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정보부(ISI)와 미 중앙정보국(CIA)이 합동으로 바라다르를 검거했지만, ISI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더욱 더 고무적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파키스탄이 드디어 미국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신호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의 극적인 정책 변화?
파키스탄은 그동안 겉으로는 미국과 동맹이었지만 실제로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 중반 탈레반 결성을 지원한 것도 ISI였다.
그러다 보니 미국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파키스탄에 수백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해주며 전쟁에 대한 협력을 유도했지만 한계가 뚜렷했다. 밑 빠진 독처럼 돈만 들어갈 뿐이었다.
그랬던 파키스탄이 탈레반의 거물을 잡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자 <파이낸셜타임스>는 16일 파키스탄 정책의 '큰 변화'(big step)라고 평가했다. 파키스탄이 탈레반 같은 무장 집단에 대한 의존(loyalty)을 버려야 한다는 서방의 설득이 통했다는 것이다. 아시파크 카야니 파키스탄 육군 참모총장의 용기 있는 정책 전환이라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가디언>도 같은 날 기사에서 파키스탄 안보 당국의 태도가 크게 변했다는 신호이며 탈레반을 비호하는 게 국익에 도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전략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변화라고도 부연했다.
▲ 비교적 온건 노선을 걸었던 바라다르가 체포되면서 탈레반 강경파들이 득세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로이터=뉴시스 |
미국의 파키스탄 배제 움직임 차단 노림수
그러나 바라다르 체포 사실을 특종 보도했던 <뉴욕타임즈>는 17일 다른 각도의 분석을 내놨다. 바라다르의 검거는 전술적으로 미국의 승리일 수 있지만, 전략적으로는 파키스탄의 대성공이라는 것이다.
탈레반의 수뇌부 한 명을 제거해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전쟁을 협상으로 종료하는데 대한 논의가 이뤄지는 때에 파키스탄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게 됐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파키스탄이 탈레반과의 협상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다름아닌 미국 때문이다. 그간 미국의 파키스탄 배제 움직임이 있었고, 그를 차단하기 위해 바라다르 체포라는 수를 택했다는 것이다.
신문은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 접근하는데 있어 파키스탄이 배제되어 온 것에 대해 파키스탄의 한 정보 당국자가 불쾌감을 드러낸 적이 있다고 전했다. 카야니 참모총장이 수주 전 나토 관계자들, 서방 언론, 군사 분석가들에게 파키스탄도 탈레반과의 중재 시도에 참여하길 바란다는 신호를 보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파키스탄 정보 당국자는 "미국은 파키스탄이 탈레반과 직접 협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지만, 미국이 우리에게 통보도 없이 그렇게(직접 협상)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며 "파트너 국가에 그래선 안 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더군다나 바라다르는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이 탈레반과 협상하는데 있어 중요한 접촉 상대였다. 파키스탄은 그런 바라다르를 체포해버림으로써 미국의 대탈레반 접촉선을 차단하는데 성공하는 한편, 자신들 스스로를 중심적인 대화 채널로 만들었다.
파키스탄 정보 당국자는 "미국이 바라다르나 그와 매우 가까운 사람과 연락을 취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며 탈레반과의 대화에서 파키스탄을 제외하는 미국의 태도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음식 주는 손을 왜 물어 버렸나"
바라다르 체포는 탈레반의 작전 능력을 붕괴시키는 쪽이 아닌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게 <뉴욕타임스>의 전망이다. 그것은 바로 탈레반 내 협상파들의 입지를 위축시킴으로써 미국이 꾀하고 있는 대화를 통한 전쟁 종식,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화해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탈레반 2인자 체포라는 '전과'에도 미국이 편치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미국의 한 정보 당국자는 그같은 분석에 동의를 표하며 화해 프로세스에서 바라다르가 했던 핵심적인 역할을 인정했다. 그는 "우리 쪽 사람들이 바라다르 주변에 있었던 이들과 연락하고 협상했다는 사실을 안다"며 "음식 주는 손을 왜 물어버렸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탈레반은 미국과 연락을 취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우리의 어떤 제안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미국이 올 안에 3만 병력을 증파하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협상이냐 전투냐에 대한 탈레반의 내부 논쟁이 격렬해지는 예민한 시점에 바라다르가 체포됐다는 것도 의미가 적지 않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바라다르는 탈레반의 최고지도자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와 가까운 가장 고위급 인사인 동시에 "평화 협상에 나설 의지가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가되는 '온건파'에 속한다. 탈레반 내 협상파들이 최근 몇주간 힘을 얻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바라다르가 체포됐다는 것은 협상 전망을 어둡게 하기 충분하다.
탈레반 정권 시절 주 파키스탄 대사을 지낸 물라 압둘 살람 자이프는 파키스탄의 자라다르 체포에 대해 탈레반의 나머지 지도부들과 화해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파괴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자이프 전 대사는 "체포가 사실이라면 협상과 평화 프로세스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양측이 구축해 놓은 불안정한 신뢰마저 파괴할 것이며 평화 프로세스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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