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이 쓰고 부른 '매 순간'은 상실감에 대한 노래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동생을 잃은 상실감. 벌써 5년 전 일이다.
2014년 4월 16일 권오현 씨는 전남 여수 출장길에 동생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오천이가 탄 배가 가라앉았다"며 울었다. 권 씨는 운전대를 진도로 돌렸다. 막내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다.
그날 단원고 2학년 4반 권오천 군은 빛도 닿지 않은 어두운 바닷속에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8개월, 동생마저 곁을 떠났다.
노래, '기억의 매개체'가 되다
오천이 형 오현 씨를 지난 19일 오후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세월호 가족협의회 총무가 아닌 가수로. 그는 '가수'라는 호칭이 낯설다며 그냥 '노래하는 사람'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아직 부족한 게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10대 시절 가수를 꿈꾸기는 했지만,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와 동생을 연이어 잃었다. 가족협의회 일을 하면서 추모 문화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진심이 닿아서일까? 내 노래에 눈물을 보이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어느 순간 가족협의회 일도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마음의 동요가 컸고, 허탈감을 먹는 것으로 채웠다. 그렇게 세월호 3주기가 지나갈 때쯤 오현 씨는 주변의 권유로 가수 치타와 장성환이 만든 추모곡 '옐로 오션(Yellow Ocean)'을 들었는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옐로 오션'은 임형주 씨의 '천개의 바람이 되어', 유가족과 시민이 함께한 '네버엔딩 스토리'처럼 아름다운 노래들과 달랐다. '진실' '인양' '규명' 등 가사가 직설적이었다. '힙합이니까, 랩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고 들었다.
그런데 "밖에 누구 없어요? 벽에다 치는 아우성"이라는 부분에서 더는 들을 수 없었다. 감당하기 힘들었다. '막내가 이런 상황이었겠지? 벽을 치며 누구 없느냐고 외쳤겠지?'라는 생각에 지난 3년간의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오현 씨는 자신이 오천이가 된 듯 당시 상황이 떠올라 노래를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멈춤' 버튼을 누르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 뭘 하고 있지? 다른 사람들조차 노래를 매개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직접 노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노래가 진심을 전하는 '기억의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진짜 죽는 때는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잊힐 때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잊히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학원과 지인을 찾아다니며 작곡과 작사를 배웠다. '매 순간'은 리듬을 구성해 놓고도 노랫말을 쓰는 데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오현 씨는 두 번째 곡의 리듬은 이미 만들어 놨는데, 이번에도 가사가 문제라며 웃었다.
우리는 과연 달라졌을까?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가 발생하자, 많은 이들이 세월호를 떠올렸다. 선박 인명 사고는 드문 일인 데다가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대가 다뉴브강으로 급파되는 등 여러 상황이 겹쳤다. 심지어 막말까지. 오현 씨도 사고 첫날(5월 29일)부터 관련 보도를 주의 깊게 봤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떡하지?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정도의 걱정이었다. 그러다 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사람들이 물속에 가라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동생 오천이의 상황과 겹치면서 며칠 동안은 진짜 힘들었다.
그런데 사고 발생 이튿날, '사망자 여행보험금'을 운운하는 보도가 나왔다. 그 기사(<중앙일보> 5월 30일 자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망자 여행자보험 보험금 최대 1억원')를 기점으로, 희생자에 대한 조롱이 시작됐다. 정작 헝가리 사람들은 사고 현장에 꽃을 두고 촛불을 밝히며 추모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헝가리 광장에 천막 등장하겠네' '헝가리 대통령도 탄핵당하겠네' 등."
정치인마저 "골든타임 기껏해야 3분"이라며 막말을 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웃음 브리핑으로 논란이 됐던 인물(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이었다. 세월호 참사 전후, 우리는 과연 달라졌을까? 오현 씨는 이 물음에 비교적 담담하게 대답했다.
"'공감'이라는 말이 있지만, 타인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공감을 잘한다는 사람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혐오'는 그런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과의 차이를 인정하면,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혐오 정서나 발언이 줄어들겠지만…."
'잘 지내니? 아프진 않아?'
'세월호 유가족'이라고 하면,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동생을 잃거나, 누나형/언니오빠를 잃은 이들도 엄연한 유가족이다.
"한국 사회 통념상, 큰 슬픈 앞에 작은 슬픔은 묻히기 마련이다. 부모의 슬픔이 먼저 인식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보니, 형제자매들은 자신의 슬픔을 표현도 못 하고 힘들어했다. 그렇다 보니, 비슷한 감정을 가진 이들끼리 모였을 때나 상실감을 드러냈다.
애초에 자녀를 잃은 것과 형제자매를 잃은 슬픔은 크고 작음을 겨루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냥 다른 것이다. 부모는 부모대로, 형제자매들은 형제자매대로 각각이 겪는 감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 중에서도 오현 씨는 최고 연장자다. 오천이와 10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슬픔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됐다.
"한 살 차이가 나는, 저처럼 동생을 잃은 친구가 있다. 둘이 만나면, 참사 이후 어떤 점이 달라지고 또 어떤 게 무너졌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우곤 한다. 자주 보는 몇몇은 그새 소주 한 잔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형제자매를 잃은 친구들끼리 그렇게 평생 서로를 위로하며 또 위로받으며 살 것이다."
'매 순간'으로 이제는 3인칭 시점이 아닌, 1인칭 시점의 노래를 부르게 됐다. 또 노래를 통해 위로받고 위로할 수 있게 됐다. 오현 씨는 앞으로도 계속 노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노래하고 싶다. 그렇게 스무 곡 정도가 쌓이면, '가수'로 불려도 덜 부끄러울 것 같다.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사고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또 소중한 사람을 잃고 아파할 것이다. 제 노래가 그런 이들을 위한 매개체가 됐으면 좋겠다. '잘 지내는지' 문득 안부를 묻고 싶을 때 부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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