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만이다. 국민연금이 2006년 사회책임투자를 시작한 지 13년 만에 '사회책임투자 로드맵'을 수립해 내놓을 전망이다. 사회책임투자(SRI)는 금융기관이 투자 의사결정 과정에서 투자대상의 ESG 즉 환경·사회·지배구조 등 비재무적(non-financial) 요소를 고려하는 모든 투자철학이자 방식을 말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이 로드맵은 올해 6월 말까지는 확정될 계획이다. 고려대 산학협력단으로부터 '국민연금의 책임투자와 스튜어드십 코드에 관한 연구' 최종 보고서를 받은 지 1년 6개월 만이다.
그 사이 필자는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로드맵 발표가 기약 없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을 축 늘어진 거문고 줄에 비유하며 비판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문재인 정부, 거문고 줄을 고쳐 매야 할 때) 자본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될 개혁 과제가 혹여 좌초되지 않을까, 초조하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비록 지연되었지만 다행이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 시점에서 '경영참여에 해당하는 주주권 행사'가 첨예한 쟁점 사안이었던, 지난해 7월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 도입 사례를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은 '관치·경영권 간섭·연기금 사회주의' 등 스튜어드십 코드 반대론자들의 여론을 과도하게 의식해 처음에는 '경영참여 해당 주주권 행사'를 배제하는 안을 내놓았다. 시민사회 등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거센 비판이 제기되자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가 의결한 경우에는 시행할 수 있다는, 이른바 '제한적 시행'으로 타협한 바 있다. 사안의 파괴력이 스튜어드십 코드보다 덜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로드맵'이 그러한 길을 답습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여러 제반여건을 고려해야 한다는 명분을 무기 삼아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이 매우 보수적인 '사회책임투자 로드맵'을 제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책임투자를 대하는 국민연금의 관점과 실제 13년 동안의 성과를 보면 이러한 우려는 전혀 근거 없는 기우(杞憂)가 아니다.
우선 국민연금은 2006년 사회책임투자를 시작한 지 13년 동안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철학·정책·가이드라인·전략'을 정립하거나 수립하고자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에서 홈페이지에 공시한 '책임투자를 위한 정책 및 계획'의 기금운용지침의 책임투자 정책은 사실 정책이라고 하기에도 민망스럽다. 이조차도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의 입법지원으로 통과된 '국민연금법 개정'에 따른 수동적 반영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의 2009년 책임투자원칙(PRI) 가입도 당시 국민연금의 ESG 의무 고려와 의무 공시를 골자로 한 국민연금법 개정 법제화를 회피하기 위한 방어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그 결과는 PRI의 6대 원칙 불이행 또는 함량 미달 이행이다.
국민연금은 △ 원칙 1. ESG 이슈를 투자분석과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통합했는가. 2018년 기준으로 보면 전체 자산의 4.18%만이, 그리고 그 이전에는 1.1%만을 그렇게 했다. 이나마 '적극적 통합'이 아닌 '소극적 통합'이었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 원칙 2. 적극적 소유자가 되며, ESG 이슈를 오너십 정책과 관행에 통합했는가. 지난해 7월 말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전에는 이러한 개념 자체를 전혀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원칙 3. 투자대상의 ESG 이슈에 대한 적절한 정보공개 요구는 또 어떤가. 최근 안효준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장은 PRI와 금투협이 공동주최한 세미나에서 'ESG 정보공개 미흡이 국민연금의 책임투자의 장애물'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가 있다. 이는 매우 무책임한 발언이다. 자본시장의 대통령 격인 국민연금이 기업에 ESG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구하지 않은 책임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해외 연기금과 기관투자자는 ESG 정보공개를 적극 요구하고, 이슈 해결을 위해 연대해 행동하기도 한다. 국민연금이 이런 적이 있는가. 2016년 가습기 살균제 가해기업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구하는 기업관여 레터(letter) 발송도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의 문제 제기 이후 부랴부랴 이루어졌다. 국민연금이 ESG 정보공개 요구만 제대로 했어도 우리나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수준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을 거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 원칙 4. 투자산업의 PRI 수용과 이행을 촉진하고, △ 원칙 5. PRI 이행의 효과를 제고할 수 있도록 상호협력했는가. 이 또한 사례가 거의 없다. 국민연금은 사회책임투자 촉진과 생태계를 조성하는데 무관심했다.
△ 원칙 6. PRI 이행에 대한 활동과 진행 사항을 보고했는가. 국민연금은 2009년 PRI 가입 이후부터 2015년까지 한 번도 이를 보고한 바 없다. 다만 가습기 살균제 가해기업에 대한 투자 이슈가 불거진 2016년 6월 말경 PRI에 '투명성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 이후로 매년 보고는 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은 거의 없다. 너무 당연하다. 사회책임투자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평가가 너무 야박하다고 불만을 제기할 수 있다. 책임투자팀을 신설하고, 사회책임투자형 펀드 벤치마크 지수를 도입하고, 국내 주식의 ESG 평가모형도 구축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을 모르는 바 아니다. 재계 등 반대론자들의 혹세무민(惑世誣民)에 가까운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록 제한적이지만 스튜어드십 코드를 채택한 점은 높이 평가한다. 2017년 정권이 교체되고 김성주 이사장이 취임한 이후 국민연금에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필자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다만, 그 이전에 입력된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관련 활동 데이터 중 그다지 긍정적 정보가 없다는 점이, 극도로 수동적·방어적 활동을 해왔다는 점이 앞으로 나올 '사회책임투자 로드맵' 수준을 미리 걱정을 하게 만들 뿐이다.
필자는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로드맵'이 제대로 나오기 위해서는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국민연금만의 철학과 원칙을 확고하게 정립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책임투자 가이드라인과 실행 전략 수립도 이 철학과 원칙에 근거해 도출되어야만 한다.
국민연금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40%에 해당하는 667조 원(2019.2월 기준)을 운용하고 있다. 개별 산업과 개별 기업의 투자성과보다는 전 산업을 넘어 우리나라 경제와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고려해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국민연금은 유니버설 오너십(universal ownership)을 가져야 한다. 자본시장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국민연금의 지위와 역할에 근거해 사회책임투자 철학과 원칙을 세우고, 이를 이해관계자들과 공유하는 동시에 설득을 통해 합의해 나가야 한다. 국민연금을 단기투자자로 전락시켜 버리는 '수익률 개념'도 이러한 논의 틀에서 재정립해야 한다. 이는 고려대 산학협력팀이 용역 최종보고서에서 놓치고 있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국민연금이 사회책임투자 펀드를 스타일 펀드로만 인식했고, 이 편협한 인식의 틀을 만들어 버린 기저에는 바로 국민연금의 지위와 역할에 근거한 사회책임투자 철학과 원칙의 부재가 있었다. 조족지혈(鳥足之血) 사회책임투자 규모 문제도 근본적으로 이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로드맵'은 국민연금의 가치사슬로 묶여 있는 시장 생태계를 적극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관점에서 수립되어야 한다.
국민연금은 2006년 900억 원을 민간 자산운용사에 위탁운용하면서 사회책임투자를 시작했다. 규모는 2018년 말 기준으로 26조7392억 원으로, 2017년 6조8800억 원에 비해 19조8592억 원이나 늘었다. 증가 내역을 보면, 위탁운용 4조5800억원, 직접운용 22조1600억원이다. 2017년까지 위탁운용만 해오던 방식에서 2018년에는 직접운용까지 사회책임투자를 확장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하지만 위탁운용을 2조3000억 원이나 축소했다는 점에서 우려가 제기된다. 국민연금이 사회책임투자와 관련한 시장 생태계 활성화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사회책임투자 민간 위탁운용 증대는 민간 자산운용사의 사회책임투자 공모펀드의 활성화는 물론 일반 국민들의 사회책임투자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민간 자산운용사가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위탁운용사로 선정되기 위해 스스로 사회책임투자 공모펀드를 출시해 운용해 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초기에는 민간 위탁운용을 대폭 늘려야 하는 이유다.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민간 위탁운용사는 2016년 10개에서 2018년 5개로 줄었다. 물론 민간 위탁운용사의 사회책임투자 수익률이 나쁘다는 점이 축소 이유다. 국민연금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위탁운용사의 단기적 평가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사회책임투자 생태계 활성화라는 장기적 관점에서 위탁운용 규모의 확대를 고려해야 한다. 생태계 활성화는 곧 국민연금의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로드맵'에는 전 자산의 사회책임투자 방식 적용과 그 규모 확대를 전향적으로 담아야 한다.
현재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는 '국내 주식에 한정해' 그리고 '매우 작은 규모로' 실행하고 있다. 스타일 펀드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의 방식은 ESG를 기반으로 한 스튜어드십 코드가 주식 전체에 적용되고 있다는 점과도 불일치한다. PRI는 전 자산에 ESG 고려와 통합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주식→채권→전체 자산군으로, 그리고 국내→해외로 적용하되, 그 적용 속도를 높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사회책임투자 수준 좌표는 질을 떠나 단순히 규모만 비교해도 글로벌 흐름의 저 변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규모는 앞서 언급한 바 26조7392억 원에 불과하다. 이 규모는 국민연금의 총 자산운용 규모 대비 4.18%에 그친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은 사실 우리나라 사회책임투자에서 절대적인 존재다. 국내 전체 사회책임투자의 96.91%가 국민연금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민연금의 입장에서 결코 자랑스러운 내용이 아니다. '자본시장 대통령으로서 사회책임투자 시장 확대와 생태계 조성을 위한 역할을 제대로 못 했다'는 역설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지속가능투자 연대인 GSIA(Global Sustainable Investment Alliance)에 따르면, 2016년 전 세계 사회책임투자 규모는 22조8900억 달러에서 2018년도에는 30조6830억 달러로 급성장했다. 주목할 점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2016년 4740억 달러에서 2018년에는 2조1800억 달러로 수직적으로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의 사회책임투자 성장은 우리나라가 보면 자괴감이 들 정도로 초라해 진다. 2014년 일본의 사회책임투자 규모는 70억 달러로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많았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적 감정에 근거한 필자의 비교가 아니다. 일본 사회책임투자 폭발적 성장에는 2013년 아베 정권이 '일본재흥전략'(日本再興戰略)을 발표하고 2014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점, 그리고 2015년 우리나라 국민연금과 유사한 일본의 공적연기금인 GPIF의 스튜어드십 코드 채택과 전면적인 사회책임투자 표방 후 시장 주도라는 배경이 있다.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로드맵'은 우리나라의 초라한 사회책임투자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중대한 계기가 될 전망이다. 또 자본시장에서의 투자와 기업에서의 경영을 '책임'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꾸어 나가는 엔진이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미국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인 엘리자베스 워런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이 지난해 8월 발의한 '책임 있는 자본주의법'(Accountable Capitalism Act)이 지향하는 사회에 동의한다면, 우리나라를 그러한 사회로 만들어 가는 여정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이는 국민연금의 '사회책임투자 로드맵'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리고 그 지향이 얼마나 담대하고 전향적이냐에 달려 있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은 '사회책임투자 로드맵'을 단순히 '기금운용'이라는 '협소한 범위로 한정'해 논의하고 그 결과로 일개 연금의 실무 차원의 로드맵을 도출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논의하고 방안을 최선의 방안을 이끌어 내야 한다. 로드맵을 전문적으로 검토하고 논의할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도 그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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