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아동이 채팅앱을 통해 만난 30대 남성에게 성폭행 당했으나 미성년자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판사 한규현)는 지난 13일 성폭력처벌법 위반(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혐의로 기소된 이모 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이 씨는 지난해 4월 평소 이용하던 채팅앱으로 알게 된 A양(당시 10세)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소주 2잔을 먹이고 양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성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1심은 이 씨가 폭행.협박으로 A양을 억압해 성폭행했다고 판단해 미성년자 강간죄를 적용해 징역 8년을 선고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 만으로는 폭행.협박을 입증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미성년자 강간죄가 아닌 미성년자 의제강간죄를 적용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많은 이들이 이런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다. 해당 판사를 파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 게시물에 19일 오전 7시 현재 10만 명이 넘는 누리꾼들이 동의를 표했다.
물론 아동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이런 비상식적 판결을 내놓은 판사가 일차적인 문제다. 하지만 감형 판결에 대한 비난 여론 때문에 17일 법원이 내놓은 해명 자료를 보면, 항소심 재판부가 책임을 돌리며 기대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한국의 매우 협소한 강간죄 구성 요건이다. 피해 아동보다는 가해자의 입장에 더 많이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항소심 재판부 판결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우리나라 형법에서 강간죄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여성이 4층 여관방에서 뛰어내려도 강간치사죄 아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17일 해명자료를 통해 "이 사건 공소사실은 '피고인이 손으로 피해자의 양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누르는' 방법으로 폭행을 했다는 것"이라며 "공소사실에 관한 직접 증거는 영상녹화물에 포함된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데 영상녹화물만으로 피해자가 반항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이런 입장을 보인 이유는 한국의 강간죄는 '최협의의 폭행.협박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저항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거나 반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행사한 것이 입증될 때만 강간죄 성립을 인정한다. 또 '최협의의 폭행.협박'에 대한 판단은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제반사정을 종합해 판단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친밀한 관계이거나, 피해자의 과거 성경험이 많거나, 피해자의 도덕적 평판이 나쁠 경우, 이런 사정을 이유로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협소한' 강간죄 성립 요건 때문에 과거 대법원은 피해자가 강간하려는 가해자를 피해 4층 여관방 창문에서 뛰어내려 전치 24주의 상해를 입었는데도 강간치사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고인과 만나 함께 놀다가 큰 저항 없이 여관방에 함께 들어갔으며, 피고인이 강간을 시도하면서 한 폭행 또는 협박의 정도가 강간의 수단으로는 비교적 경미"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대법원 1993.4.27.선고 92도3229 판결)
10세 아동이 35세 남성에게 저항하지 않았으니 강간 아니다?
이번 사건의 항소심 재판부가 "10세 아동의 '양손을 누르는 행위'는 강간죄가 성립되기 위한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아니다"라고 설명한 것이 바로 '최협의설'에 대한 강조다. 이런 '최협의설'은 "여성은 강간당하고 싶은 환상을 갖고 있다", "여성은 종종 성폭행과 강간을 도발,유혹한다" 등 가부장적 편견에 기반한 '강간 신화'에 근거한 법 해석이다. 여성이 합의하지 않은 성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여성의 진술로는 부족하고 폭력, 협박, 극단적인 저항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판사의 법 해석에 대한 '재량권'이 충분히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항소심 재판부의 해명은 치사한 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평소 친밀한 사이도 아닌 채팅앱에서 만난 30대 남성이 양손을 압박한 채 강간을 하려고 할 때, 그 상황을 물리칠 정도의 저항을 할 수 있는 10세 아동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아동이 이런 상황에 처하면 공포감으로 얼어붙을 것이다. 게다가 가해자는 피해 아동에게 술까지 먹였다. 재판부는 이런 피해자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엄격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 '저항하지 못한 이유와 책임'을 10세 아동에게 따져 묻고 있다. 재판부는 결과적으로는 "합의된 성관계였다"는 가해자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셈이다.
모든 나라에서 이런 '최협의설'을 강간죄 성립의 전제 조건으로 두고 있지 않다. 독일은 "피해자가 행위자의 공격에 대하여 보호 없이 노출되어 있는 상태를 이용하여" 강간했을 경우에도 강간죄가 성립된다고 보고 있다. 피해자가 심리적인 공포 등으로 저항하지 못한 경우, 또 피해자가 가해자의 신체적 우월성 등 조건 때문에 처음부터 저항을 포기한 경우에도 강간죄가 성립된다. 미국도 피해자의 주관적 공포감을 고려하는 '합리적 공포' 기준을 채택해서 피해자가 극도의 저항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도 강간죄가 성립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12세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공소사실이 인정되지 않으면 공소장 변경 신청이 없는 한 무죄를 선고해야 하지만, 형사소송 목적에 비춰 현저히 정의와 형평에 반하는 것이라 판단해 미성년자의제강간을 유죄 판결했다"고 밝혔다. 이는 가해자 이 씨가 "A양이 만 13세 미만인 줄 몰랐다"고 주장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미성년자의제강간을 유죄로 판단했다는 뜻이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이 사건에서 만약 피해 아동이 만 13세였더라면 항소심 재판부는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 13세는 중학교 1학년에 해당되는 나이다.
실제 이런 판결이 있었다. 지난 2010년 12세 소녀를 집단 성폭행한 20대 3명에 대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수원지법 형사합의11부. 유상재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피해자가 나이 어린 소녀이고 음주상태에 있던 사정은 인정하지만 심리적·물리적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런 행위가 형법 제299조에서 규정한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간음행위로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 피해자에게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가 적용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수원지법은 "피해 소녀가 나이를 속인 데다 외모도 성숙했고 가해자들 역시 피해자들이 13세 미만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어 미성년자의제강간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고 언론을 통해 전했다. (관련 기사 : 12세 소녀 집단 성폭행 무죄)
이런 전례 때문에 이번 항소심 재판부는 원칙적으로는 무죄가 나왔어야 하지만 직권으로 미성년자의제강간죄를 적용해 형사법상 정의와 형평을 실현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일관되게 피해를 주장하고 있다
미성년자의제강간죄는 미성숙한 미성년자가 성적 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보다 강력한 법적 조치로, 폭행이나 협박, 저항 여부를 따지지 않고 미성년자를 간음했을 경우 무조건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즉, 만13세 미만인데 당사자가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할 경우 적용될 수 있는 조항이다. 자신의 결정이더라도 그 결정이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는 결정이라면 그 결정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법적 논리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에 미성년자의제강간죄를 적용한 것이 합당할까? 그렇지 않다. 피해 아동은 일관되게 강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 사실은 1심 판결을 보면 알 수 있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매우 심한 육체·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고 피고인은 피해자로부터 용서도 받지 못했다"고 판시했다. 이처럼 피해자는 경찰 조사 과정과 재판 과정에서 일관되게 피해를 주장하고 있는데도,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며 합의된 성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미성년자의제강간죄를 적용했다.
항소심 판결의 핵심 논쟁거리는 1심 재판에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8년형이 선고된 사건에 대해 "피해자의 진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강간혐의에 대해 무죄를 판단한 지점이다. 이는 "미성년자의제강간죄를 적용해 징역 3년을 구형했다"는 변명으로 피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미성년자의제강간죄 기준연령 16세로 올려야
여기서 더 나아가 이번 사건은 현재 '만 13세 미만'으로 되어 있는 미성년자의제강간 기준연령을 상향시켜야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가해자 이 씨는 피해아동에 대해 "키가 160cm라 성인이나 고등학생인 줄 알았고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요즘 아동.청소년들의 빠른 신체 발육 속도를 볼때, '만 13세 미만'이라는 조항은 이렇게 쉽게 악용될 수 있다. 또 앞에서 예로 든 만 12세 아동의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실제 검찰과 판사들이 "나이를 몰랐다"는 가해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근거가 되고 있다.
'만13세 미만'이라는 기준은 도대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일까? 답은 일본 법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 한국이 일본 법을 베끼다 보니 '만 13세'라는 기준을 똑같이 적용했다는 것이다. OECD 국가 중 의제강간 최저 연령 기준을 만 13세로 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뿐이며, 두 나라 보다 낮은 나라는 스페인(만 12세)이 유일하다. 영국, 미국(대다수의 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핀란드 등 다수의 국가들이 만 16세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의제강간 연령을 16세로 상향하는 형법개정안은 국회에도 여러 번 제출됐지만 무산됐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도 <형사법의 성편향>(박영사 펴냄)이라는 저서에서 의제강간 연령의 기준을 올려야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의제강간 연령이 16세였다면 과연 가해자가 10세 아동을 상대로 "만 16세 이상인 줄 몰랐다"는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이처럼 10세 아동 성폭행 사건의 항소심 판결은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한국 사법 체계 내의 온갖 문제가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입장에 충실한 강간죄 성립 요건, 지나치게 낮은 미성년자의제강간 기준 연령, 기계적인 중립을 가장한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재판부. 성폭력, 특히 아동 성폭력 사건에 대한 비상식적 판결은 해당 판사 한명을 갈아치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성폭력 관련 형사법 개정과 경찰, 검사, 판사 등 관련 종사자들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의식 개선이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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