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다. 예를 들어보자.
지난주 존 스노 미 재무장관이 국채 발행 한도를 늘리지 않으면 5월28일 만기가 도래하는 6백억 달러의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다고 경고하자, 미 의회는 행정부가 2004년까지 계속 국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국채발행 한도 인상법안을 지난 23일 통과시켰다. 그리고는 6백억달러를 상환하기 바로 하루 전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슬그머니’ 연방정부의 국채발행 한도를 무려 9천8백40억달러 늘린 7조3천억달러로 정한 법률에 서명했다.
미 연방정부는 이미 지난 2월 종전 국채발행 한도인 약 6조4천억 달러에 도달해 이 한도가 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상조치들로 간신히 버텨왔다. 전문가들은 거의 1조달러나 대폭 늘려준 국채발행 한도를 내년이면 또 늘려야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연방 재정은 올해 3천억 달러가 넘는 적자를 기록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은 28일 10년간 3천5백달러 감세안에 서명했다. 당장의 경기부양과 실업 해소가 급선무라는 것이 부시 대통령의 주장이다. 말 그대로 국민세금으로 일단 눈앞의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식이다.
***미국 재정적자 실체 폭로한 AEI 보고서**
미 의회예산국(CBO)은 지난 3월 부시 행정부 계획대로라면 10년후 쯤 재정적자 규모가 1천억달러 정도로 줄어들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난달 의회가 승인한 8백억달러의 이라크 전쟁. 전후복구 자금이나 감세안에 따른 재정적자 발생분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지난 4월26일 잔미기업연구소(AEI)는 이처럼 미국의 재정적자 통계가 ‘조작적’이라는 점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은 ‘미래의 적자’도 엄청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계산해 냈다. 최근 공개된 이 보고서는 폴 오닐 전 재무장관의 지시로 재무부 부차관보 출신 켄트 스메터스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와 재크디시 고크헤일 AEI 객원교수(클리블랜드 연방준비은행 선임연구원)이 작성한 것이다.
‘재정 및 세대 불균형:새로운 예산우선순위를 위한 새로운 예산측정방식’(Fiscal and Generational Imbalances: New Budget Measures For New Budget Priorities)이라는 이 보고서는 “연방예산우선순위가 공공재를 제공하는 사업에서 사회보험제공으로 이행함에 따라 기존의 회계측정방식은 쓸모가 없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1년 단위의 현금흐름 방식의 현행 계산법은 1년에 모든 예산을 의회가 직접 분배하는 경우에나 타당할 것”이라면서 “국가 채무나 재정 적자 같은 과거지향적 또는 단기적 개념은 향후 지불해야 할 채무를 측정하는 장기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예산방식으로 보충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불쌍한 미국의 '미래세대'**
보고서는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미국이 엄청난 적자국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7천5백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가 얼마 후부터 대거 은퇴하기 시작하면 사회보장 및 의료지원(Medicare)에 추가로 투입돼야 하는 재정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미국 베이비붐 세대란 2차 세계대전 이후 1946~1965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로 미국 인구의 26%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의 사회보장 및 의료지원 제도에 따르면 후손들은 돈만 많이 내고 훨씬 적게 받는 손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보고서의 계산에 따르면 사회보장 및 의료지원을 포함한 영구적인 재정불균형은 현재 정책을 불변하는 것으로 보고 현재가치로 따져서 44조2천억달러에 이른다. 그중 5천억달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회보장 및 의료지원으로 인한 재정불균형이다.
한마디로 말해 '미래세대'에게 커다란 채무를 떠넘기면서 '현재세대'가 흥청망청 지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표적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다.
***과감한 사회보장비 감축 불가피하나...**
보고서는 이같은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소득의 16.6%를 영구히 추가로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소득세 인상률은 높아진다. 2008년까지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소득에서 다시 영구적으로 18.2% 추가 징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안으로는 사회보장 및 의료지원을 제외한 모든 예산을 55% 가량 줄여야 한다. 결국 사회보장 및 의료지원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지 않고 현 제도를 끌고가려면 사회보장 및 의료지원 지출을 대폭 삭감하거나 소득세 인상과 지출 삭감을 결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29일(현지시간) “AEI 보고서를 정부가 의도적으로 은폐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면서 “백악관은 이 보고서의 결론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플라이셔 대변인은 “이 보고서가 사회보장제도가 개혁돼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세금 인상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사회보장 제도 개혁을 여러차례 추진해 왔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면서 “최근 몇 달 동안 경기부양을 위한 감세안 통과에 대부분의 역량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부시로서는 풀기 힘든 숙제라는 게 이 신문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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