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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불한당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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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불한당들의 시대

그림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제1부 이야기의 서막 ⑦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8. 노호(老狐), 늙은 여우의 반격
길달문이 불탄 이후로 비형랑의 꿈에 자주 여우가 나타났다. 여우는 가슴에 꽂힌 화살을 뽑아내려 몸부림쳤으나 미늘촉이 뼈에 걸려 뽑히지 않았다. 비형랑은 마치 자신의 살이 까뒤집히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신음소리를 냈다.

어느 날 꿈엔, 궁의(宮衣:궁궐 여인들의 옷)를 입고 각종 비녀와 금란대로 장식한 대수(大首:가발로 쌓아 올린 큰 머리) 차림의 여인이 흐느끼며 나타났다. 언뜻 비치는 그림자는 여우의 모습이었다. 비형랑은 여우로 변한 기달이 자신을 희롱하기 위해 일부러 궁의를 입고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며 손을 내저었다. 이번엔 가슴에서 화살을 뽑아내려 하지 않았다. 다만, 신음소리 대신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렸다. 비형랑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갑자기 궁의 속에서 여우가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비형랑은 절규하듯이 말했다.

"기달! 너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 화살은 내가 쏜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경고하였을..."

비형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우는 비형랑을 향해 돌아섰다. 미세하게 흘러나오던 웃음소리가 여우의 울음소리로 날카롭게 변했다. 비형랑은 귀를 막았다. 웃음소리는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더욱 크게 울렸다. 여우의 가슴에는 화살이 박혀있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비형랑은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비형랑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괴이한 꿈이다. 여우이긴 하나 이번 꿈은 기달이 아니다. 가슴에 박힌 화살이 없다.'

비형랑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간밤의 꿈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른 아침부터 청지기가 인기척을 냈다.

"이찬 어른~ 웬 스님께서 긴히 뵙자고 하십니다요~"

그사이 비형랑의 벼슬은 집사(執事)에서 이찬(伊飡)으로 급상승했다. 이찬은 십칠 관등 중, 두 번째의 고위 요직이었다. 대신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왕은 진지왕의 유복자이므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대신들은 비형랑의 출신을 사실로 믿지 않았다.

이윽고 청지기는 파르스름한 민머리의 승려를 내실로 안내했다.

"소승 담수(淡水)라 하옵니다."

"무슨 일이 길래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으셨소?"

"역모(逆謀), 역모를 고변하러 왔나이다!"


상대등 노리부(弩里夫)는 사도태후의 명을 받아 진지왕을 제거하고 진평왕을 옹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새주(璽主) 미실의 남편이기도 하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부인의 행방을 구태여 탐문하지 않았다. 영흥사 화제 사고의 자초지종에 대해서도 애써 조사하지 않았다. 상대등으로서 귀족 회의를 의결하고 왕의 재가(裁可)를 얻는 일만 묵묵히 수행했다. 왕은 사도태후의 심복이자 미실의 남편이었던 노리부가 여전히 상대등에 있는 것이 불안했으나 그를 제거할 명분은 없었다. 비형랑은 노리부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했다.

그러나, 노리부는 왕이 의심할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낮과 밤은 모두 공공연하여 비형랑의 감시를 벗어나지 않았고, 사적인 회합으로 다른 이들과 교유하지 않았다. 노리부는 수족(手足)도 없는 벙어리처럼 살았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했다. 한동안 예의 주시하던 왕도 스스로 낙심한 노리부를 괘념할 이유가 없었다. 노리부는 그렇게 늙어 갔고 국인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노리부가 위독하다는 소문이 저자에 퍼졌다. 드러내 놓진 못했으나 많은 이들이 노리부를 측은하게 여기고 있었다. 발길을 끊었던 왕족과 귀족, 그리고 승려들의 수레가 노리부의 저택 앞으로 긴 줄을 이루었다. 노리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으나, 문병 온 이들의 손을 일일이 부여잡았다. 노리부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도 문병객마다 간절한 부탁을 잊지 않았다. 그의 말은 유언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 가슴에 맺힌 응어리 좀 풀어주시오. 죽어서도 그 은혜 잊지 않으리다."

듣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자도 있었고, 마주 잡은 손을 포근히 감싸며 같이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그동안 숨죽이며 살수 밖에 없었던 노리부의 고통이 그 한마디에 오롯이 담겨있었다. 곧 죽을 늙은이에게 두려움이란 없었다. 임종(林宗)의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것과, 기세등등하던 기달(吉達)이 일순간에 제거되는 것을 똑똑히 목도했던 이들에겐 여전히 왕은 두려운 존재였다. 그러나, 국인들의 민심은 외롭게 죽어가는 노리부를 동정했다. 한동안 노리부의 집으로 향하는 수레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그 이후로, 왕을 비난하는 무리들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왕은 전전긍긍했다. 곧 죽을 늙은이의 입을 틀어막는 것은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노리부의 명줄이 빨리 끊어지기를 바랄 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왕이 주춤하는 사이, 반왕(反王)의 무리들은 칼을 빼어 들고 왕의 목을 노리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노리부가 결국 숨을 거두자 왕은 유명무실했던 상대등 자리에 수을부(首乙夫)를 임명했다. 수을부는 노리부의 장례를 국찰(國刹:나라를 대표하는 사찰) 황룡사(皇龍寺)에서 거행할 것이라 공포했다. 왕이 친행(親幸)하여 노리부의 명복을 빌 것이라는 것도 알렸다. 노리부의 시신은 황룡사의 비보(秘寶)이자 나라의 자랑인 장륙삼세불(丈六三世佛) 앞에 안치되었다. 새벽부터 황룡사로 향하는 국인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각지의 조문 인파가 속속 서라벌에 도착했다. 구름같이 모여든 군중 속에는 조문이 목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평생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운 황룡사 삼세불을 친견하려는 이도 많았다.

국과 왜(倭)의 땅은 물론이요, 백제와 고구려의 불자(佛者)들도 장륙삼세불 친견(親見)을 일생의 소원으로 여길 정도로 삼세불은 신라의 큰 보물이자 자랑이었다. 그 이유인즉슨, 천여 년 전 천축국(天竺國:현재의 인도)의 아육왕(阿育王:아쇼카 왕)이 인연 있는 땅에 닿아 불사(佛事)를 일으킬 것을 축원하며 보낸 쇠와 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육왕의 쇠와 금이 신라 땅에 당도한 것은 진흥왕 때였고, 그로부터 대불사가 일어났다. 장륙삼세불은 말 그대로 높이가 일 장(丈) 육 척(尺)에 달하는 거대 불상이었다. 도금에만 구리 삼만 오천 근(斤)과 황금 일만 이백여 푼(分)이 들었다.

삼세불이라 함은 삼세(三世: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불상을 말함인데, 과거를 상징하는 연등불과 현재를 상징하는 석가모니불의 건조가 완료된 상태였다. 마지막 미래불 조성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는데, 왕이 핍진해진 나라의 재정을 무릅쓰고 대불사를 지속할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흥왕 대부터 사도태후의 섭정 시기까지 이어져왔던 불사가 중단되자 황룡사 승려들의 불만은 컸다. 더군다나, 장륙불 앞에 사전 논의도 없이 노리부의 시신을 안치하자 승려들의 노여움은 폭발 직전에 다다랐다.

왕 또한 황룡사 승려들의 불만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애초의 공포문대로 밀어붙였다. 승려들의 표(表:상소문)가 빗발쳤다. 그들은 나라의 보물인 장륙불 앞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은 법도에도 없을뿐더러 일개 신하의 장례에 과분한 처우라는 주장에서부터, 진흥대왕과 사도태후께서 힘들게 세운 국찰(國刹:나라를 대표하는 절)의 위엄을 현재의 왕에 이르러 실추되고 망실될 것이 우려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인(上人:지혜와 덕을 겸비한 고승)으로 존경받는 비구들이 공공연히 왕의 처사를 성토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황룡사를 중심으로 반왕(反王)의 세력들이 본격적인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비형랑이 황급한 걸음으로 남당(南堂:왕의 집무실)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사인(舍人)들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를 데리고 따라왔다.

"오늘은 또 무슨 사달이 난 것이냐?"

연일 이어진 승려들의 상소와 항의에 신물이 난 왕이었다.

"화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저이의 말을 먼저 들어보소서!”

비형랑이 손짓을 하자 복면이 벗겨졌다. 이내 파르스름한 민머리가 드러났다.

"또 황룡사의 중이더란 말이냐? 오늘은 무슨 잔소리를 늘어놓으려고... "

왕은 보자마자 손사래를 쳤다. 승려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소승 담수(淡水)라 하옵니다. 왕께 문안을 여쭙나이다!"

왕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너희 비구들로 하여 안녕치 못하다. 이찬은 어찌하여 이 자를 데리고 온 것인가?"

담수는 머리를 땅에 박은 채로 말을 이었다.

"화급을 다투옵니다. 어서 구칠(仇柒)과 대세(大世)의 뒤를 쫓으소서!"

"구칠과 대세? 그들이 누구 관대 쫓으라는 것이냐?"

"구칠과 대세는 미실을 원화(源花)로 모셨던 낭도(郎徒)로서 오랫동안 불순한 말을 일삼았사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역모라도 일으킨다는 말이냐? 뒤를 쫓으라니..."

그제야 담수가 고개를 들고 왕을 바라봤다.

"구칠과 대세가 정창(正倉:황룡사의 보물창고)에서 천사옥대를 훔쳐 금릉(金陵:현재의 난징)으로 도망했나이다!"

"천사옥대(天賜玉帶)? 그것은 왕실의 비보(秘寶)가 아니냐? 그들이 어찌 비보를 훔칠 수 있단 말이냐?"

"황룡사의 상인(上人)들이 정창의 문을 열어준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래서 그들이 천사옥대를 금릉에? 왜 그런 짓을 한 것이냐? 자초지종을 말해보라!"

담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금릉에는 원광법사가 있사옵니다.”

"원광(圓光)?"

담수는 다시 침을 삼켰다.

"대세를 꼬드겨 천사옥대를 금릉의 원광법사에게 갖다 바치도록 한 자는 구칠이온데, 그의 배후에는..."

"배후?"

담수는 대세와 구칠에 관계된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왕은 심장이 멎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골방에서 가까스로 숨을 쉬며 늙어 죽으리라 생각했던 사도태후가 황룡사의 승려들과 결탁하여 어느새 칼을 빼든 형국이었다. 그 칼끝은 정확하게 왕의 숨통을 겨누고 있었다. 방심하는 사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몰린 자신을 발견한 왕은 비형랑에게 급령(急令)을 내렸다. 왕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믿을 것은 너 밖에 없다. 어서 말을 몰아 구칠과 대세의 뒤를 쫓으라! 그들이 배를 타지 못하도록 막아야하느니라!"

비형랑과 시위삼도(侍衛三徒:왕실 직속 경호부대)의 군사들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파발마를 몰았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남악(南岳:경주 남산)의 정상에 오른 담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먼저 올라와 있던 대세와 구칠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펼쳐진 서라벌의 경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즐비한 사탑과 수십여 채의 금입택(金入宅)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빛나고 있었다.

먼저 대세가 입을 열었다.

“이 좁은 신라의 산골 속에서 일생을 보내긴 싫소!”

다가서던 구칠이 거들었다.

“연못의 물고기와 새장 속의 새는 저 산림(山林)의 거대함과 창해(滄海)의 무변(無邊:끝이 없음)함을 알지 못하리!”

대세와 구칠이 서로 마주 보고 호방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렸다. 대세가 만면의 미소를 띠며 다시 말했다.

“내 장차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오월(吳越:양자강의 유서 깊은 땅)로 들어가 스승을 찾고 도(道)를 좇아 명산(名山)에 들어갈 것이오. 만일 신선(神仙)을 배울 수 있다면 훌쩍 바람을 타고 휑한 하늘 밖으로 날아갈 터이니, 이야말로 천하의 신기한 기행이요 장관이 아니겠소?”

구칠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소! 그대의 기개(氣槪)가 장하오! 마땅히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스승을 찾을 만 하오!”

“호구산? 호구산이 어디요?”

대세가 구칠에게 물었다.

“아니, 호구산을 모르시오? 오월 땅의 그 천하제일 명산을?”

대세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내 일찍이 방외(方外:세속을 벗어남)에 뜻을 두긴 하였으나, 그 앎이 천박하여 부끄럽기 짝이 없소. 많은 가르침을 주시오.”

묵묵히 듣고 있던 담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버님이 허락하시겠소? 가문을 이을 외동아들이 방외를 탐하는데 잠자코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소! 꿈 깨시오! 그리고, 구법승(求法僧) 이외의 서유(西遊:중국 여행)는 법으로 엄격히 금하고 있소!”

구칠이 미간을 구기더니 대세에게 다시 물었다.

“허허허, 그렇겠구려. 이찬(伊飡) 어른께서는 아드님의 뜻을 알고는 계신 것이오? 괜히 나서서 이 몸이 경을 치르는 것은 아니오?”

대세는 입술을 깨물며 각오한 듯 말했다.

“아들 이기는 아비 보았소? 허락지 않으신대도 나는 띠(작은 뗏목)를 타고 손바닥으로 저어서 라도 오월 땅에 가보고야 말겠소!”

대세와 구칠이 서로 마주 보고 다시 크게 웃었다. 그때, 홀연히 비바람이 불어 암벽에 괸 물 위로 낙엽이 떨어졌다. 둘은 낙엽을 후후 불며 희희낙락 소란을 떨었다. 담수는 둘의 수작이 영 못마땅했다. 담수는 자신과 대세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순식간에 대세의 마음을 휘어잡아버린 구칠이 싫었다.

그 이튿날 밤, 대세가 담수의 처소를 찾았다. 대세는 한동안 담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담수가 먼저 입을 뗐다.

"구칠이란 자는 어쩌고 여기 왔소? 이 밤늦은 시간에."

"나, 결심했소! 오월(吳越)로 떠날 것이오."

"구칠과 함께?"

"일이 커졌소. 알고 보니 구칠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소.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이오."

담수가 비아냥거리듯 다시 물었다.

"당최~ 그래 언제 출발할 예정이오?"

"날이 밝는 즉시, 머뭇거릴 시간이 없소. 구칠과 함께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원광법사께 전달해야 하오."

듣고 있던 담수가 깜짝 놀라 다그치듯 물었다.

"천사옥대가 무엇인지는 알고 말하는 것이오? 그것은 시조(始祖) 임금들의 유품으로 만든 왕통(王統:왕위를 계승하는 정통)의 증표이오. 왕실의 비고(秘庫)인 황룡사 정청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어찌 일개 화랑 나부랭이가 함부로 접촉할 수 있다는 말이오? 그리고, 원광법사께 전달한다니... 구칠 같은 뜬금없는 자와 어울리더니 별 해괴망측한 언사를 함부로 입에 담는구려!"

담수의 격앙된 반응에도 대세는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구칠의 뒤에는 태후마마가 있소. 새주(璽主) 마마를 잃고 방황하는 나를 오래전부터 지켜보았다 하시었소. 구칠은 태후마마의 뜻을 전하러 왔던 것이고..."

대세는 화랑으로서 미실(美室)을 원화(原花)로 받들던 낭도 중 한 명이었다. 미실도 그를 어여삐 여겨 음사(陰事)를 직접 베풀기도 하였다. 그 이후로 대세는 미실의 명령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그럴수록 미실도 대세를 더더욱 어여삐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미실은 온데간데없이 행방이 불명하였고 대세는 그 상실감으로 마음을 다잡지 못하여 신세를 한탄하고 서라벌을 업신여기며 오월(吳越)의 땅으로 서유(西遊)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원광법사를 새 왕으로... 그것이 태후마마의 뜻이오?"

"그렇다는군! 이미 법사의 임천(林泉:고승의 거처)이 있는 호구산에 기별(奇別)이 갔다고 들었소. 온 국인들이 신(神)처럼 떠받드는 법사께서 왕통의 상징인 천사옥대를 허리에 차고 환향(還鄕)하면, 지금의 임금도 어쩔 수 없이 쫓겨날 것이라는 게 태후마마의 계획이오."

"도중에 발각되면 어쩔 것이오? 그리고 선부서(船府署:선박에 대한 일을 맡아보는 관아)의 관리들이 출항을 허락하겠소?"
담수의 말에 대세는 만면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구칠이 나를 찾은 것이오. 얼마 전 아버님께서 선부서의 대감(大監:현재의 장관 직위)으로 임명되시었소. 출항 허가서쯤이야..."

"그것은 역모에 가담하는 것이요! 대역죄로 죽을 수도 있소. 이는 필시 구칠의 꼬임에 그대가 넘어간 것이 분명하오. 구족(九族)이 멸문(滅門)될 수도 있소.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관아로 갑시다. 내가 동행해 주겠소."

대세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구칠은 모르겠으나, 나는 신라를 영영 떠날 작정이오. 오월(吳越:남중국)도 좋고 천축(天竺:인도)이라면 더 좋을 수도... "

그때 첫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대세는 이제 가야 할 시간이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이 밝으면 남해(南海)로 떠날 것이오."

담수는 주저하며 말을 잊지 못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려던 대세가 돌아서며 담수를 바라봤다.

"이 야심한 밤에 그대를 찾은 이유는... 묻고 싶은 바가 있어서요. 나는 여전히 그대와 함께 서유(西遊)를 꿈꾸고 있소. 그대... 능히 나와 같이할 생각은... 진정 없으시오?"

담수는 아무런 대답 없이, 다만 주저할 뿐이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대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생에서의 마지막 모습일 것이다. 담수는 깊은 고민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대세가 남긴 마지막 말이 귓전에 계속 맴돌았다.

'그대 능히 나와 같이...'

동창이 희뿜해지자 담수는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은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 했다. 왕은 사도태후가 영흥사(永興寺)에서 쥐 죽은 듯 조용히 살다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태후는 황룡사의 승려들과 결탁하고, 미실이 부리던 화랑들을 뒤에서 조종하여 원광법사를 끌어들였다. 왕은 태후를 너무 얕잡아 본 것을 자책했다. 비형랑과 시위삼도의 군마 소리가 아득해질 때까지 왕은 턱에 괸 손을 풀지 않았다.

'영악한 늙은이야. 늙은 여우같은. 그래, 꼬리 아홉 달린 노호(老狐)와 다름이 없어!'

왕은 혼잣말을 하며, 머리를 숙인 담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의 충성이 갸륵하다. 너의 밀고가 아니었다면 큰 변고가 있었을 것이다. 내 너의 충정을 잊지 않으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담수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외람되오나... 대세를 갸륵하게 여겨주소서. 대세는 구칠의 꾐에 넘어갔을 뿐, 역모를 일으킬 만 한 자가 못되옵니다. 통촉해 주시옵소서."

"너의 우정이 아름답구나. 그래, 내 유념 하마."

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비형랑이 보낸 전서구(傳書鳩:통신에 이용하기 위해 훈련된 비둘기)가 밤늦게 도착했다. 남해(南海) 각지의 항구를 모조리 뒤지고 있으나 구칠과 대세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는 소식이었다. 선부서에서는 모든 발선(發船:배의 출항)을 금하였으나,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수(隋) 나라의 창선(倉船:미곡 수송선)과 염관선(鹽官船:소금 운송선)은 막지 못하였다고 했다. 항구의 상황을 잘 알고 있을 대세와 구칠은 수나라의 선박을 이용할 것이 분명하였으나, 수나라의 수박(守舶:선원)들이 신라 선부서의 말을 순순히 따를 리는 없었다. 구칠과 대세의 도해(渡海)를 막을 길은 없어 보였다.

'구칠이 대세를 담수에게 보내 일부러 남해로 간다는 말을 흘렸을 수도 있다. 금릉으로 가자면 분명 수나라의 큰 배가 필요했을 것인데. 미리 노호(老狐)가 황룡사의 상인(上人)들을 움직여 준비한 배가 있다면 그들을 제지할 방법은 없다! 노호는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가담한 황룡사의 상인들은 어떻게 색출한다? 황룡사를 잘못 건드렸다가 도처에서 승려들이 반발하면 수습할 길이 없다. 이들을 내편으로 끌어들일 방법은? 태후의 도움을 오래전부터 받아온 원광법사가 태후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할 것이다. 진정 원광이 천사옥대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가 노호를 등에 업고 환향(還鄕)하여 양위(讓位)를 요구한다면... '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데도 마땅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도태후와 황룡사의 승려들이 꾸미는 일에 대응만 해서는 결국 그들의 뜻대로 판세가 흘러가 버릴 것이다.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 선수책(先手䇿)이 곧 필생책(必生策)일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왕은 상대등 수을부를 불렀다.

"조빙사(朝聘使:중국행 사신)에 마땅한 이가 있겠소?"

"나마(奈麻) 제문과 대사(大舍) 횡천이 있사옵니다."

"좋소. 그들을 준비시키시오. 짐의 친서를 대흥성(大興城:현재의 시안) 황제에게 전달해야 하오. 화급을 다투는 일이니 서두르시오."

지난 하루 사이에 일을 모두 알고 있던 수을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왕의 의중을 재차 물었다.

"하명하신 바는 여지없이 받들겠사오나, 나라가 온통 어수선한데 내치(內治)를 먼저 안정시킨 후 조빙사를 보내심이 어떨지..."

"내부에선 해법이 보이지 않소. 황룡사를 등에 업은 노호(老狐)를 어찌 감당한단 말이오? 짐의 친서가 수나라 황제에게 먹힌다면... 저들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오! 길은 외부에 있소."

제문과 횡천이 입궁하여 왕의 특명을 받들었다. 왕의 친서를 건네받는 두 사람의 표정은 자못 비장하였다.

민심(民心)은 요동쳤다. 탁발승(托鉢僧)들이 토점(土店:동네의 구멍가게)이나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현왕(現王:현재의 왕)을 심판하러 원광법사가 귀국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왕은 궁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냈다. 갇혀있는 사도태후가 오히려 왕을 가둔 꼴이 되었다. 왕은 조빙사의 소식을 기다리는 이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조빙사의 회신은 열흘이 지나고 보름을 넘겨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왕은 불안감에 밤을 뜬눈으로 보내기 일쑤였다. 비형랑이 시위삼도를 지휘하여 월성을 몇 겹으로 둘러싸고, 성문 출입을 더더욱 엄중히 하였으나 일촉즉발의 긴장감은 서라벌 상공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로부터 수일 후,

파발마의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던 월성의 남문(南門)과 준예문(遵禮門)이 앞다투어 열렸다. 전령의 등에 붙은 붉은 깃발은 급보의 전달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계속)

글 그림 : 노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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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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