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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의 '문명'과 동유럽의 '이념', 지나치면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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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의 '문명'과 동유럽의 '이념', 지나치면 실패한다

[이웅현 '비극의 아프가니스탄']<4> 카불 정권과 탈레반의 '균형감각 전쟁'

물 배달꾼의 아들

대대적인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모든 근대적인 학교들은 폐쇄되었고, 여자들은 집으로 쫓겨 들어가 나오지 못했다. 외국인 고문들은 추방되었고 일부다처제에 반하는 법률들도 폐기되었다. 도서관, 궁전, 박물관은 모조리 문을 닫았다. 종교적인 권위와 권력을 잠식하는 정부의 부처들, 특히 법무부와 교육부가 폐지되었고, 그 기능은 과거처럼 물라(하급 이슬람 선교자)들이 담당했다.

일찍이 1929년에, 20세기 말 탈레반 치하를 연상케 하는 이러한 극렬한 공포정치를 아프가니스탄에서 단행한 자가 있었다. 왕으로 추대되면서 하비불라라고 불리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바차 사카오(물 배달꾼의 아들)라고 불렀다. 두라니 파슈툰 왕조의 230년 역사 상 비파슈툰인(타지크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두라니 왕조의 왕위를 찬탈한 이 '데스페라도(무법자)'는 1920년대 후반 아프가니스탄의 북부지역에서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빈자들에게 나누어주는 '로빈 후드' 행세를 하면서 '영웅'으로 부상했다.

▲ 바차 사카오
1928년 12월 아마눌라 왕의 정부군에 대해 군사행동을 개시한 지 불과 1개월 만인 1929년 1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카불에 입성한 하비불라의 세력은 그 후 9개월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오늘날의 표현을 빌자면-'원리주의적(fundamentalist)'인 통치를 실시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다 소련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쫓겨난 이브라힘 벡의 무슬림 세력(바스마치)과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종교지도자 가문의 하나였던 무자디디 가문도 하비불라의 등극을 지지하고 승인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바차 사카오의 '반란'을 하나의 에피소드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지지 세력의 규모와 특성으로 보면, 이들은 단순한 무장폭도가 아니었다. 당시의 국왕 아마눌라의 급격한 근대화 정책에 대항한 상당한 규모의 종교적 문화적 저항세력이었다. 이들이 카불을 석권한 1929년은 바로 10년 전 왕위에 오른 두라니 왕조 아마눌라 왕의 근대화 정책이 정점에 달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아프간인들의 반발이 극을 향해 치닫던 시점이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바차 사카오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세력의 최대 계파 가운데 하나인 무자디디 가문의 가르침을 따르는 학생(murid 또는 taleb)이었다. (그러나 무자디디 가문은 곧 이어 물 배달꾼의 아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두라니 왕조에 대한 지지로 선회했다.) 따라서 9개월이라는 짧은 통치 기간이기는 했지만, 그 시기의 이슬람 원리주의 회귀의 정책적 성향으로 보나, 그 자신의 종교적 신분으로 보나 하비불라는 '원조' 탈레반(학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롤스로이스' 국왕

1990년대 중반 탈레반을 카불로 불러들인 것은 소련군 철수 이후의 내전과 무질서였지만, '원조' 탈레반을 카불로 불러들인 것은 아마눌라 국왕의 급격한 근대화 정책이었다. 1919년 즉위한 아마눌라는 대아프가니스탄 왕국 건설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듀란드 라인 너머의 파슈툰과 인더스 무슬림은 물론 북으로는 부하라와 히바의 무슬림을 포함하는 독립적인 왕국건설의 구상을 가지고 있던 이 의욕적인 군주는 1919년 대영 지하드를 선포했고, 레닌에게는 사자를 보내어 화평을 요구했다.

▲ 아마눌라
그러나 그는 영국과의 전쟁(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또 내전을 수습한 소련이 중앙아시아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자, 국왕은 북방으로의 진출 희망마저 접어야 했다. 결국 대내적인 개혁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갖게 된 아마눌라는 (아프간인들이 보기에) 극단적인 근대화 정책에 착수했다.

그는 터키식 개혁방법을 모방했다.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처음으로 성문헌법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사법부를 구성하고 세속적인 형법체계를 만들었다. 각급 학교를 건설하여 근대적 교육체제를 정비하고, 여자들을 학교에 보내도록 하였으며, 외국으로 유학생들도 파견했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이 강화된 데 비해 종교(이슬람)의 힘이 상대화되자 종교지도자들이 반발했고,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고 교육이 확충되자 보수적인 아프간인들이 저항했다. 무자디디 가문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아마눌라의 헌법이 '공산주의자들의 출판물'이라며 땅에 팽개쳤다.

결국 1924년 호스트 지방에서 물라들이 들고 일어났고, 이의 원인을 검토하기 위해서 소집한 로야 지르가도 종족적 전통과 종교적 신념에 위배되는 국왕의 정책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의 필요성에 관한 대중 계몽에는 무관심했던 이 '계몽군주'는 1927년 외국의 근대문물 섭렵을 위한 이른바 '그랜드 투어'에 나섰다.

유럽화된 군주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소련, 터키 등지를 1년 이상을 두루 순방하고 1928년 7월 테헤란에서 카불로 새로 구입한 롤스로이스를 타고 귀환했다. 귀환하자마자 일부일처제와 여성교육의 강화, 조세정책의 시행 등을 포함한 더욱 더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고, 이에 저항하는 종족지도자들 그리고 무자디디 가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투옥했다.

마침내 아프가니스탄 동부 신와리족(2010년 1월 난가르하르 주의 이 종족은 총 120만 달러의 지원금을 받는 조건으로 탈레반 축출에 앞장 설 것을 카불정부에 약속했다.)의 봉기를 신호탄으로, 아마눌라의 정책에 대한 무력 저항이 시작되었고, 1929년 1월 '물 배달꾼의 아들'이 카불에 입성하자 아마눌라는 애차(愛車) 롤스로이스를 타고 카불을 탈출,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비전과 집념, 근대화에 대한 충정과 열정을 모두 지니고 있던 아마눌라에게 부족했던 것은 자신이 통치하던 아프가니스탄의 종족적, 종교적 정서에 대한 이해였고, 자신의 정책추진을 위한 방법론적 융통성이었다. 19세기의 선조 국왕들과 달리 카불의 궁전에서만 자란 이 군주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사회의 전통과 정서 그리고 급격한 근대화에 대한 이들의 우려를 이해하지 못했다. 작용하는 힘만큼의 반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한 그는 아프간인들의 눈에 근대 '문명'을 향한 아프가니스탄의 문을 갑작스럽고 지나치게 활짝 열려고 했던 '카피르(이교도)'였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

작용의 힘이 급격하고 짧은 시간 내에 가해진 만큼, 반작용의 힘도 급격했고 오래 가지 못했다. 하비불라의 '9개월 천하'는 무질서와 약탈, 파괴로 점철되었고, 결국 곧 이은 두라니 왕조의 복위로 이어졌다. 나디르 샤(1929~1933)와 자히르 샤(1929~1973년) 두 국왕은 전임자의 실패를 의식한 듯 비교적 온건한 근대화와 개혁으로 일관했고, 종교와 종족의 전통과 정서를 자극하거나, 이에 명시적으로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눌라가 뿌려 놓은 근대화의 씨앗은 이 두 국왕의 시기에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이러한 변화의 수혜자들이 1960~70년대에 카불의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1973년 자히르 샤를 축출하고 쿠데타에 성공한 모하메드 다우드는 냉전의 극성기에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아프가니스탄의 근대화를 위한 줄타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한 때 연대했던 공산주의자들(PDPA,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에 의해서 1978년 4월 실각, 살해되었다. 후에 '사우르(4월) 혁명'이라고 불리게 될 1978년 4월의 이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자들은 그 이념적 색깔과 모방하려는 근대화의 사례에 있어서는 아마눌라의 그것과 현격하게 달랐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종교적, 종족적 전통과 규범을 무시한 급격하고 독단적인 근대화를 추구함으로써 아마눌라의 전철을 밟고 말았다.

PDPA의 누르 모하메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 바브락 카르말은 해외 또는 카불에서 교육을 받은 신세대 지식층이었고, 왕국 아프가니스탄의 근대화 과정의 수혜자들이었지만, 급격한 체제변화를 선호하는 급진주의자들이었다. 아마눌라가 서방의 근대화 또는 그를 모방한 터키의 근대화를 따르려고 했다면,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자들(특히 카르말 추방 이후 정권을 독점한 '할크<인민>'파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적 접근방법을 따르려 했다.

▲ 누르 모하메드 타라키
농지소유의 상한과 분배를 포함한 토지개혁정책을 선포했고, 고리대금업을 불식하겠다고 선언했다. 신부의 지참금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물론, 결혼 연령의 하한도 설정했고, 여성의 배우자 선택권도 보장했다. 95%가 넘는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서 성의 차별이 없는 보편교육제도를 도입하면서, 맑스주의적 교육과정을 채택했다. 이념적 성향(그리고 이에 입각한 토지개혁정책)과 폭력을 동반한 강압적인 추진방식(예를 들어 1979년 1월 타라키는 개혁에 저항하는 무자디디 가문의 남성 79명을 모두 처형했고, 생존자 시브가이툴라 무자디디는 반정부 반소(反蘇) 무자헤딘의 지도자가 되었다.)이 문제였음에도 이들은 이것을 '근대화 정책'이라 주장했다.

이들은 아마눌라의 정책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재현했다. 그리고 '롤스로이스 국왕'처럼 아프가니스탄의 지역적 정서와 전통 그리고 신앙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의도적 무시했다. 할크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면서도 이들이 거주하는 지방의 종교와 전통, 정서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프간인들에게는 이들 역시 '카피르'였다.

1979년 3월 서부의 도시 헤라트에서 무장폭동이 발생하면서 어설픈 근대화주의자들의 섣부른 근대화 정책은 좌초하기 시작했고, PDPA는 발상지 소련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한물 간 교조적 스탈린주의에 더욱 집착하면서, 소련정부에 무력원조를 해 달라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9년 12월 소련은 이 시대착오적인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한다면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 비극의 시작이었다.

칼날 위에 선 카불 정부

50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둔 두 개의 근대화 정책은 지나친 급진성 때문에 모두 실패했다. 서유럽의 '문명'에 기대려던 자와 동유럽의 낡은 '이념'에 기대려던 자들 모두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나지불라는 1996년 카불을 장악한 탈레반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소련을 불러들임으로써 전쟁과 내전을 초래한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자들은 탈레반의 출현과 득세에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탈레반은 일찍이 바차 사카오가 그랬던 것처럼 공산주의자들이 '이념'에 매혹되어 지나치게 활짝 열었던 아프가니스탄의 문을 다시 걸어 잠그고 극단적 원리주의 반동정책을 추진했다.

최근까지도 아프가니스탄의 통치자들은 외부 세력과 싸우지 않을 때에는 국내의 여러 종족, 종교 세력과 다퉈 정통성을 확보해야 했다. 현명한 통치자는 이들 세력과 대립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의 복잡한 사회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다양한 힘들 즉 독자적인 전통을 존중하는 지방의 종족과 그 지도자들,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해 권위 있는 해석을 내리고 그것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사회를 이끄는 종교지도자들을 설득하거나, 이들과 타협하면서 '파슈툰' 왕국 또는 '이슬람' 왕국을 이끌었다.

전통과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며 독립심과 자긍심을 지닌 아프간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정책과 그 수용과 인내의 한계선을 넘어선 정책을 구별하고, 균형을 취하는 것이 안정기 아프가니스탄 군주들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아시아를 엄습한 근대화의 물결 속의 아마눌라는 물론, 20세기 후반 퇴조하던 공산주의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던 PDPA의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추진하려는 '위로부터의 근대화'와 아프가니스탄 사회의 종교적 종족적 정통성의 사이에 가로놓인 칼날 위에서 균형을 상실하고 말았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거나, 균형을 상실하여 실족한 통치자나 저항세력은 여지없이 '카피르' 혹은 '극단주의자'의 낙인이 찍힌 채 도주(아마눌라, 탈레반의 오마르)하거나, 목숨을 잃었다(바차 사카오, 타라키와 아민).

그리고 지금 세계에 문을 활짝 열고 민주주의와 국가건설이라는 (아프간인들에게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아프가니스탄에서 확립하고자 하는 현재의 카불 정부와 이를 지원하는 미국은 이 위험한 칼날 위에 서서 역사적 실패를 답습하지 않고 균형을 모색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셈이다.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작용과 이에 대한 반작용의 세 번째 사이클이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카불 정권이든 탈레반 반군이든 승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원, 인내심은 물론 이 칼날 위의 균형감각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접견하고 있는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세계로 문을 활짝 연 카불 정권은 역사의 가르침을 통해 '위험한 칼날 위'에서의 균형을 잡아갈 수 있을 것인가. ⓒ로이터=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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