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서 지금까지 체결된 1백70여 개의 자유무역협정(FTA) 가운데 정부가 협상을 끝낸 상태에서 국회가 비준을 거부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러나 임시국회에서 칠레와 합의한 FTA 비준은 상정조차 하지 못한 채 무기연기됐다. 11일 정부와 민주당이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비준안 대책 당정회의를 열었으나 격론끝에 이달 임시국회에서 처리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국회의 이같은 결정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농민표를 의식한 정치논리에 따른 것이어서, 앞으로 큰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국회, "도하협상 후로 연기"**
정부와 정치권의 갈등은 11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소속인 박상천 민주당 최고위원과 황두연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의 설전에서 명확히 표출됐다.
박상천 위원은 "FTA대상국 선정이 잘못됐고, 공산품 수출로 얻는 이득보다 농산물 수입으로 인한 피해가 더 크다"며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에서 큰 가닥이 잡히기 전까지는 비준안 처리를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황 본부장은 "FTA의 특성상 한 부문이 이득을 보면 다른 부문은 피해가 있게 마련이므로 어느 국가와 협정을 맺더라도 대상국 선정이 잘못됐다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DDA는 다자간 협상이고, FTA는 양자협상이므로 직접 관련이 없다"고 반박했으나, 민주당의 반대로 이번 임시국회에서의 비준은 무산됐다.
***물 건너간 FTA협상**
정치권에서 FTA 비준안의 국회 상정을 반대하는 가장 큰 명분은 농민의 피해가 크다는 점이다. 정세균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11일 회의 후 "(FTA발효 직후부터) 농민 피해가 예상되고 농민들이 느끼는 것과 정부 예측치간 괴리도 있다"면서 FTA이행특별법을 먼저 보완한 후 FTA비준안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나라당도 FTA에 따른 시장개방으로 이익을 보는 산업에 세금을 부과해 손해를 보는 농촌에 보상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도 11일 여의도 당사에서 전국농민연대 대표자들을 면담, FTA 비준안 처리문제에 대해 "개방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나 정부 입장대로 개방이 불가피하다면 농민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선대책-후개방'해야 한다는 입장을 확고히 갖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1백42명의 국회의원이 FTA 비준에 반대한다는 서명을 한 상태로, 내년 총선전에는 FTA 통과가 사실상 힘든 게 아니냐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이 소식을 접한 통상전문가들은 칠레와의 FTA가 정치권에 발목을 잡히며 대외신인도가 하락하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농민들의 피해에 대한 우려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한.칠레 FTA는 선진국의 압력과 같은 타율에 의해 체결한 협정도 아니고 정부가 중장기 국가 비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칠레와 협상을 거쳐 마련한 국제조약이라는 점에서다.
노무현대통령은 최근 한-일정상회담에서 한-일간 FTA 추진을 정부차원에서 진행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처럼 이미 정부간에 합의한 FTA조차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과연 어느 나라가 우리나라와 FTA협상을 벌이려 하겠느냐는 게 통상전문가들의 탄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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