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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마저 말렸던 제국의 오만, 변방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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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마저 말렸던 제국의 오만, 변방에서 길을 잃다

[이웅현 '비극의 아프가니스탄'] 영국, 소련, 미국을 수렁으로 빠뜨린 나라

자신감

자신감이 화근이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전의 모스크바는 의기양양해 있었다. 소련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침공의 파장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주미 소련대사 도브리닌에게 "3, 4주면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KGB의 제1총국장 크류치코프도 부하들에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의 주둔은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련국방성 (침공)작전그룹 사령관 소콜로프 장군은 작전거점인 테르메즈로 날아가기 전에 부인에게 "한 달 쯤 뒤에 돌아올 테니 그 때 함께 휴가나 가자"고 말했다.(이웅현, <소련의 아프간 전쟁>)

정치인, 정보요원, 군인 모두가 단기전 승리의 자신감에 차 있었다. 자신들이 '10년 전쟁'의 서막을 올리고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 레오니드 일리치 브레즈네프, 1973년
수긍할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후일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브레즈네프의 소련은 더 이상의 변화를 꺼리며 발전의 가능성도 없는 '정체(停滯)'된 나라였지만(이웅현 외 옮김, <러시아의 자본주의 혁명>), 당시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가 이미 더 발전할 것이 없는 완성된 사회주의 체제라고 선전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소련군은 무패의 신화를 자랑하고 있었다. 2000만 명의 희생자를 내기는 했지만 독일과의 '대조국전쟁'(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서 동유럽에 견고한 제국의 외곽을 건설했고, 여기서 이탈하려는 세력을 1956년(헝가리)과 1968년(체코슬로바키아)에 무력으로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한 가지 꺼림칙한 것이 있다면,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 대한 군사적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장고(長考) 끝의 악수(惡手)

그래서 처음에는 망설였다. 1978년 4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급진적 근대화정책에 대한 국내적 반발에 직면한 공산주의자들 즉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타라키와 아민이 1979년 3월 소련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 시작하자, 소련의 지도부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군대를 투입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를 (당신들은 왜) 모르느냐"고 꾸짖으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고민은 시작되었다.

1년 전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탈취했을 때만 해도 남쪽의 이 생소한 국가를 소련의 위성국(몽골)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소련에 압도된 우호적 중립국(핀란드)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두 가지의 선택지 사이에서 누리던 '즐거운 고민'이 이제는 군사적 해결이냐 외교적 해결이냐 하는 양자 사이의 '고통의 씨앗'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선택을 위해 1979년 4월부터 12월까지 장군들(예피셰프<소련군 정치총본부장>, 파블로프스키<소련 지상군 사령관>)도 보내고, 외교대표들(포노마료프<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사프론추크<소련 외무성 외교관>)도 보냈다. 문제는 다녀온 자들의 이야기가 서로 달랐다는 데 있었다.

군사적 정황판단을 하고 돌아온 장군들은 "병력을 배치할 곳도 없는데"(파블로프스키) 무슨 군부대 투입이냐며 신중론을 전개했고, 정치적 상황판단을 하고 돌아온 외교관들은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자들의 (사회통합) 능력을 믿을 수 없다(포노마료프)며 고개를 흔들었다.

카불에 파견되어 있던 대사관, KGB, 군사고문단도 아프가니스탄의 정황에 관해 서로 다른 평가와 판단을 올려 보냈다. 정치국원이자 국방상인 우스티노프는 "(어째서) 거기에 가 있는 당신들은 모두가 서로 다른 평가를 하고 있느냐?"며 짜증을 냈다. 이러한 혼란의 고통을 일거에 해결해 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아프가니스탄의 실력자 하피줄라 아민이었다. 아민은 9월에 쿠데타로 (브레즈네프가 친밀감을 느꼈던) 타라키를 축출했고, 10월에는 그를 살해했다.

▲ 하피줄라 아민
모스크바에서는 신중론을 누르고 강경론이 머리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노쇠하고 병든 브레즈네프에게는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불안해진 아민도 미국으로 기우는 것처럼 보였다. 불신과 안보불안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와 무력이었고, 이것은 자신감으로 뒷받침되었다.

1979년 12월 27일 소련은 사회주의 우방과 전 세계에 알리는 '침공의 변'에서 "아프간 인민에 의해서 성취된 1978년 4월 혁명의 기초가 열강의 간섭에 의해서 위태로워"졌으며, "아민과 그 측근들이 혁명의 일군들을 배신, 제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할 뿐만 아니라" (따라서 아민을 제거하고 카르말을 앉히기 위해), "우호국에 대한 국제주의적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주의 조국의 남쪽 국경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한정적 분견대'를 파견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행동을 야기한 원인이 소멸되면 즉시 철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에, 소련군 '한정적 분견대'의 선두병력 1개 사단은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어 (2010년 2월 눈사태로 수백 명이 매몰되었다고 보도된) 카불 북부 고도 4000m가 넘는 산악에 위치한 폭 2km 길이 100km의 협곡인 살랑 패스를 빠져나가기 위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 통로가 10년 전쟁이라는 더 좁고 길고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찻잔 속의 태풍

140년 전에도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자들이 있었다. 1838년 아프가니스탄의 국왕 도스트 모함메드가 러시아와 페르시아에 기울고 있다고 의심한 대영제국의 식민지 인도 총독 오클랜드는 다우드를 제거하고 샤 슈자를 앉히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10월 소위 '시믈라 선언(Simla Manifesto)'이라는 '침공의 변'을 통해 오클랜드는 "도스트 모함메드가 인도 국경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하는 팽창주의적 야심을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으며", "(영국의) 인도제국의 이익을 손상할 수도 있는 모든 외국의 원조를 받아들이겠다고 위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 분열되고 인기도 없는 자"이기 때문에, 이를 샤 슈자로 교체하기로 했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동시에 "샤 슈자의 정권이 안정되고, 아프가니스탄의 독립과 순수성이 확립되면 영국군은 철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Martin Ewans, Afghanistan). 140년을 사이에 둔 두 '제국'의 '침공의 변'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역시 수긍할 만한 자신감이었다. 19세기 영국은 세계제국이었다. 12월 소집된 2만 여 명의 '인더스군'도 당시로서는 세계 최강이라 할 만 했다. 벵골에서 펀자브로 그리고 페샤와르로, 카불로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휘몰아치려는 폭풍우 속에 작은 저항이 있었다. 적극 협력할 것으로 믿었던 란지트 싱이 협력(침략군의 통과)을 거부했던 것이다. 펀자브의 맹주인 그는 페샤와르에서 아프간인들과 싸워보았기 때문에 하이버 패스 너머의 아프가니스탄 산악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Stephen Tanner, Afghanistan). 그러나 용기는 때로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었던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에 무지한 인더스군은 기꺼이 남쪽으로 돌아 진군했다.

▲ 란지트 싱
란지트 싱의 거부는 침공의 폭풍우에 비하면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1979년 11월 경 소련에서도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가서 보고 온 자들과 군사작전의 무모함을 감지한 자들의 작은 저항이 있었다. 1968년 탱크에 올라 체코슬로바키아로 질주해 들어갔던 파블로프스키는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형에 아연했는지 끝까지 침묵했고, 오가르코프를 총장으로 하는 소련군 참모본부는 "30~40개 사단의 대규모 병력이라면 모를까 4~5개 사단의 한정적 분견대로는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저항했다. 그러나 현지의 상황판단에 입각한 군사 전술적 논리는 가보지 않은 자들의 정치적인 논리와 자신감에 묻혀버렸다.

'국경의 안전확보'와 '아프가니스탄의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선언과 함께 고조된 대영제국의 자신감은 3년여의 고전 끝에 1842년 1월 군의관 브라이든 박사만이 잘랄라바드로 탈주해 오면서 무참히 무너졌고, 역시 '국경의 안전보장'과 '우호국에 대한 국제주의적 의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선전과 함께 끓어올랐던 사회주의제국의 자신감은 1989년 2월 주둔군 마지막 사령관 그로모프가 아프가니스탄을 뒤로 한 채 아무다리야 강의 다리를 건너면서 제국 붕괴의 암운으로 뒤덮였다.

침공의 유산

'변방'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겪었다는 점에서 두 제국은 궤를 같이했지만, 이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남겨놓은 유산에는 차이가 있었다. 영국의 '인더스군'이 3년 2개월 만에 영속지배를 포기한 아프가니스탄에는 도스트 모함메드가 복위하여 두라니 왕조가 지속되었지만, 소련군이 연인원 50여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면서 9년 2개월을 버티다 결국 패주한 아프가니스탄에는 러시아인들이 그토록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요구했던 국가와 사회의 통합이 아니라 극도의 분열만이 남았다.

▲ 보리스 쉐볼로도비치 그로모프
대소련 항전의 전사들 그룹과 소련이 남겨놓은 괴뢰정권,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며 개입해 들어온 외부세력들 사이의 갈등과 분열만이 남았던 것이다. 그로모프는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면서 "소련군은 국제주의적 의무를 끝까지 완수했다"고 선언했다. 그 국제주의적 의무라는 것이 '은둔의 왕국'을 이데올로기와 권력투쟁의 세계무대로 끌어내어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이라면 소련군은 그 의무를 완수했다고 할 수 있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탄생이었다.

오만과 편견

자신감이라는 점에서는,19세기의 영국과 20세기의 소련을 능가하고도 남을 나라가 21세기를 맞이한 미국이었다. 지난 세기에 이른바 '도미노 이론'에 함몰되어 고전했던 베트남전 패배의 기억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냉전과 걸프전 승리의 추억이 대신했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내전에 개입할 때에도 미국은 다른 국가들을 주도했다.

유럽인들이 자랑해 온 근대 문명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완성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식인들은 20세기를 지배해 온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다면서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했고, 역사의 이 최종지점으로 달려가는 열차의 마지막 칸에 중동 이슬람권의 전 근대적 정치체제들이 올라타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명의 충돌'론도 21세기 미국 주도 세계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다른 문명에 대한 경계심의 발로라기보다는 근대문명의 총체적 완성이 대서양을 사이에 둔 서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성적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이것도 수긍할 만한 했다.

그런데, 자신감에 충만했던 소련을 전율케 한 것이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면, 역사적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미국을 뒤흔든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이들이 비호하고 있던 알카에다였다. 1979년 10월의 타라키 살해가 소련의 자신감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처럼, 2001년의 9.11 동시다발 테러는 여지없이 미국의 자신감에 대한 도전이었다. 미국은 즉각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알카에다 소탕을 위한 '대테러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생소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정보획득'과 침공 작전상의 '국제협조'를 위해 플로리다 주 탐파의 미 중부군 사령부로 우방국의 장군들도 초치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을 조언하기 위해 도착한 러시아의 장성들은 "20년 전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더라면, 오늘날 당신들이 이런 문제로 골치를 앓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비아냥댔지만, 미국의 국방부 관계자들과 장군들은 의기소침해지지 않았다. 2001년 9월 탐파와 백악관사이에 열린 한 화상 전략회의에서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이라크와 이란 등이 포함된 광범위한 지역을 전역(戰域)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고, 오히려 대통령 부시가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하자"고 말리고 나설 정도였다. (Lt. Gen. Michael DeLong, A General Speaks Out)

▲ 럼스펠드와 부시
분노와 자신감에 차 있던 만큼 반대의 목소리는 미미했다.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시작했을 때 내부적인 저항의 목소리가 그야말로 '찻잔 속'에나 있었던 것처럼(사실 당시의 소련 정치체제 하에서는 이렇게 중요한 문제라도 여론에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이 심장부를 강타 당하고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미국인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도 2001년 10월 7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하기 시작하자, 동정심과 공포심 이외에 표출할 감정이 없었다. 미국인들의 분노와 자신감 속에서 전쟁은 곧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8년 4개월.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전쟁의 안개에 휩싸여 있다.

어째서 지구상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장 약소한 국가가 자신감에 충만한 무적무패의 '제국들'에 도전하게 되었는지 영국과 소련, 그리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발을 들여 놓기 전에 그 도전의 역사적 연유와 아프가니스탄의 특수성에 대해서 단 한 순간도 천착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는, 자신들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흐름에서 이탈한 '배신자'나 '실패한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강대국들은 오만과 편견의 포로였던 것이다. 오만과 편견은 무지에서 나오며, 용기와 자신감의 가면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그에 무지(無知)까지 더해져 시작된 전쟁이 아프간인들이나 침략군 모두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19세기와 20세기의 아프가니스탄 피침(被侵)의 역사는 웅변한다. 그리고 바로 이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이 더 이상 연장되거나 혹은 되풀이되지 않게 할 책임을 지금 미국이 나서서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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