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대기업 콜센터 직원들이 상담 전화를 받을 때 건네던 첫 인사말이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때 아닌 사랑 고백에, 듣는 이야 처음에만 어색할 뿐 금세 익숙한 '서비스' 정도로 생각할 테지만, 그 이면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사랑'을 '상품'으로 만드는 이들이 있다. 낯선 이에게 늘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 웃어야 사는 사람들, 웃으며 병난 사람들. 바로 '감정 노동자'들이다.
감정을 '상품'으로 만드는 사회
'웃다가 병든 사람들'에 관한 보고서, <감정노동>(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가람 옮김, 이매진 펴냄)이 국내에 출간됐다. 1983년 초판이 나온 뒤로 지금까지 감정 노동과 관련한 논의를 이끌어 온 이 책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 여겨졌던 감정이 어떻게 자본주의 안에서 '상품화'되고 '관리'되는지, 그 과정에서 개인의 인간성은 어떻게 소진돼는지 분석한다.
▲ <감정노동>(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가람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감정과 웃음을 '재화'로 만들어 이를 판매하는 '감정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육체 노동, 정신 노동으로 노동을 이분화 했던 근대 산업 사회의 도식에서 벗어나, 감정 노동을 제기하며 이를 최초로 개념화한다.
저자에 따르면, '감정 노동'은 "배우가 연기를 하듯 감정을 숨긴 채 직업상 다른 표정과 몸짓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감정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늘 긴장하며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저자가 '감정 노동자'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한 것은 항공기 승무원이었다. "미소는 여러분의 가장 큰 자산"이라며 근무 중 '진심으로 웃을 것'을 권고하는 회사의 지시에 따라, 승무원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승객을 미소로 맞이해야 한다. 승무원 자신의 감정은 중요치 않다. 승객이 이유 없이 화를 내고, 무리한 요구를 해도 절대로 불쾌감이나 공포를 내비쳐선 안 된다. 아니, 속으로 불쾌감을 느껴도 승객이 알아채서는 안 된다.
이처럼 내면의 감정과 외부의 상황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승무원이 대응할 수 있는 방식은 세 가지다. 분노를 아예 느끼지 않도록 감정 체계를 바꿔 '기계'가 되거나, 겉으로만 웃는 연기를 하거나, 아니면 연기 자체를 거부하거나. 물론 '연기에 대한 거부'는 이들에게 곧 해고를 의미할 것이다.
또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감정 노동의 젠더적 속성이다. 실제 감정 노동에 종사하는 비율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여성이 남성보다 감정적'인 동시에, '감정을 잘 다스린다'는 고정 관념에다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려는 경향이 덧붙여진 결과다.
친절과 미소라는 가면 뒤, 병들어 가는 사람들
저자에 따르면,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는 겉으로만 웃는 연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직업과 자아의 분리를 통해 자신의 '진짜 감정'을 지키려고 애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화해 직장에서 '연기하는 자아'가 '진짜 나'는 아니라고 믿고, 이런 '자기 분열'을 통해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내려고 애쓰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현상이 "정신과 육체의 소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사적 차원의 감정이 사회적으로 조직되고 임금을 얻기 위한 노동으로 변형될 때, 우울증·스트레스·신체적 소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 원래는 지극히 본연적인 내면의 자아와 관련된 문제인 만큼, 감정을 생산하는 감정 노동자와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감정 노동은 서비스업 종사자의 문제를 넘어서 감정이란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모든 이들의 문제이자,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자신의 '진짜 감정'에서 소외돼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의 속이는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겉과 속의 불협화음…"감정도 노동이다"
"어서오십시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포인트카드 있으십니까? 고객님, 4만7500원입니다. 5만 원 받았습니다, 고객님. 거스름돈 여기 있습니다. 고객님,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2007년 홈에버 상암점을 점거한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후마니타스 펴냄)에서 한 캐셔 노동자는 "말하기조차 구차하게 일상적으로 반복돼 삶의 파괴하는 고통과 모욕"이었다고 서비스 노동자의 현실을 증언했다.
강제로 발라야 했던 빨간 립스틱, 고객보다 '화려해 보이지' 않기 위해 착용이 금지됐던 귀걸이, 고객을 가장해 자신의 '친절함'을 평가했던 모니터링 요원, 곳곳에 걸려 있던 CCTV. 이 같은 현실은 이들의 '친절'이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선, 힘겨운 노동이었음을 증명한다.
실제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2007년 '서비스 산업 종사자 실태 조사'에서 백화점 노동자의 56.2퍼센트가 우울증과 스트레스 질환을 앓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2006년 한국여성연구소가 서울시내 식당 종업원 40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25.7퍼센트가 업무 중 가장 큰 고충을 '반말·욕설 등 비인격적인 대우'라고 꼽았다.
조사는 서비스업 종사자만을 대상으로 이뤄졌지만, 영업 사원, 보험 판매인, 교사, 미용사, 간호사, 넓게는 가정주부까지, 감정 노동을 '의무'로 짊어진 사람들의 수치까지 합한다면 '감정의 상품화'가 단순히 서비스 노동자의 일만은 아님을 알게된다. 1980년대 처음 출간된 이 책이 여전히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는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책은 감정 노동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작 감정 노동자에게 어떤 행동을 촉구하거나 소비자의 변화를 요구하진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마지막으로 결코 녹록치 않은 화두를 던진다.
"감정 노동자는 감정을 파는 대신 죽음을 사고 있다. 웃어야 사는 사람들, 웃으며 죽어가는 사람들. 감정 노동자이자 감정 노동의 소비자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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