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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2루 주자'로 부활한 임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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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2루 주자'로 부활한 임수혁

[프레시안 스포츠] 故 임수혁이 남긴 것

2000년 LG와의 경기 중 쓰러져 만 10년 동안 말 한마디 못한 채 병석에 누워 있던 임수혁(전 롯데) 포수가 7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41세.

90년대 말 롯데 상승세를 이끌다 비운의 스타가 된 임수혁이 우리에게 남긴 건 뭘까?

'플레이오프 사나이' 임수혁의 홈런

고려대와 상무를 거쳐 롯데에 2차 지명 선수로 94년 입단한 임수혁은 이듬해 LG와의 플레이오프에서 2개의 홈런을 쳐냈다. 그 중 하나는 당대 최고의 좌완 투수 이상훈에게 뽑아낸 것.

그 해 20승을 달성한 이상훈은 단 5패만을 기록했는데, 그 중 3패가 롯데에 당한 것이었다. 그 자신의 말처럼 유난히 이상훈은 롯데에 약했다. 4차전에서 솔로포로 이상훈을 공략한 임수혁은 이상훈과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서울고, 고려대 1년 선배인 임수혁은 이상훈의 공을 받아주는 포수에 그치지 않았다. 잦은 합숙소 이탈로 '빠삐용'이란 별명이 붙었던 이상훈의 마음까지 잘 받아줬던 선배였다. 그런 임수혁의 덕이었던지 이상훈은 고대 졸업반이던 1992년 14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을 세웠고, 프로에 들어와 최고 투수 반열에 올랐다.

플레이오프에서 이상훈뿐 아니라 또 다른 좌투수 김기범에게도 홈런을 때려냈던 임수혁은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과시했다.

'플레이오프 사나이' 임수혁의 진가는 99년 다시 부활했다. 삼성과의 피말리는 플레이오프 7차전. 9회초 3-5로 뒤지던 1사 1루 상황에서 대타로 나선 임수혁은 '창용불패' 임창용의 공을 받아쳐 동점포를 쏘아 올렸다. 내심 한국시리즈를 그리고 있었던 삼성은 이 홈런 한 방에 초조해졌고, 결국 롯데에 시리즈 티켓을 내줬다.

▲ 1995년 10월 6일 부산 사직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플레이오프에서 롯데를 상대로 솔로홈런을 친 임수혁이 홈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마해영의 꿈과 최희섭의 뇌진탕 사건으로 다시 기억된 임수혁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삼성은 6차전을 LG에 내주면 7차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극적인 이승엽의 홈런포가 터졌다. 하지만 아직 스코어는 동점. 초조함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찰나에 마해영의 결승포가 폭발했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징크스는 이렇게 깨졌다.

이 결승포로 한국시리즈 MVP(최우수선수)에 오른 마해영의 한마디는 큰 울림이 있었다. "어제 꿈에 병상에 쓰러져 있는 롯데 선배 임수혁 선수가 벌떡 일어나 함께 운동했다. 길몽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했다. 이번에 우승하지 못했으면 야구가 싫어질 만큼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마해영의 말은 잠시 잊혔던 임수혁을 다시 기억하게 했다. 그리고 1년 뒤 임수혁은 또다시 뉴스의 초점이 됐다. 당시 시카고 커브스에서 좋은 활약을 했던 최희섭은 홈경기 도중 타자의 뜬공을 처리하려다가 커브스의 선발투수 케리 우드와 부딪히면서 쓰러졌다. 그는 머리를 그라운드에 찧었다.

이때 구급차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 왔다. 구급차로 최희섭이 옮겨지기 전, 신속하게 응급처치도 이뤄졌다. 이 한 장면은 뉴스를 통해 반복됐다. 최희섭의 몸 상태도 중요했지만 병석에 누워 있던 임수혁의 경우와는 너무 다른 대처가 우리를 안타깝게해서다. '미국처럼 응급처치만 제대로 했어도 임수혁은 지금 병상이 아닌 그라운드에 있지 않았을까'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임수혁을 홈으로 불러들이지 못해 아쉬운 조성환

임수혁은 서울 토박이지만 '롯데맨'이 됐다. 그는 91년 LG에 지명됐지만 이를 뒤로한 채, 상무로 향했다. 롯데 유니폼을 입은 그는 팀의 3번째 우승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95년과 99년 모두 정상 정복 일보 직전에서 좌절했다.

임수혁이 그라운드에서 쓰러진 이듬해, 롯데는 또 다른 비극을 겪는다. 롯데 김명성 감독은 성적 중압감 등에 시달리다 유명을 달리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 롯데에는 극심한 성적부진이 찾아왔다. '구도 부산'의 야구 열기도 한동안 휴화산이 됐다.

사이판에서 훈련하다 비보를 접한 롯데의 주장 조성환은 "선배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반드시 우승으로 보답하겠다"고 했다. 2년 연속 가을야구에 나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롯데 선수들의 각오였다. 임수혁이 2루에서 쓰러지던 날 타석에서 그를 홈으로 불러들이지 못해 못내 아쉬워했던 조성환의 말이라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 임수혁은 2루에서 끝내 홈인하지 못했다. ⓒ연합뉴스

임수혁의 안타까운 침묵

임수혁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인간미 넘치는 선수였다고 말한다. 유머 감각과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의 표정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각인돼 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아니 근 10년간 보지 못했던 그의 미소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전설의 명포수 로이 캄파넬라를 연상시킨다. 캄파넬라는 58년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하반신 마비를 당해 휠체어에서 여생을 보냈다. 좌절의 세월을 보내야 했지만 그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는 59년 9만여 명이 운집한 LA 메모리얼 콜리세움에서 "내가 여기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할 뿐"이라며 미소를 보냈다.

임수혁 선수의 빈소를 지키던 그의 아버지 임윤빈 씨는 7일 "7살이었던 수혁이 아들이 이제 커서 상주 역할을 하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임수혁의 장남 세현군은 2001년 아버지의 등번호 20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구를 했던 주인공.

임수혁에게 캄파넬라와 같이 야구팬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감동을 준다지만 그래도 그의 침묵은 너무 아쉽다. 그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면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 그게 오늘 더욱 궁금해진다.
▲ ⓒ프레시안(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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