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6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68강은 경북의 최북단의 산간고을이면서 집성촌의 전통마을이 많이 남아 있는 봉화고을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68강은 2019년 6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8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봉화-바래미전통마을(개암종택/팔오헌종택/해저만회고택/해와고택)-봉화읍(쌍송정정침/북지리마애여래좌상/계서당)-닭실마을(석천정사/삼계서원/청암정/사동추원재/충재박물관/서설당)-황전전통마을(경암헌고택/봉산리사/도암정/송석헌/동암서당)-상운면(설매리3겹까치구멍집/설매리겹집/무진장재/종선정)-봉성면(봉화금씨군위공종택/봉서루/봉화향교/사덕정/영모당)-법전면(뇌풍정/경체정/기헌고택/송월재종택/이오당/법전강씨종택/법계서실)-춘양면(한수정/만산고택/권진사댁/와선정)-소천면(임란의병전적지/분천리도토마리집/분천리까치구멍집)-서울의 순입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 시간을 갖습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8강 답사지인 <봉화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백두대간에 깃든 산간고을
봉화는 북쪽으로는 백두대간 넘어 영월과, 동쪽으로는 낙동정맥 넘어 울진과, 서쪽으로는 영주와, 남쪽으로는 안동과 접해 있습니다.
봉화의 산줄기는 북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이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낙동정맥이 가로막고 있으며 남쪽으로 안동분지와 맞닿아 있습니다.
봉화의 물줄기는 태백산지에서 발원하여 응방산과 옥적봉을 지나 봉화산골에서 흘러온 옥수와 합쳐지면서 봉화의 서쪽을 흐르는 석천계곡과, 태백산에서 발원한 옥계수가 연화봉, 청옥산, 조록바위봉 등의 높은 고원을 16㎞를 지나 봉화의 동쪽을 흐르는 벽천계곡과,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y자형 사미정계곡이 경북 북부 중에서도 최고 오지인 봉화군 법전면과 청량산 일대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듭니다.
봉화는 삼한시대에 진한의 기저국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현재의 봉성면 일대가 고구려의 내기군 고사마현에 속하였으며 신라 5대 파사왕(80~112) 때 신라 영토에 속하였습니다. 신라 35대 경덕왕(742~765) 때 내령군 옥마현으로, 고려 8대 현종(1010~1031) 때 봉성현으로, 1895년(고종 32)에 봉화현을 봉화군(奉化郡)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907년(순종 1)에 군청사를 봉성에서 춘양으로 옮겼으며 1914년 군청을 춘양에서 봉화읍 내성리로 옮기고 15개 면을 9개면으로 개펀하였으며, 1962년 춘양면 덕구리와 천평리를 강원도 영월군에 편입시켰고 1963년 석포출장소를 설치하여 소천면 석포리, 대현리, 승부리를 관할토록 하였습니다. 1973년 법전면 소로리가 춘양면에, 상운면 두월리와 내림리가 영주군 이산면에 편입되었고 1979년 5월 1일 봉화면이 봉화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봉화의 진산 청량산
청량산은 봉화의 진산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예부터 소금강이라고 일컫는데, 기암절벽이 12봉우리를 이루며 태백산에서 시원한 낙동강이 웅장한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흐릅니다. 산속에는 27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던 유지가 있고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리보전, 퇴계 이황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청량정사, 최치원의 유적지인 고운대와 독서당, 김생이 글씨를 공부하던 김생굴, 공민왕이 은신한 공민와당과 산성 등 많은 역사적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봉화의 불교문화재는 666년(문무왕 6) 원효가 창건한 청량사와 청량사유리보전(淸凉寺琉璃寶殿), 같은 해 의상이 창건한 축서사(鷲棲寺)와 축서사석불좌상부광배, 봉화 축서사 괘불탱, 676년 원효가 창건한 각화사(覺華寺)와 각화사귀부, 삼층석탑 등이 남아 있습니다.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은 신라시대의 거대한 마애불좌상으로 지림사(智林寺) 남동쪽에 있는 자연암벽을 파서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겼습니다. 네모진 얼굴에 고졸한 미소를 나타내고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7세기 전반기의 삼국시대 불상 양식을 나타내고 있지만, 얼굴이나 체구에 표현된 부드러운 조각 기법으로 보아 실제 제작연대는 7세기 후반기로 추정됩니다.
각화사 태백산사고지(太白山史庫址)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 오던 태백산사고가 있던 자리로서 조선시대 5대 사고 중 하나로 각화사 뒤편 ‘사고지골’에 있었습니다. 이 사고(史庫)는 1606년(선조 39)에 건립하여 1913년까지 약 300여 년간 존속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 보관되어 오던 <조선왕조실록>이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에 보관 중입니다. 사고는 왕조실록 이관 후 약 30여 년간 방치상태로 있다가 해방 전후의 시기에 방화로 인하여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산사태와 잡목으로 유구들이 매몰되어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8년 8월에 발굴정비계획에 따라 대구대학교 박물관이 건물의 유구를 발굴하여 복원하였습니다.
봉서면의 읍치 유적
봉화읍치구역의 유적은 봉서면에 남아 있습니다.
봉서루는 봉화현(奉化縣) 관아건물의 하나로, 1738년에 봉화현감 이광직(李匡直)이 동헌인 조양각(朝陽閣)을 중건하면서 외관아로 중건한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현내의 유현들이 집회하며 교류하던 장소인데, 한말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봉화현도(奉化縣圖)에도 객사(客舍)와 아사(衙舍) 앞에 영봉루(迎鳳樓)와 봉서루(鳳棲樓)가 나타나 있습니다. 봉서루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ㄱ자형(字形) 건물로 평면은 좌측에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인 3칸 건물을 두고 우측에는 앞쪽에 1칸이 돌출된 2칸 규모의 2층 누각을 연접시켰습니다.
봉화향교는 세종 때 창건하였고 1579년(선조 12)에 현감이었던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중건한 소설위향교(小設位鄕校)입니다. 배치는 유교문(由敎門), 누각,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을 동일축선상에 놓은 전학후묘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명륜당의 전면에는 동, 서재를 두었으며 대성전의 좌측에는 전사청인 정노당을 배치하였습니다.
청백리 성이성의 계서당종택
계서당종택(溪西堂宗宅)은 청백리로 녹선(錄選)된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이 1613년에 건립한 가옥입니다. 6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중문칸채와 연결된 사랑채가 정면에 자리잡고 있으며, 사랑채 뒤에는 Π자형의 안채를 배치하여 정침은 전체적으로 튼 口자형의 배치형태를 보입니다. 정침의 우측에는 사당이 있습니다.
성이성은 자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 본관은 창녕으로 부용당 성안의(成安義)의 아들입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문하에서 배우고 1616년에 생원을 거쳐 1627년(인조 5)에 문과에 급제, 주서(注書)를 시작으로 응교, 지제교, 통정대부 부사에 이르렀고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원종(인조의 생부)의 추승(追崇)을 논하고 인성군 공(珙)의 아들이 모역을 범했을 때 용서하기를 주청하여 죽음을 면케 했습니다. 영호남 어사로 네 번이나 암행하여 권선징악의 본을 모두 시행하였고 헌납으로 있을 때는 윤방, 심기원, 이민구 등의 불충함을 탄핵하였고 각 고을 수령으로 재직 시에는 청렴 정직하여 백성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인평대군이 빈번히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하고 김자점이 여러 번 천거했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숙종이 두 차례 쌀과 콩을 내렸으며 부제학에 증직되고 오천서원(梧川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계서집(溪西集)>이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 논문에 의하면 춘향전 이도령의 본래 이름은 성이성으로 인조, 광해군 때의 실존인물이라 합니다.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기생을 사귀었고,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 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들렀다고 합니다. 성이성의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변사또 잔치연에서 지은 <금준미주시>(암행어사 출두시)와 동일한 시를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손꼽히는 경승지 닭실마을은 안동권씨 집성촌
닭실마을은 안동권씨의 집성촌으로, 처음 입향한 충재 권벌이 은거한 이후 후손들이 500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충재 권벌은 안동에서 태어나 1507년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으로 기묘사화에 연루, 파직 당하였다가 복직하나 을사사화 연장으로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으로 귀양,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선조 때 충정이란 시호를 받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석천계곡 변에는 유적들이 남아 있고 많은 유물이 충재유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닭실[酉谷]마을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석천계곡과 어울려 울창한 소나무 숲, 넓은 바위와 깨끗한 물이 어우러진 곳으로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경승지로 칭송한 곳이기도 합니다.
석천정사(石泉精舍)는 1535년 충재 권벌의 큰아들 청암 권동보(權東輔)가 초계군수로 근무하다가 향리에 돌아와 건립한 별서로 삼은 정사입니다. 전체 34칸의 서원에 가까운 규모로 평면은 ‘ㄴ자’ 형의 편대칭 형식인데, 정면 5칸 반, 측면 2칸의 구성으로 되어 있으며 6칸 대청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사 건물과 수직 방향으로 들어선 창고 건물인 일야각(一夜閣)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충재 선생의 신위를 모셨던 삼계서원이 철폐되자 그 신위를 모실 곳을 하룻밤 사이에 지었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권동보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1536년 향시와 1542년 사마시에 합격,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을 지냈고, 아버지 충재 권벌이 1547년 윤원형 등의 소윤 일당을 비난한 ‘양재역벽사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귀양 가 1년 만에 죽자 관직을 버리고 20년 동안 두문불출하였습니다. 선조 때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져 복관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 돌아와 석천정사를 짓고 여생을 보냈으며 1564년 선친 등의 묘소를 수호할 추원재와, 1588년 사림과 안동부사의 도움을 받아 부친의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을 건립했습니다.
청암정(靑巖亭)은 권벌이 닭실마을에 종가를 지으면서 조성한 정자로 1526년(중종 21)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웠는데 주변에 못을 판 후 냇물을 끌어들여 물을 채워놓고, 장대석으로 좁고 긴 돌다리를 축조해 청암정에 다다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리면서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정하여 지은 집으로 주추의 높이가 각각 다른 구조입니다.
추원재(追遠齋)는 권벌과 그의 부모 및 외조부모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건립한 묘하재실(墓下齋室)로, 닭실마을 뒤쪽의 재궁골에 있습니다. 전면에는 9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한 곳에는 7칸 규모의 상실(上室)이 있으며, 좌측에는 4칸 규모의 관리사가 대문채와 연접하여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우측에는 4칸 규모의 2층 누각건물인 동루를 두어 전체적으로 튼 口자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게 하였습니다.
서설당고택(瑞雪堂古宅)은 권벌의 둘째 아들 동미(東美)의 4대손 권두익(權斗翼)이 1708년 이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유곡리의 자연마을인 토일마을 뒷산을 뒤로 하고 마을 앞 토일천을 앞에 두는 배산임수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택은 본체와 사당으로 구성되며, ‘ㅁ’자형으로 구성된 본체의 동북쪽으로는 사당이 있고, 본체와의 사이에 토석담장을 설치하여 협문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터의 풍수적 해석에 근거하여 담장 없이 이룬 외부 공간 구성, 17세기 이후부터 두드러지는 내외 공간 구분과 사랑채의 돌출, 사당의 독특한 팔작지붕은 문중 고유의 상대적 독창성을 지닌 두드러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삼계서원(三溪書院)은 1588년에 충정공사(忠定公祠)를 건립하여 권벌의 위패를 봉안하여 오다가 1660년에 삼계서원으로 사액되었고, 1871년에 훼철되었던 것을 1960년에 복설하여 춘추로 제향하고 있습니다. 서원의 배치는 콘크리트조의 2층 누각인 관물루(觀物樓)를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강당인 정일당(精一堂)이 있으며 강당의 좌우에는 동, 서재를 배치하였습니다. 강당의 뒤에는 사당인 충정공사가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관물루 우측에는 ‘충재선생묘허비각’이 있습니다.
송석헌고택은 동암(東巖) 권이번(權以番)이 아들인 선암(仙巖) 권명신(權命申)에게 지어준 살림집입니다. 7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높은 축대 위에 口자형의 정침이 자리잡고 중문칸의 우측에는 사랑채를 배치하였습니다. 사랑채의 전면에는 누마루인 영풍루(迎風樓)를 두었고 영풍루와 사랑채는 계단으로 연결시켰으며, 정침의 좌측에는 못채와 방앗간채를 배치하였습니다. 사랑채의 우측에는 선암재(仙巖齋)를 두었으며,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있습니다.
동암서당은 동암 권이번(東巖 權以璠)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후손 소암 사설(素巖 師卨), 소산 사주(所山 師周), 송학헌 윤석(松鶴軒 胤錫) 등이 1749년(영조 25)에 건립하였으나 1785년(정조 9)에 동산사(桐山社) 창건으로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권진사댁은 성암(省菴) 권철연(權喆淵)이 살던 집인데, 건너 마을인 ‘운곡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 건립하였다 합니다. 9칸 규모의 동향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口자형의 정침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마당의 좌측에는 3칸 규모의 서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침의 양쪽 허리부분에는 토석담장을 설치하여 내외공간을 구분하였으며, 담장 사이에는 일각문을 세워 안채로 출입케 하였습니다.
한수정(寒水亭)은 충재 권벌이 세운 거연헌(居然軒)이라는 모막(茅幕)이 있던 자리에 손자인 권래(權來)가 건립한 정자인데,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 하여 ‘한수정(寒水亭)’이라 이름지었다 합니다. 정자는 T자형으로 정자의 주위에는 ‘와룡연(臥龍淵)’이라 불리우는 연못이 삼면에 조성되어 있으며 서쪽 연못과 정자 사이에는 ‘초연대(超然臺)’라 불리는 넓은 바위가 있습니다.
의성김씨 집성촌 바래미전통마을
바래미전통마을은 의성김씨의 집성촌입니다.
개암종택(開巖宗宅)은 의성김씨 개암공파종택으로 ‘바래미마을‘의 뒤에 있습니다. 종택은 개암 김우굉(金宇宏)의 10세손인 김연대(金鍊大)가 매입하여 정착하였으며 11세손인 김우영(金佑永)이 중건하였다고 합니다. 3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一자형의 사랑채와 Π자형의 안채가 튼 口자형의 배치를 이루며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습니다.
팔오헌종택(八吾軒宗宅)은 팔오헌 김성구(金聲久)의 종택으로, 口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좌측에는 중문칸과 아랫방을 연접시켰으며 작은 사랑방 뒤로는 통래칸과 고방을 두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상방을 두고 좌측에는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켰습니다.
해저 만회고택은 파리장서운동 때 유림들의 연명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여받은 김건영(金建永)의 살림집입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의 口자형 건물로 안채로의 출입은 우익사에 난 중문을 통하도록 한 측면출입형(側面出入形)인데, 평면이 측면출입형인 관계로 사랑채도 특색 있는 평면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문이 있어야 할 부분에 책방을 두었는데, 책방은 퇴칸까지 돌출되어 동쪽의 큰사랑과 서쪽의 작은사랑은 공간적으로 완전히 분리되게 하였습니다.
해와고택(海窩古宅)은 이조참의를 지낸 해와 김희택(金熙澤)의 손자인 김중수(金中銖)가 조부의 유지에 따라 건립한 주택입니다. 정침은 ㄱ자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튼 口자형을 이루며 남향하여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로 좌측에는 3칸 규모의 문간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로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건넌방을 두고 좌측에는 2통칸의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이 연접되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남호구택은 농산(聾山) 김난영(金蘭永)이 1876년에 건립한 주택으로, 솟을대문을 한 7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 7칸 측면 7칸 규모의 口자형 정침이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안채로의 출입은 우익사에 난 중문을 통하도록 한 측면출입형(側面出入形)인데, 평면이 측면출입형인 관계로 사랑채도 특색 있는 평면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문이 있어야 할 부분에 도장방을 두어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공간적으로 분리되게 하였으며, 도장방의 주위에는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돌출시켜 두 공간을 연결시켰습니다.
황전전통마을에도 의성김씨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쌍벽당종택(雙碧堂宗宅)은 연산군 때의 문신 쌍벽당 김언구(金彦球)를 기리기 위해 1566년에 건립한 정자이며, 안채는 김언구의 부친인 죽헌 김균(金筠)이 1450년에 건립하였습니다. 7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하여 口자형의 정침이 있으며, 마당의 좌측에는 2칸 규모의 아래채를 두었습니다. 정자인 쌍벽당은 사랑채의 오른쪽 뒤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쌍벽당 뒤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며 자리잡고 있습니다.
경암헌고택은 10대조인 김종걸(金宗傑)의 조부가 장인인 남구수(南龜壽)로부터 가옥을 이어 받아 의성김씨의 종택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정침의 오른쪽 뒤에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외양간과 못방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 1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를 배치하였습니다. 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고 건넌방의 전면에는 통래칸과 고방이 우익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도암정은 김종걸의 후손이 1650년에 건립한 정자로, ‘황전마을’ 앞에 있습니다. 정자 앞에는 방지를 조성하였으며 연못을 향한 전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후 좌우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습니다. 평면은 어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인데, 전면의 퇴칸 하부에는 하층주를 세워 퇴칸은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봉산리사는 김종걸을 추모하기 위해 1793년에 건립한 이사(里社)로 ∪자형의 문간채와 一자형의 본채가 튼 口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건물 사이의 트인 부분에는 토석담장을 설치하였으며, 전면 좌측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습니다. 어간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입니다.
상운면의 봉화금씨 유적들
상운면 일대에는 봉화금씨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군위공종택(軍威公宗宅)은 금계(琴啓)의 종택으로 ㄷ자형의 정침과 일자형의 작은 사랑채가 튼 口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5칸 규모의 아래채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평면은 중문칸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사랑채를 두고 우측에는 작은방과 고방을 배치하였습니다. 고방의 뒤로는 통래칸과 부엌, 안방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으며 안방의 좌측에는 안대청 2칸과 건넌방을 두어 전체적으로 ㄷ자형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종선정은 금응석(琴應石)이 1554년에 건립한 정자로, 상운에서 봉성으로 통하는 국도 변에 북동향하여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경사진 대지위에 건립한 까닭에 출입은 배면에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측칸을 통칸 온돌방으로 꾸민 후 좌측에는 6칸 대청을 연접시켰으며, 전면에는 계자각을 두른 헌함을, 후면에는 쪽마루를 각각 설치하였습니다.
무진장재(無盡藏齋)는 신라시대 사찰이었던 무진장사를 1480년경에 농수 금원정(琴元貞)의 재실로 개축하였습니다. 정면 5칸 측면 6칸 규모의 口자형 건물인데, 대지의 지형으로 보아서는 동남향한 좌익사 부분이 정면인 듯 하나 주출입은 동북향한 면에 난 중문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중문을 들어서면 중정을 사이에 두고 앞에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익사에는 온돌방과 부엌, 마루, 통래칸, 외양간 등이 연접되어 있습니다.
쌍송정(雙松亭) 정침은 봉화인 금혜가 노후에 은거하던 가옥입니다. 당호는 정침 좌측에 소나무 2그루가 있는 곳에 정자를 지어 ‘쌍송정’이라 하였는데, 정자는 1975년에 영남대학교로 이건하여 현재는 정침만이 남아 있습니다. 평면은 경북 북부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口자형 건물인데, 중문칸 전면에 현관처럼 돌출된 부분은 후대에 증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법전면·춘양면의 진주강씨 집성촌
법전면과 춘양면에는 진주강씨의 집성촌이 있습니다.
강씨종택은 병자호란 후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친형인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함께 낙향하여 은거하던 곳이라 하는데, 1798년에 후손인 강명규(姜命奎)가 중수하였다 합니다. 정침은 口자형의 건물인데, 정침의 우측에는 도은의 아들인 강찬이 학문 증진과 후학 계몽을 위해 1710년에 건립한 재청인 성건재(省愆齋)가 있으며 재청의 후면에는 사당이 있습니다.
해은고택(海隱古宅)은 해은 강필효가 살았던 집으로, 강윤의 <법천문집>의 기록으로 보아 1750년(영조 25)경 창건된 건물로 추정되나 그 후 1900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하였습니다. 정침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ㅁ자형입니다. 해은 강필효는 명재 윤증의 학문을 계승한 소곡 윤광소의 문인으로, 1803년(순조 3) 유일로 천거되어 순릉참봉, 충청도 도사, 통정대부를 역임하고 돈녕부 도정에 올랐습니다. <해은문집> <경설도> <사유록>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그 중 <해은문집>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기헌고택은 강두환(姜斗煥)이 건립한 주택으로,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6칸 측면 7칸 규모의 口자형 정침이 있으며, 전면을 모두 사랑공간으로 구성한 까닭에 안채로의 출입은 우익사에 설치한 중문을 통하도록 한 측면출입형(側面出入形)입니다. 안채는 좌로부터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이 연접되어 있고 2통칸의 안방은 안마당을 향하도록 배치하였습니다.
법계서실은 해은 강필효(姜必孝)를 기리기 위해 1840년에 제자인 성근묵(成近默), 성수묵(成遂默) 등이 유림과 함께 건립한 서실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내부에 단칸 규모의 마루방을 마련한 후 정면과 양 측면에는 퇴 칸 마루를 둘렀습니다.
경체정은 강윤(姜潤), 강완(姜浣), 강한(姜瀚) 3형제를 기리기 위해 후손인 강태중(姜泰重)이 1854년에 건립한 정자로 ‘음지마을’ 입구에 위치하는데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후 전면 좌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으며, 전면에는 연못을 조성하였습니다.
뇌풍정(雷風亭)은 강재항을 기리는 정자로 구릉지의 암반 위에 세워졌습니다. 조선후기의 독특한 정자 건물로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나 그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강재항은 영남지역에서 재지사족으로 자리잡고 있는 기호학파의 노론계열로, 관직에서 은퇴한 이후 향리에서 강학 활동을 하며 삼계서원의 향음주례에 참여하는 등 영남학파의 선비들과 활발하게 교유하였습니다.
이오당(二吾堂)은 잠은 강흡을 추모하기 위해 1679년에 건립한 정자이며, 1938년에 중수하였습니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데, 이오(二吾)라는 당호는 낙오천(樂吾天)하여 종오년(終吾年)한다는 의미로 붙여 진 것입니다.
만산고택(晩山古宅)은 만산 강용(姜鎔)이 1878년에 건립한 가옥입니다. 11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口자형의 정침이 동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칠류헌(七柳軒)’이라 편액한 5칸 규모의 별당이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 안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랑마당의 좌측에는 서실(書室)이 있는데, 서실 전면에 걸려 있는 ‘한묵청연(翰墨淸緣)’이란 현판은 영친왕이 8세 때 쓴 글씨라 합니다.
와선정은 병자호란 때 대명절의를 지키며 이곳에 은거한 태백오현(太白五賢)인 강흡(姜恰), 홍우정(洪宇定), 심장세(沈長世), 정양(鄭瀁), 홍석(洪錫)이 교유지처로 건립한 정자인데, 지금도 이들의 후손들은 년 1회씩 회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로 배면과 좌측면에는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배면 담장 사이에는 협문을 내어 정자로 출입케 하였습니다.
까치구멍집과 도토마리집
설매리와 분천리에는 까치구멍집과 도토마리집이 있습니다.
설매리 3겹까치구멍집은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소유자의 7대조가 건립하여 대를 물려 살아왔다고 하며, 지붕은 1970년대에 시멘트기와로 개량하였던 것을 1996년에 다시 이엉으로 환원하였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봉당이 나오는데, 봉당의 좌우에는 외양간과 정지를 두었고 봉당 뒤쪽에는 어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랑방과 샛방이 앞뒤로 배치되어 있으며 우측에는 안방을 두었습니다.
설매리 겹집은 1840년경에 건립된 초가 까치구멍집입니다.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一자형 겹집인데, 우측에는 3칸 규모의 초가집인 못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배치를 이루었습니다. 본채의 전면은 봉당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외양간을, 우측에는 정지와 안방, 벽장을 연접시켰고 후면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랑방을 두었으며 우측으로는 작은 마루를 1칸 더 연접시킨 후 고방을 배치하였습니다.
분천리 까치구멍집은 ‘수안골’ 안쪽의 산기슭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간의 두짝 판문을 들어서면 봉당을 사이에 두고 마루칸이 나타나는데 마루의 뒤에는 좁은 도장방을 설치하였습니다. 좌측칸에는 부엌과 안방을 앞뒤로 배치한 후 부엌의 앞에는 마구간을 돌출시켜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으며, 우측칸은 통간으로 사랑방을 꾸몄습니다.
분천리 도토마리집은 평면은 어간의 정지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과 도장방을, 우측에는 외양간과 사랑방을 연접시켰는데, 정지를 가운데에 둔 평면형태가 베틀의 도토마리와 유사하다고 하여 ‘도토마리집’이라고 부릅니다. 이 집은 이러한 평면적인 특징과 함께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끼워 맞춘 것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어 민속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 6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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