열 분의 위패를 모셔 놓았습니다.

미원서원은 1661년(현종 2)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와 김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1668년 김육, 1694년(숙종 20) 남언경, 1734년(영조 10) 이제신, 1792년(정조 16) 김창흡을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 터에 묻었습니다. 1919년 지방유림이 단(壇)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한국전쟁 이후 퇴락되었던 것을 1974년에 중수, 개축함과 동시에 박세호, 이원충, 남도진, 이항로, 김평묵, 유중교를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아울러 단비를 세우고, 서원 사우의 현액이 경현사(景賢祠)였으므로 단의 명칭을 경현단이라 하였고 단 입구에 신문(神門)을 세웠습니다. 경내 사우 자리에 설단을 하였고 신문, 재실, 기념비가 남아있습니다. 단지에는 정면 중앙에 조광조와 김식의 단비를 세웠고, 왼쪽으로 남언경, 김육, 박세호, 남도진, 김평욱, 오른쪽으로 이제신, 김창옹, 이원충, 이항로, 유중교의 단비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잠곡서원과 이천보고가
잠곡서원은 1705년(숙종 3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청평면 청평리 잠곡동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습니다. 1707년에 ‘잠곡(潛谷)’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다가 1870년(고종 7)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서원 자리에 매안(埋安)하였습니다. 그 뒤 지방유림에 의하여 단(壇)을 설치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한국전쟁으로 폐허화되었으며, 1981년에 다시 설단하고 위패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발굴과정에서 서원 터가 아닌 것으로 판정되어 2013년 4월 12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습니다.

이천보고가는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고 ‘까막소대감’으로 유명했던 진암 이천보가 살았던 집입니다. 이천보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글과 글씨가 뛰어난 문인으로 벼슬은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습니다. 건물은 1867년(고종 4)에 다시 지었으며, 한국전쟁 중 안채는 불타 없어지고 사랑채와 행랑채만 남았습니다. 사랑채는 경기지방에서 많이 나타나는 평면 형태로 하지 않고 보다 옛날 방식인 '一'자형입니다. 연하리 향나무는 이천보가 살던 집 후원에 있는 정원수로 주위에는 목련과 상수리나무가 있어 옛 정취를 자아냅니다. 향나무는 약 300년 된 것으로 가슴높이둘레 2.6m, 높이 13m, 둘레 12m의 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고 ‘까막소대감’으로 유명했던 진암 이천보의 고가Ⓒ가평군

전해오는 숭명배청의 유적들
가평에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유적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종암(朝宗巖)은 1684년(숙종 10)에 우암 송시열이 명나라 의종의 어필인 ‘思無邪(사무사)’를 새기고 또 효종이 내려준 ‘日暮途遠 至通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 속에 있네)’라는 문구를 직접 써서 가평군수인 이제두에게 보내 이를 바위에 새기도록 부탁함으로써 연유합니다. 이에 이제두, 허격, 백해명 등 여러 선비가 힘을 합하여 위 글귀와 선조의 어필인 ‘萬折必東 再造瀋邦(만절필동 재조심방-일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거니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 주었네)’와 선조의 후손인 낭선군의 글 ‘朝宗巖(임금을 뵈는 바위)’을 바위에 새기고 제사를 지낸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조종(朝宗)이란 여러 강물이 바다에 흘러 들어가 모인다는 뜻이면서 또한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조종천이 조종암을 조성한 당시의 유신들에게 선택되어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장소로 조성된 것입니다. 조종암은 암각문, 비석, 단지(壇址) 등의 유적을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암각문은 한 곳에 모여 있는 여러 개의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비석은 그 바로 앞에 세워져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제사를 지내는 대통묘가 있으며 그 앞으로는 맑은 조종천이 산굽이를 돌아 흐르고 있습니다.

중종대왕태봉과 삼충단
가평에는 중종대왕태봉(中宗大王胎封)과 경술국치에 자결한 세 분의 충신을 모신 삼충단(三忠壇)이 있습니다.

중종대왕태봉은 중종의 태(胎)를 모신 곳으로 조선시대 태봉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입니다. 1982년 12월 산주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작업을 하던 중 태를 봉안했던 지름 100cm, 높이 120cm인 태항아리가 출토됨으로써 이곳이 태봉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근에는 파손된 거북비석을 비롯하여 난간석 등이 흩어져 있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도굴로 인하여 파손되고 방치되었던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가평현조에 의하면 1507년(중종 2) 중종의 어태(御胎)를 안치하고 가평현을 가평군으로 승격시켰다고 하였으니 1492년(성종 23)에 어느 곳인가에 태를 봉안했던 것을 1507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봉안하고 새로 임금의 품격에 맞게 태실을 조성하였던 것입니다.

삼충단은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 세 분 충신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입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조병세는 의정대신으로 있다가 가평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하였으나 일제 헌병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습니다. 최익현은 의병을 봉기하여 왜구토벌에 앞장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단식 항거 중 순국하였습니다. 민영환은 시종무관이었는데 대한문 앞에 나가 석고대죄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습니다. 삼충단은 1910년에 설단 되었으며 1989년에 복원되었고 매년 11월 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조선조 중종의 태(胎)를 모신 중종대왕태봉Ⓒ가평군

연안이씨, 의령남씨, 청풍김씨의 유적들
가평에는 연안이씨, 의령남씨, 청풍김씨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연안이씨 묘역에는 삼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낸 월사 이정구의 묘소가 제일 앞에 있으며 위로 장손 이일상의 묘, 그 위로 장자 이명한의 묘가 있습니다. 후손의 묘가 위에 있는 것은 순서대로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올 묘 자리라 하여 반대[易葬]로 묘를 썼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는 이정구, 이명한, 이일상의 연안이씨 삼세신도비가 있습니다.

이정구의 자는 성징이고 호는 월사이며 15세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1590년(선조 23)에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명과의 대외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이후 호조판서, 예조판서, 좌의정, 우의정을 거치면서 순탄한 관료생활로 일생을 마쳤으며 시호는 문충입니다.

<월사집> 목판은 1636년(인조 14)에 월사의 손자인 일상이 판각한 것으로 현재는 모두 1,334판이 장판각에 보존, 관리되고 있습니다. 월사는 한문학의 대가로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신흠, 장유, 이식과 더불어 조선중기 4대문장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명한의 자는 천장이고, 호는 백연으로 1595년(선조 29)에 이정구의 장남으로 태어나 22세에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정자와 전적을 거쳐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습니다. 1645년(인조 23)에 영면 하였고 시호는 문정입니다.

이일상의 자는 함경이요 호는 청호이며 1612년 이정구의 손자이자 이명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7세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있다가 22세 되던 해에 설서가 되면서부터 사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효종으로 하여금 북벌계획을 수립토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1660년 현종이 임금에 오른 뒤부터 대제학, 우참찬, 한성부판윤, 지의금부사, 춘추관사, 호조판서 등 주요 요직을 거치다가 예조판서로 있을 때 향년 55세에 이르러 별세한 뒤 우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최초의 양명학자 남언경
남언경(南彦經)은 호는 정재, 동강, 본관은 의령입니다. 소년시절에 화담 서경덕 문하에 들어가 박순, 허엽, 박민헌 등 당대의 뛰어난 재목들과 교류하며 학문의 깊이를 넓혀왔습니다. 이곳에서 심성학에 대한 여러 학설을 익히며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였는데 후세의 학자들이 그를 최초의 양명학자로 일컫고 있습니다. 홍인우의 <취재일기(恥齋日記)>를 보면 퇴계 이황과 더불어 토론할 때 밤을 지새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퇴계는 대사성이란 높은 직위에 있었으나 젊은 청년과 학문을 논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함은 이미 동강이 학문에 대한 높은 식견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동강은 이때에 이미 퇴계, 율곡, 우계 등 훌륭한 석학들과 교류하고 때로는 강론하면서 양명학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고 제고시켰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1566년(명종 21) 경명행수(經明行修)로 특별 천거되어 포의(布衣)로서 임금 앞에 입대(入對)되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동강이 치도(冶道)와 철학을 강론함이 누구보다 뛰어나 그 재질을 인정받아 특별히 등용된 것이며 이를 계기로 헌릉참봉이 되었다가 공조좌랑에 이어 지평현감이 되었습니다. 1568년(선조 2) 이이, 기대승, 노수신, 윤두수, 윤근수, 이제신, 이산해, 최경창 등과 더불어 제술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들을 접촉하면서 양명학에 깊이 접근할 수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더욱 많은 명사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1571년(선조 4) 청풍군수가 되고, 다시 양주목사가 되어 도봉서원을 창건하였으며, 이 때 그의 높은 학문과 재질을 인정한 율곡 등의 추천으로 과시출신이 아니면서도 헌관이 되어 사헌부 지간, 장령을 거쳤고 1581년 사헌부 집의로 있을 무렵 율곡과 더불어 당쟁에 휘말린 송강 정철을 구하려다가 파직되어 파주목사로 나갔으며, 1585년(선조 16)에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공조참의가 되었습니다.

1588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 때 3년 전 전주부윤이었을 때 왜구를 토벌한 정여립에게 시 한 구절을 지어 격려해 준 일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고, 이 때문에 사림에게 배척되는 아픔을 겪었고 1589년(선조 23) 마침내 가평군 설악면 이천리 영천부락으로 낙향하였습니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 일어나자 박순, 정엽, 김상용 등 피난중인 사대부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봉기하고, 인근 지역인 홍천, 춘천 등지에서 360여 명의 근왕병을 모집하였으나 1594년(선조 28) 향년 65세로 진중에서 병사하였습니다. 묘는 동강이 복거지로 삼았던 설악면 이천리 영천마을에 있으며 1694년(숙종 21) 설악면 미원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친일파 남정철
남정철(南廷哲)은 호는 하산, 본관은 의령입니다. 청년시절 조상 대대로 살아온 설악면 방일리에서 10여 리 안팎에 거주하던 화서 이항로의 아들 이박과 자주 왕래하며 학문을 토론했고 성재 유중교와도 교류하였습니다. 1865년(고종 2) 사마시에 합격하여 건릉참봉이 되었고 1883년(고종 20) 남학교수가 되었다가 예조참의에 오르고 곧이어 동부승지, 우부승지에 올랐습니다. 이듬해 공조참판이 되었을 때 중국 천진에 주제하는 주진대원이 되면서부터 3차례나 천진에 가서 오장경, 이홍장 등과 만나 외교활동을 폈으며, 갑신정변 때는 원세개 진중에 편지를 보내 구원을 청한 결과 정변을 좌절시키는데 큰 공을 세우는 수완도 발휘하였습니다.

1885년(고종 22) 1월 다시 천진에 들어갔다가 보정부에 머물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만나고 돌아 온 후 한성부윤, 예조참판, 그리고 평안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양에 머무는 동안 삼희재란 서당을 짓고 황립을 훈장으로 임명해 후생교육에 전념해야 된다는 조치를 내린 바 있고, 한편으로는 광산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고 군사적 요충지인 평양의 병졸훈련과 보급에 원활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1888년 54세에 도승지,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정치가요 외교가이며 유학자로서의 굳은 위치와 면모를 과시하였습니다. 1893년 외무독판이 되어 전권대신으로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베커 장군과 한·오 통상조약을 맺었고, 황해도와 함경도에 내려진 세 차례의 방곡령에 대해 일본이 1개월 이전에 사전 통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상청구를 하였는데 그는 일본공사 대석정기와 직접 담판으로 배상금을 크게 낮추었습니다.

아관파천 때는 러시아 위베르 공사와 만나 고종의 환궁교섭에 앞장섰고, 1899년 내부대신이 되어 여러 번 사직서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소식을 듣고, 일선에서 이 조약의 폐기와 오적을 처단하자는 조병세, 민영환, 송병준 등을 고종과 만나도록 주선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고종의 명을 받고 애국가를 지었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글씨도 명필이었는데 현재 덕수궁의 대한문 글씨도 남정철이 쓴 것입니다. 본래 수구파 출신으로 이완용과는 정적이었으나, 1910년 한일합병 조약체결에 협조한 원로대신으로서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아들 남장희와 함께 선정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초기의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별묘는 남도진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설악면 방일리 음방(陰坊)에 있습니다. 사당에 모셔진 영정은 1728년(영조 5) 숙종 때 화가 함세휘가 그린 것으로 인물에 대한 선의 감각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영정은 후손들에 의하여 보관되어 오다가 그의 6대손이자 구한말 학자이며 정치가, 외교관으로 이름이 높았던 남정철이 1888년 이곳에 사당을 지어 모셨는데 1985년 후손들에 의하여 다시 전통가옥으로 중건한 것입니다. 영정에는 남도진이 쓴 명문과 친구 박창언이 그 아름다움을 예서로 찬미한 글이 있고 조봉주가 찬미한 글과 함세휘가 戊申六月下院(무신유월하원)에 그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동법의 주창자 김육
김육(金堉)은 대동법의 주창자이자 효종 대의 명재상으로 자는 백후, 호는 잠곡, 회정당,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청풍(淸風)입니다. 실학의 원조인 유형원에게 큰 영향을 끼쳐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고,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 지리, 병략, 율력에 정통하였습니다. 김육의 어린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3살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강원도와 평안도를 오가며 피난생활을 했고, 15살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흉년에다 전쟁 중이어서 아버지의 유해를 임시로 안장한 후 어머니와 함께 다시 청주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19세에는 장손으로서 할머니의 상주가 되었으며 21세에는 어머니마저 여의고 8년 상을 치렀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의 연이은 상은 김육에게 큰 시련이었으며 결국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진된 김육은 쓰러지고 마는데 다행히 고모의 정성 어린 간호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1605년 소과에 급제해 성균관 유생이 된 김육은 집권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과 충돌하게 됩니다. 정인홍이 사림의 존경을 받던 이언적과 이황을 공격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을 유학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해버렸는데 이때 재임(齋任, 학생 회장격)이었던 김육이 주동자로 처벌받아 대과 응시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얼마 후 자격이 회복되긴 했지만 정권 실세에게 찍혀버린 그는 관직생활에 대한 기대를 접고 가족을 이끌고 가평 잠곡으로 낙향하여 직접 농사를 짓고 숯을 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조정의 부름을 받게 되었는데 45세라는 나이로 전시에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이때 김육이 제출한 답안지는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상세히 서술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함으로써 찬사를 받았으며 같은 해 음성 현감으로서 올린 백성 안정책 상소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모두 가평에서의 경험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개성 송양서원, 가평 잠곡서원, 설악의 미원서원, 강동의 청계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도 이곳 잠곡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김평묵(金平默)은 호는 중암, 본관은 청풍으로 어려서부터 이항로의 문하로 들어가 그의 학통을 계승하여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을 길러냈고, 학통고(學統考) 등 수많은 저술을 하였습니다. 김평묵은 1867년 3월 그의 나이 48 세 때 설악면 신천리 속청 큰골[大谷]에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이곳에 머물러 살면서 양구, 홍천 등지에서 찾아와 배우는 학동들을 가르치며, 노모를 봉양함에 극진한 효성을 다했습니다.

50세가 되던 5월 한포서사(漢浦書社)를 짓고 공부하는 학동과 찾아오는 학자들의 휴식공간과 대화의 장소로 관물대(觀物臺)와 겸산대(兼山臺)의 두 정자를 세웠습니다. 지금도 ‘觀物臺’와 ‘兼山’이란 암각서가 남아있습니다. 1881년(고종 11) 62세의 나이로 영남에 내려가 이만손을 비롯한 유생 1만여 명에게 척사위정운동을 벌렸고 그 해 7월에 다시 초안해 올린 척양척왜의 상소로 말미암아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대원군이 집권하자 풀려났습니다. 1888년(고종 25) 70세로 영면하고 미원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태고 보우국사가 태어난 곳
가평은 고려 말 보우국사, 설화문학의 대가 유몽인, 독립운동가 신숙 등도 배출하였습니다.

보우(普愚)의 호는 태고(太古)이며 1301년(충렬왕 27) 설악면 설곡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3세에 회암사에서 광지선사를 스승으로 출가하고 가지산총림에서 수행하였습니다. 19세에는 만법귀일이라는 화두로 법을 설파했지만 대중들이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26세에 화엄선과에 합격하였고, 1337년 37세 되던 겨울, 전단원에 머물렀고, 이듬해 정월에 크게 깨닫고 3월, 고향인 설곡리로 돌아와 몸소 소설암(小雪菴)을 짓고 부모님을 모셨습니다. 1339년(충숙왕 8) 부모님을 하직하고 소요산 백운암에 머물다가 삼각산 동쪽에 암자를 짓고 태고사라 하였습니다.
1346년(충목왕 2) 46세에 중국에 들어가 연경 등지를 유람하고, 호주(湖州)에 있는 하무산에 들어가 석옥공(石屋珙)선사를 만나보고 태고암가(太古菴歌)를 지어 바치니 석옥이 탄복하고 신표로서 가사 한 벌을 주었는데 석옥은 임제의 18대손입니다. 당시 천자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영령사에 당(堂)을 열 것을 청하면서 금란가사와 심향불자를 하사하였고, 왕비와 황태자는 향폐(香幣)를 내렸으며, 왕공사녀들은 법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때에 반야경을 설하였습니다.

1348년(충목왕 4) 봄에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짓다 떠난 소설암을 완성하고, 4년간을 지냈습니다. 1352년(공민왕 1) 공민왕이 국사(國師)로 모시고 그의 고향 미원장(迷源莊)을 미원현으로 승격시켜 주었습니다. 신돈의 음모로 잠시 전주에 있는 보광사에 머물렀는데 신돈의 계략에 속은 임금은 보우를 속리산 속리사에 금고토록 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1369년 3월 공민왕은 자신이 신돈의 술책에 속은 것을 후회하고 보우를 소설산으로 돌아가게 하였고 1371년 신돈은 국사를 농락한 죄로 참수되었으며, 공민왕은 흐트러진 국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보우를 국사로 재추대하고 법호를 내렸습니다. 세수 82세, 법랍 69세로 열반에 들자 왕은 원증(圓證)이란 시호를 내리고 사리탑을 중홍사 동쪽 봉우리에 세우게 하고 탑호를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 하였습니다. 1385년(우왕 11) 목은 이색은 왕명에 의하여 원증국사탑비를 지었습니다.

유몽인(柳夢寅)의 자는 응문이고 호는 어우당, 간제, 묵호자, 시호는 의정, 본관은 고흥입니다. 성혼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암행어사가 되었습니다. 선조 말년 황해도 관찰사, 좌승지, 도승지를 역임하고 예조참판,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인조반정을 지지하지 않은 탓에 벼슬을 내놓고 금강산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유응시의 고변으로 기자헌, 유경종 등이 반란을 일으킨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고 체포되자 양주서산으로 도피했으나 곧 잡혔습니다. 김상헌 등의 문초에 모반사실을 부인했으나 끝내 아들과 함께 사형되었습니다.

훗날 광해군의 신하 가운데 유일하게 절의를 지킨 신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정조 대에 와서 사면되었고 정조는 그의 문집을 간행하라는 어명까지 내리고 그를 김시습에 비유해 역적은커녕 충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학문의 깊이가 있었고 문장력이 뛰어났으나 스승의 책망을 받고, 절교를 당하자 당시 이이첨 등 대북파와 교류하며 중북파의 영수가 되고 스승인 성혼이 죽자 그를 모독하는 글을 지어 주위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중기의 설화문학의 대가였으며 전서, 해서, 초서에 능통하였고 그가 지은 <어우야담>은 조선중기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묘는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진동 능골에 있으며 홍양에 있는 운곡사와 고산에 있는 삼현영당에 제향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신숙
신숙(申肅)의 본명은 신태련(申泰鍊), 호는 강재, 본관은 평산으로 1885년 12월 29일 가평읍 읍내리 향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903년 12월에 동학에 입교하고 1905년 봄에 집을 떠나 상경하여 잠시 순경이 되었으나 부패한 인사 조치에 분개하여 곧바로 사직하고, 국민신보 기자와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이 되었습니다.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에서 근무하면서 김남수, 김남규 등과 청파동에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진력하였는데 이봉창 의사가 이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19년 2월 27일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사장 이종일의 지휘 아래 김영륜과 함께 독립선언서 2만여 매의 교정과 인쇄 작업을 맡았고 이 때문에 3개월간의 옥고도 치렀습니다.

1920년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로부터 천도교의 대표적 인물의 파견 요청으로 밀입국하게 되자 이름을 숙으로 고치고 4월 23일 신상태와 함께 만주를 거쳐 상해로 들어갔습니다. 1925년에는 북만주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였고, 1930년에는 홍진, 지청천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 등 3대 강령과 정치이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독립당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7년 천도교 보국당 대표로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8년 민족자주연맹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4월 11일에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의 연락원 자격으로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까지 다녀오는 등 남북분단 저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자유당 시절에는 서상일, 김성수, 조헌식, 김성숙, 안호상 등과 민주혁신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장에 취임하여 자유당 독재정권에 대항하다가 정계에서 은퇴한 후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대표지도위원, 광복동지회 창립부회장으로 있다가 1960년 4․19혁명 직후에는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으나 갑작스런 중풍으로 쓰러져 끝내 완치되지 못하고 1967년 가회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으뜸계곡 명지계곡
가평에는 한북정맥이 부려놓은 수려한 계곡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명지계곡이 으뜸입니다.

명지계곡은 경기도에서 둘째로 높은 명지산(1,267m)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길게 흘러내려간 계곡입니다. 명지산 입구에서 좌우로 들어찬 수림을 둘러보며 15분 정도 걸으면 숲 사이로 승천사가 나타나고 승천사 종각 뒤로 보이는 명지산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여기부터는 계곡 따라 큰 길이 나 있는데 이 길은 옛날 산판 길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비교적 잘 닦여 있습니다. 계곡 입구에서 50여 분 올라가면 계곡이 깊어지면서 계곡 중간의 명지폭포를 볼 수 있습니다. 높이 7~8m의 명지폭포는 여름철에는 불볕더위도 식혀버리는 피서지로 명지계곡의 으뜸입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 7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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