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82강은 6월 1일(토)-2일(일), 1박2일 일정으로 홍성의 섬 죽도로 떠납니다. 작고도 작은 섬이니 이번 섬학교는 걷기보다 머무르기 위해 갑니다.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저녁부터 섬은 다시 고요해집니다. 낮에는 섬길을 최대한 느리게 걷고 바지락 캐기 체험도 하고 밤에는 고요하고 적막한 섬에서 별도 보다 올 예정입니다. 초여름 밤, 밤바다와 별을 보러 섬으로 떠날 분들을 초대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월의 답사지인 <초여름 밤바다와 별 보러 가는 섬, 죽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죽도의 봄, 바지락은 찰지고 개조개는 탱글탱글
봄날, 섬은 한창 바지락 작업으로 활기가 넘친다. 죽도의 바지락은 초봄부터 여름 산란 직전까지가 제철이다. 어느 때보다 찰지고 달다. 개조개도 탱글탱글 제철이다. 요즈음은 개조개를 대합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본래 대합은 백합 중에서 큰 것을 이르던 말이다. 개조개는 내자패라고도 부른다. 아무튼 섬에서는 해산물이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그래서 봄 조개 가을 낙지란 말도 생겼다. 죽도의 봄은 그렇게 영글어간다.
죽도항, 어선을 타고 나가 바지락 작업을 하다 돌아온 어부가 어선을 정박시켰다. 썰물 때라 어선은 부두에 바로 접안하지 못한다. 어부는 스티로폼 조각을 바다에 띄우고 그 위에 몸을 싣는다. 능란한 몸짓이지만 위태로워 보인다. 한 조각 부표에 의지해 살아가는 어부의 생애. 섬에서의 삶은 늘 아슬아슬하다. 삶은 자주 생사의 경계를 넘나든다. 어선 옆 작은 부표에 앉아 쉬는 갈매기의 표정은 여유롭다. 갈매기는 날개라도 있으니 섬사람들보다 더 나은 생애일까? 풍파가 덮쳐 와도 날지 못하는 슬픈 섬들. 애틋하고 또 애틋하다.
홍성군의 하나뿐인 유인도
죽도는 홍성군의 하나뿐인 유인도다. 통영시의 연대도가 앞서 그랬듯이 죽도 또한 근래 태양광 발전소만으로 에너지 자립을 이룬 에코아일랜드로 유명세를 탓다. 죽도 주민들이 직접 출연한 에너지 기업 광고가 방송되기도 했다. 죽도는 천수만 안의 섬이다. 천수만은 충청남도 서해안 중부, 태안반도 남단에서 남쪽으로 쭉 뻗어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만이다. 태안, 홍성, 보령, 서산 지역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바다를 남북으로 길게 자리한 안면도가 막아주고 있어 더없이 잔잔한 내해다. 수심이 얕다고 해서 천수만(淺水灣)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천수만의 입구는 남쪽으로 열려 있는데. 만 입구의 너비는 2㎞, 만 길이는 40㎞다.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이라 해안선의 길이가 무려 284.5㎞나 된다. 천수만의 북쪽 바다에는 간월도와 황도가 있고 아래쪽 바다에는 보령의 육도, 월도 등이, 만 바깥으로는 원산도와 효자도가 천수만을 호위하듯 서 있다. 천수만이 태풍에도 더없이 잔잔한 호수 같은 것은 그 때문이다.
천수만은 조석간만의 차가 평균 6m나 되고 수심이 10m 내외밖에 되지 않아 대형 선박이 출입할 수 없다. 오늘은 사리 때인 9물이라 조석간만의 차가 무려 9m나 된다. 이런 날은 썰물이 되면 작은 어선들도 띄우지 못한다. 선박들이 물 빠진 갯벌에 고립돼 버리기 때문이다. 오늘도 오전 여객선은 뜨지도 못했다. 계류장이 없으니 여객선은 갯벌에 처박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해상교통을 위해 꼭 필요한 시설인 계류장은 그리 큰 예산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시설을 해주지 않고 있는 행정에 대해 주민들의 불만이 크다. 여객선을 타고 내리는 여객들도 위태롭다. 여객의 안전을 위해서도 속히 시설돼야 마땅하다.
홍성군 서부면에 속한 죽도는 남당 항에서 3.7km 해상에 있다. 여객선으로 불과 10분도 안 걸릴 정도로 뭍과 가까운 섬이지만 작년(2018년) 초까지만 해도 섬으로의 입도가 쉽지 않았다. 죽도는 내내 정기 여객선이 없었다. 주민이나 여행자들 누구도 자기 배가 없으면 대절선을 불러야만 섬을 드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대절선에 대한 해경의 단속이 너무 심해 주민도 외지인도 힘겨운 세월을 살았다. 가까운 오지낙도였던 셈이다. 작년 5월 여객선이 취항하면서 접근성이 개선되자 섬을 찾는 육지인들이 부쩍 늘었다. 여객선은 하루 4회 왕복하는데 화요일에는 휴항이다. 탐방객이 많을 때는 배를 더 띄우기도 한다.
예전 같지 않은 천수만
천수만은 본래 수초가 많고 영양염류가 풍부해 농어·도미·민어·숭어 등의 산란장이자 다양한 어류의 서식지였다. 천수만에서는 굴, 김 양식도 활발했고 천수만으로 인해 홍성 광천 새우젓과 광천김이 유명세를 떨칠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부터 농경지와 담수호를 만들기 위해 대규모 간척사업이 시작돼 천수만의 북부 7,7km가 방조제로 막혀버렸고 155.94㎢가 매립됐다. 이 여파로 천수만은 드넓은 갯벌이 사라지고 오염도 심해져 어류의 산란장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천수만은 이제 더 이상 황금어장이 아니다. 광천 새우젓과 광천김의 명성도 퇴색되고 말았다. 가까운 미래도 내다보지 못한 마구잡이 간척으로 황금 갯벌을 죽여버린 후과다.
죽도는 면적 0.17㎢에 불과할 정도로 작아 천천히 섬을 둘러봐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섬에 대나무가 많아 죽도라 했다는 유래처럼 섬 곳곳에는 시누대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높은 산이 없고 섬 전체가 낮은 구릉과 평지다 보니 섬 어디에서든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죽도는 과거 태안군 안산면에 속했다가 1914년 서산군 안면면에, 그리고 1989년부터 홍성군 서부면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죽도는 아주 젊은 섬
죽도는 혼자가 아니다. 죽도를 어미 섬으로 인근의 올망졸망한 작은 섬들 11개가 함께 무리지어 군도를 이룬다. 그래서 죽도와 11개의 무인도를 합해 열두대섬이라 부른다. 무인도는 지만여, 글만여, 전족도, 몽족도, 띠섬, 작은마녀 등 제각기 다른 사연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 썰물 때면 이 무인도들 중 4개가 죽도와 이어진다. 무인도를 걸어서 오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죽도 사람들은 대부분 어업에 기대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다. 섬이 작아 농사 지을 땅이 없었으니 어업은 숙명이었다. 죽도는 아주 젊은 섬이다. 30-40대가 10명이나 된다. 인구의 25%다. 고향을 떠났던 청년들이 다시 귀어해 정착한 까닭이다. 주민등록상 인구는 70명이지만 죽도에는 23가구 40명이 실 거주하는데 어선이 23척이다. 1가구는 배가 2척이고 배를 운행할 기력이 없는 노인 한 가구만 배가 없다. 그러니 실상 섬 주민 모두가 배를 소유하고 어업을 하는 어부들인 셈이다. 어선이 죽도 사람들의 생명선이다. 거의 100%의 주민이 배를 소유하고 어업에 종사하는 일은 다른 섬들에서는 보기 어려운, 아주 희귀한 사례다. 섬은 봄에는 쭈꾸미가, 가을에는 꽃게와 대하가 가계를 살찌운다.
죽도는 천수만 일원이 그렇듯이 겨울철 12월부터 2월까지는 새조개의 산지이기도 하다. 남당항에서는 해마다 새조개 축제가 열린다. 하지만 올해는 생산량이 많지 않아 가격이 비쌌다. 1kg에 10만원 정도 했으니 금조개였다. 새조개의 산란철은 4월경인데 산란 직전까지가 살이 오르는 때라 가장 맛있다. 여름에도 새조개가 나지만 이때는 질기고 맛이 없다. 바지락은 종패를 뿌려 어촌계에서 공동양식을 하는데 마파지, 앞장벌 등에서 나는 바지락이 최상품이다. 죽도의 바지락은 거의 사철 내내 채취 되는데 한 집 당 하루 40kg까지만 가능하다.
바다를 관찰할 수 있는 세 개의 조망대
작은 섬이지만 죽도에는 섬 전체를 탐방할 수 있는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만든 길이다. 둘레길에는 바다를 관찰할 수 있는 조망대가 세 개나 있다. 첫 번째 조망대는 옹팡섬, 두 번째 조망대는 당개비, 당개비는 담깨비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당제를 모시던 당산이었다. 세 번째 조망대는 동쪽에 위치해 있는 동바지다. 동바지는 시누대 숲이다.
전망대들에는 최영 장군과 백야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스님 등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홍성 출신 역사 인물들이다. 만해는 결성면 성곡리, 백야는 갈산면 행산리다. 두 곳의 거리는 6.5km 거리에 불과하니 바로 지척에서 두 분의 걸출한 항일 독립 영웅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영 장군의 탄생지는 불분명하다. 철원, 서산, 개성, 홍성 등의 설이 있다. 조형물은 최영 장군 또한 홍성 출신이라 주장하고 싶은 까닭에 세워진 것이다. 둘레길에는 길을 표시하는 밧줄들이 처져 있는데 시선을 거스른다. 위험한 곳도 아닌데 굳이 밧줄을 칠 필요가 있나 싶다. 전형적인 전시행정이다.
동바지 입구에서 할머니 한 분이 굴을 까고 있다. 상뿌리에서 캐온 굴이다. 작년 12월 24일 예인선이 죽도 앞 바다를 지나가다 기름 유출 사고를 냈다. 다행이 만조 때라 피해가 적었다. 그래도 주민들이 모두 나가 기름 묻은 바위들을 닦아내는데 3일이나 걸렸다. 하지만 지금도 기름 피해를 입은 지역의 굴은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다.
지구 온난화로 시름 깊어간다
당개비 전망대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 해변에 외딴 집 한 채가 서 있다. 이 집도 오늘 수확해온 바지락을 바구니에 담아 내놨다. 관광객들에게 팔기 위한 것이다. 집 처마에는 대나무 꼬지에 조개를 꽂아서 말리고 있다. 무슨 조개일까? 주인에게 물어보니 맛조개다. 저런 조개 꼬지는 구워서 술 안주하기 그만이다. 섬에서는 무 넣고 조리거나 국을 끓여 밥반찬을 한다. 섬 주민들은 수온 상승 영향으로 천수만의 조개들도 점점 줄어간다고 이구동성이다. 올해 새조개 작황이 안 좋은 것도 수온 상승 탓인 같다고 짐작한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이 북극 빙하나 북극곰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당장 우리 바다 생태계 질서를 교란시키고 있다. 온난화 방지 대책은 미세먼지 대책만큼이나 정부가 주요 의제로 삼아야 마땅한 사안이다.
섬 주민들은 여객선이 취항하면서부터는 주말이면 하루 5백 명씩이나 섬을 찾는 것이 반갑다. 섬에 활기가 돌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광객 대부분은 섬에 돈 한 푼 안 쓰고 떠난다. 그냥 쓰레기만 버리고 간다. 주민들은 그것이 걱정이다. 마을 안 갯벌에는 독살 체험장이 설치돼 있다. 독살은 해변에 돌담을 쌓아 들물 때 들어온 물고기를 썰물 때 잡는 원시어로 방법이다. 돌 그물인 것이다. 죽도에서도 과거에는 독살로 물고기를 잡던 시절도 있었다.
독살 근처에는 용난둠벙이 있다. 갯고랑이 꼭 용이 꿈틀거리는 모양이다. 안개가 많이 끼는 날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죽도는 고려시대 삼별초의 난 당시 삼별초군이 화살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베어다 썼다는 전설도 전한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진도에 왕국을 세웠던 삼별초는 한때 남동쪽으로 남해도, 서해에서는 안면도까지 장악했으니 죽도 역시 삼별초 왕국의 영토였을 것이다.
섬살이가 고되지만 섬을 떠날 수 없는 이유
개조개를 맛보기 위해 우연히 들른 포장마차. 주인 육태국, 이혜영씨 부부는 어선을 가지고 조업을 하면서 민박도 겸한다. 조업을 하는 이유는 민박 오는 손님들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싶어서다. 혜영씨는 대기업을 다니다 남편을 만나 십여 년 전에 남편의 고향인 죽도로 귀향했다. 남편과 함께 죽도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혜영씨는 섬살이가 만족스러운데 특히 죽도의 가을을 좋아한다. 노을이 질 때면 그토록 포근할 수가 없다. 부부의 가을은 더없이 낭만적이다. 새우잡이를 나갔다 들어오는 저녁이면 돗자리 하나 챙겨서 해변으로 간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에서 부부는 돗자리에 앉아 별을 보며 맥주를 마신다. 그 때의 행복감은 뭐라 표현할 수 없다. 섬살이가 고되기도 하지만 섬을 떠날 수 없는 이유다.
6월 섬학교 제82강 <초여름 밤바다와 별 보러 가는 섬, 죽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6월 1일(토)>
07:00 서울 출발(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2강 여는 모임
-남당항 도착
-남당항 출항
-죽도 도착
-점심식사(죽도 민박집에서 섬밥상)
-죽도 트레킹
-바지락 캐기, 고동·게 잡기 체험(미참여자 자유시간)
-저녁식사 겸 뒤풀이(죽도 민박집에서 생선회와 해산물 밥상)
20:00- 자유시간 및 취침(민박집, 다인실)
<6월 2일(일)>
07:00 기상. 아침 산책
-아침식사(죽도 민박집에서 섬밥상)
-죽도 출항
-남당항 도착
-한용운 생가 탐방
-광천시장 탐방 및 장보기
-점심식사(굴칼국수)
14:00 서울 향발. 제 82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버프(얼굴가리개),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6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4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0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70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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