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 24사단 소속 파병 용사들이 북의 전차 여단에 맞서 무려 4일이나 적의 남진을 지연하고 금강과 대전 방어선 구축에 절대적인 역할을 해낸 격전지가 세종에 있다.
산이 개미허리처럼 생긴데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전동면 청람리 ‘개미고개’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북한군이 남하하지 못하게 발을 묶어 놓았던 주요 격전지로 꼽힌다.
4일 간의 남하 저지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왔다.
국제연합군은 신속한 파병 결의로 7월1일 미군 제24사단(사단장 딘 소장) 지휘 아래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제21연대 제1대대를 부산으로 공수해 오산에서 적을 저지하는 특수임무를 부여했다. 7월5일 406명으로 인민군 주력부대와 맞섰으나 3만여 명의 적을 막을 수 없어 최초의 접전인 오산죽미령 전투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전력을 보강해 투입한 4연대까지 7월6일 천안에서 퇴각을 하고, 연대장 마틴 대령마저 전사를 하고 만다. 이어 24사단장 딘 소장은 제21연대에게 세종시 전의면 일대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경부선 1번 국도와 철도를 통제하도록 지시했다.
아울러 전의 북쪽의 철교와 교량을 폭파하는 등 방어 준비도 했다. 그 중 대대장 젠슨 중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는 1번 국도와 경부선이 지나는 철로 터널이 있는 개미고개 일대를 방어했다.
7월9일 새벽부터 시작된 개미고개 전투는 11일까지 계속됐고 북한군 105전차사단의 대대적인 포격과 기습공격으로 대대장 젠슨 중령을 포함한 전 병력의 60%의 막대한 손실을 입고 조치원으로 철수했다.
21연대는 개미고개를 포함한 전의-조치원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북한군의 진격을 4일이나 지연시켜 국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개미고개 전투의 성과
개미고개에서의 4일간의 방어 지연전으로 국군은 조치원-청주 구간의 보급을 가능하도록 했고 이후 청주 방어선에서의 안정적인 후퇴에 영향을 미쳤다.
또 미25사단과 미군 제1기병 사단의 상주-영동 일대 투입 등 후방 지역의 미군 전개와 국군 주력부대가 전열을 갖추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북한군은 조치원 전투에서의 타격으로 인해 작전지속 능력이 크게 둔화 됐고 전차를 앞세워 밀고 내려오는 전술도 개미고개 전투이후 수정할 수 밖에 없게 됐다.
특히 미 항공대의 활약은 개미고개 지연전의 공신으로 꼽힌다.
훗날 북한 105전차 사단의 정치군관이었던 오기완 대위는 전의-조치원 전투에서 전차와 차량 상당수가 파괴되자 “개전 이래 입은 가장 큰 손실이었으며 대공 장비를 갖추지 않고 전진만 하다가 그들 항공기의 좋은 밥이 된 셈”이라고 증언한바 있다.
곳곳에 남은 전쟁의 상흔
현재 개미고개 전투 현장에는 미군 전사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자유평화의 빛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세종시는 이곳에서 2005년부터 개미고개 전사자들을 기리는 추모제를 이어오고 있다.
2015년 최종 전사자는 428명으로 확인됐으며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과 미군 동상이 건립됐다.
개미고개 능선에는 지금도 참호 흔적이 남아있는데 국군 유해발굴단의 발굴 조사에서 소총과 탄피가 다수 발견됐다. 위령비 건너편 언덕 아래에는 ‘개미굴’이라 불렸던 성곡터널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경순 박팽년연구소장은 “개미고개 전투는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꿀 만큼 중요한 전투였다”며 “하지만 다른 지역 전투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아쉬운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21연대 1대대가 지휘소를 차렸던 동교리 두집메는 현재 4채의 가옥이 남아있는 상태고 당시 미군에게 집을 빌려줬던 김순배씨의 친척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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