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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가깝지만 그곳만의 독특한 문화유산 가꾸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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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울에 가깝지만 그곳만의 독특한 문화유산 가꾸어 왔다

2019년 5월 고을학교는 <광명·시흥·안양고을>

싱그러운 5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67강은 서울의 생활권에 포함되지만 그곳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 광명·시흥·안양고을을 찾아 갑니다.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어 출발시간을 평소보다 1시간 늦춘 08시로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시흥의 관곡지(官谷池)는 강희맹이 1463년(세조 9)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채취해 온 연꽃씨를 처음 재배해 널리 퍼뜨리게 된 곳이다.Ⓒ시흥시

고을학교 제67강은 2019년 5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8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강북 탑승자들의 편의를 위해 지하철 2호선·6호선 합정역 8번 출구에서 199m 직진해 홀트아동복지회 앞에서 08시 15분 탑승을 추가합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7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광명-충현박물관(충현서원지/관감당/이원익종택/오리영우/이원익영정/탄금암/삼상대/풍욕대)-안양-만안교-중초사지(당간지주/삼층석탑)·안양사지(금당터/칠층탑지)-시흥-청주한씨문익공파묘역-관곡지-강희맹묘역-호조벌-방산동가마터-소래산(소산서원/하연묘)-서울의 순입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광명·시흥·안양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7강 답사지인 <광명·시흥·안양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문화의 동질성 보여주는 세 고을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온 겹침 산줄기인 한남금북정맥이 안성 칠현산에서 금북정맥은 남서쪽으로 서해를 향해 내달리고 한남정맥은 북서쪽으로 낮은 산줄기를 이어가며 용인, 수원, 의왕, 군포, 안양, 광명, 시흥, 김포 등 경기도의 여러 고을들을 부려 놓았습니다.

특히 안양, 시흥, 광명은 삼성산에서 발원한 안양천 유역에 속해 같은 문화권이 갖는 역사의 동질성이 짙게 나타나는데 서울과 가까워 고을의 읍치구역은 그다지 발달하지 않고 특정인의 유적과 유물이 전해지며 특히 정조의 능행과 관련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 광명은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유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소현세자 빈 강씨의 묘역인 영회원과 철종을 영립한 정원용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비 새는 집에서 살았던 오리 이원익 이야기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는 이원익의 뜻을 기리고 제사하기 위해 지어진 서원이 있던 터로서, 이원익이 고려 태사 강감찬과 장령 서견 두 분을 모실 사당을 세우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1658년에 후학들이 사당을 창건하여 오리 선생을 같이 모시고 삼현사라 하였습니다. 후에 충현사로 개칭되었다가 1676년(숙종 2)에는 충현서원으로 사액되었으며 1871년(고종 8)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건물들은 모두 없어지고 강당 터로 추정되는 건물지만 보존되어 있는데 기단과 초석이 남아 있습니다. 20세기 초에 후손들이 강당 터 남쪽 서원 터에 오리영우(梧里影宇)와 후손들이 살던 종택, 관감당 등을 건립하였고 최근에는 강당 터 북쪽에 삼상대와 풍욕대 두 정자를 복원하였습니다.

오리영우는 이원익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사당입니다. 1630년(인조 8)에 2칸 초가인 선생의 집에서 비가 새므로 왕이 새 집을 하사하였는데 1693년(숙종 19) 인조가 하사한 집터 위에 사당을 건립하여 ‘오리영우’라 편액하였습니다. 사당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앞쪽에는 내삼문이 있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습니다. 장대석 기단과 초석은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세장한 부재 단면, 익공의 형태, 방화벽 등은 19세기 말의 수법으로 보입니다. 작은 규모의 사당이지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당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원익영정(보물 1435호)은 이원익이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된 것을 기념해 제작된 것으로 같은 해 조성된 청난공신과 선무공신의 도상에 비해 사모의 모양이 다소 변한 것으로 보아 책록된 시기보다 몇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영정의 형태는 축으로 장정되어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으로 그 모습은 오사모(烏紗帽)에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사모의 양쪽에는 구름 문양이 있고 얼굴에는 음영 효과가 거의 없으며 이목구비의 형용은 선묘 위주로 되어 있고 족좌대 위에 흑피혜(黑皮鞋)와 채전(彩氈)이 깔려 있어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감당(觀感堂)은 1630년(인조 8) 인조가 경기감사에게 명하여 이원익에게 지어준 집입니다. 당호는 인조가 신하와 백성들에게 이원익의 청렴하고 간결한 생활 자세를 ‘보고 느끼게’ 하고자 한다는 뜻에서 내린 것인데, 그 건립 경위는 이만성이 정리한 사제시상교(賜第時上敎)라는 편액에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원익은 이곳에서 4년간 기거하다가 죽었는데 이때 지어진 정당은 1637년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것을 서거 60주년인 1694년에 중수하였고 그 후 다시 허물어졌다가 1916년 10대손 이연철에 의해 중건되었습니다.

이원익 종택은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문간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1917년에, 문간채는 1940년경에 건립되었습니다. 안채 들보에 “관감당을 세운 이듬해 정사년(1917) 윤 2월 6일 미시에 기둥을 세우고 동량을 올렸다(龍 觀感堂建翌年丁巳閏二月六日未時立柱上樑 龜)”라고 씌어 있어 1658년 이원익이 살던 집터에 사원을 창건하였다가 훼철된 후 다시 일반주택으로 변경시킨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탄금암(彈琴岩)은 이원익이 거문고를 연주하던 바위입니다. 거문고는 선비의 악기로 알려져 있는데 <오리집> ‘연보(年譜)’에 따르면, 선생은 현재 동숭동 인근에 살 때 자주 낙산(駱山)에 올라 거문고 연주를 즐겼다고 합니다. 또한 이원익의 5대손 이인복의 문집에도 <문충공유금내력전말기(文忠公遺琴來歷顚末記)>가 있어 선생이 거문고를 좋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탄금암은 이원익 선생이 청백리로 근검한 생활도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정통하였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삼상대(三相臺)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三政丞)을 뜻하는 삼상을 정자 이름으로 하였는데 삼정승을 모두 거쳤으며 많은 치적이 있는 이원익을 기리기 위해 문인들과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삼상대 표지석이 유물로 남아 있고 현재는 후손들이 삼상대라는 이름의 정자를 복원하였습니다.

풍욕대(風浴臺)는 ‘바람에 목욕한다’는 다소 시적인 이름의 정자로 <논어> ‘선진(先進)’편에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곳은 구름산[雲山] 너머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으로 매우 시원한 곳으로 풍욕대 표지석이 남아 있으며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원익은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병조, 형조의 좌랑과 예조정랑을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박근원의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습니다. 1587년(선조 20) 복직되어 안주목사,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순찰사로 왜군과 싸워 공을 세웠고 1598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라 3도체찰사가 되었으며 완평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성품이 청렴하여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조세제도의 개혁을 위하여 대동법 실시를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영회원은 소현세자 빈 강씨의 묘소입니다. 묘소는 처음에는 초라한 봉분이었으나 1718년(숙종 44) 무고함이 판명되어 복위되었고, 복원묘를 만들어 민회묘라 부르다가 1870년(고종 7) 영회원으로 개칭되었으며 속칭 ‘애기릉’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강빈은 우의정 강석기의 딸로 1627년(인조 5) 가례를 올려 소현세자 빈이 되었습니다. 1637년 세자와 함께 심양에 볼모로 갔다가 1644년에 귀국하였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는 심관에서 국왕의 대리자로서 많은 재량권을 행사하였고 청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가 귀국하자 인조는 세자에게 전위를 강요당하거나 세자 대신 입조의 요구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는데 세자는 환국 후 두 달이 지나 병증이 나타난 지 3일 만에 34세로 급서하였습니다. 이후 강빈과 반목하던 세력이 “강빈이 인조를 저주하였다”고 무고하여 그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키고 왕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도 받게 되어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6년 3월에 사사되었습니다.

삼회대(三回帶)는 정원용이 1843년의 회갑연의 계묘회갑(癸卯回甲), 75세 되던 1857년의 결혼한 지 60년 회근례의 정사회근(丁巳回巹), 1862년의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되는 해의 회방례의 임술회방(壬戌回榜)을 할 때마다 둘렀던 허리띠입니다. 삼회는 장수하고 일찍 급제하고 부부가 해로해야 누릴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일로 정원용은 이 세 가지를 다 누린 인물입니다. 삼회대함은 광명시 향토사료관에 보관중이고 각대는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중입니다.

정원용은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시호는 문충(文忠)입니다. 1802년(순조 2)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검열, 대사간 등을 지내고 1821년 관서유위사로서 평안도의 민정을 살폈으며 1831년 동지사로 청에 다녀왔고,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승진한 뒤 이조판서를 거쳐 1841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영의정으로서 강화에 사는 덕원군 원범의 영립(迎立)을 주장, 철종으로 즉위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영중추부사, 총호사 등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았습니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정사를 맡아 보았으며,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으로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습니다.

▲안양의 만안교(萬安橋)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역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갈 때 삼막천을 편안히 건널 수 있도록 놓은 다리다.Ⓒ안양시

소래염전과 강희맹·하연의 유적들
시흥은 내륙 쪽엔 강희맹의 유적이, 바닷가 쪽은 애민정신을 발휘한 대규모 간척지와 일제의 강제수탈의 현장인 소래염전이, 소래산 아래에는 황희, 허조와 함께 세종 때의 명재상이라 일컬어지는 하연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관곡지(官谷池)는 강희맹이 1463년(세조 9)에 중추원 부사로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중국에서 돌아올 때 남경에 있는 전당지에서 연꽃 씨를 채취해 귀국한 후, 하중동 관곡에 있는 연못에 재배를 해본 결과 점차 널리 퍼질 수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안산의 별호를 1466년(세조 12)부터 ‘연성(蓮城)’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강희맹의 사위인 권만형의 집이 가까이에 있어 대대로 권만형의 후손 소유가 되어 관리 되어오고 있습니다.

안산군수 권용정이 쓴 <연지사적(蓮池事蹟)>에 보면 1845년 봄에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을 시켜 연못을 수리하고 나니 그 해 여름에 다행히 강희맹 선생이 심은 것과 같은 전당홍(錢塘紅) 두 줄기가 자라났다 합니다. 그래서 관곡지를 잘 관리하기 위해 다른 일체의 부역 없이 오직 관곡지만 관리하는 연지기 6명을 두도록 하고 이를 경기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이 여섯 명은 부역, 군역, 환곡을 면제받는 특혜를 받았고, 그것이 영구히 계속된다는 증명을 경기도 관찰사로부터 받을 정도로 관곡지 관리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만약 연지기에 결원이 생기면 해당 마을인 하중리의 백성 중에서 충원토록 하였는데, 이들에게도 역시 같은 혜택을 주었다고 합니다. 또 연지기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매를 쳤고, 큰 죄를 지으면 쫓아내어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도록 하였습니다.

강희맹 묘는 부인과의 합장묘이며 묘역 주변에는 양부(養父)인 강순덕(이숙번의 사위), 형 강희안, 장남 강구손, 손자 강태수, 증손 강복, 고손 강극성 등의 묘가 있고 입구에는 재사인 연성재(蓮城齋)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인석은 전형적으로 전기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공복을 입고 홀(笏)을 들고 있으며, 후기에는 금관조복에 홀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만 이곳의 문인석은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맞잡은 자세로 머리에는 이암(耳埯)식 모자를 썼고 몸체는 앞으로 조금 기울어져 상전의 분부를 기다리는 시자(侍者)의 공손한 모습을 잘 표현했습니다.

강희맹은 문신이자 농학자로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 본관은 진주입니다.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처 좌찬성 등을 역임했습니다. 저서에 <사숙재집> <촌담해이)> <금양잡록> <사시찬요초> 등이 있고, 시호는 문량(文良)입니다.

강희안은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 강희맹의 형입니다.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4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사섬서주부로 벼슬길에 올랐고 돈녕부주부, 이조정랑, 부지돈녕부사 등을 지냈습니다. 1443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1445년 최항 등과 더불어 〈용비어천가〉를 주해했고 1444년 신숙주 등과 같이 〈고금운회〉를 번역했으며, 1447년에는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참여했습니다.

사헌부장령, 지사간원사 등을 두루 거치고 14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으며 같은 해 정척, 양성지 등과 함께 팔도 및 서울의 지도를 제작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인수부윤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원종공신 2등에 봉해졌고 1456년에는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그는 관계하지 않았다는 성삼문의 진술로 화를 면하고 1463년 중추원부사가 되었습니다.

시, 그림, 글씨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 시·서·화의 삼절로 일컬어졌으나 문집은 전하지 않습니다. 글씨는 전서, 예서, 팔분에 두루 능하여 왕희지, 조맹부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1445년 세종이 보옥(寶玉)을 얻어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의 8자를 새겨 옥새를 삼았을 때 그 글씨를 썼으며, 1455년 주조한 을해자(乙亥字)의 글씨도 그가 썼습니다. 그림은 당시의 추세와 기법과는 다른 작품을 그렸는데 그의 그림은 흔히 송나라의 유용, 곽희에 견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화는 천한 기술이므로 후세에 전해지면 다만 이름에 욕될 뿐이다”라고 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호조벌엔 백성 구휼하려는 애민정신이...
호조벌은 시흥시 매화동을 포함한 10개동 약 456ha의 농토를 일컫는 말입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전국적으로 농토가 황폐해져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때 국가에서 바다를 막아 간척하여 농토로 만든 장소로, 선조들의 과학적 지혜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생명 나눔을 실천했던 애민정신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1721년(경종 1) 6조의 하나였던 호조(소속 진휼청)에서 간척사업을 담당했다고 호조벌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갯골생태공원은 내만 갯골과 옛 염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칠면초, 나문재, 퉁퉁마디 등의 염생 식물과 붉은발 농게, 방게 등 각종어류, 양서류가 서식하고 있으며 2012년 2월 국가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곳 소래염전 지역은 1934~1936년에 조성되었으며 갯골을 중심으로 145만 평 정도가 펼쳐져 있습니다. 당시 이곳 소래염전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소금은 수인선과 경부선 열차로 부산항에 옮겨진 후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우리 민족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소래산 자락에는 하연(河演)을 기리는 소산서원과 그의 묘역이 있습니다. ‘소래(蘇萊)’라는 지명은 당나라 소정방에서 유래됐습니다.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중국 산둥성의 래주를 출발해 덕적도를 거쳐 이 산에서 머물렀는데 그 뒤부터 소정방의 ‘소’자와 래주의 ‘래’를 합쳐서 소래산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소산서원(蘇山書院)은 문효공(文孝公) 경재(敬齋) 하연을 향사하는 곳으로 그의 묘 옆에 있습니다. 하연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21살에 벼슬에 올라 이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의 벼슬을 두루 거쳤습니다. 황희, 허조와 함께 세종 때의 명재상이라 일컬어지는데, 하연이 세상을 떠나자 1455년(세조 1) 소산재(蘇山齋)라는 재실을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고 1467년(세조 12)에 하연의 셋째아들 우명이 이곳에 영당을 세우고 소산재를 다시 지었습니다.

청주한씨 문익공파 묘역은 한준겸의 묘를 중심으로, 아들 한회일, 손자 한이성, 증손 한두상의 4대에 걸친 묘역입니다. 한준겸은 조선 중기에 호조판서를 거쳐 인조의 장인으로 서평 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한준겸의 시호가 문익(文翼)이므로 그의 후손들을 문익공파라고 합니다.

한준겸(韓浚謙) 묘는 회산부 부인 황씨와 합장이며 묘표는 1628년(인조 6)에, 신도비는 1629년(인조 7)에 세운 것인데, 묘역의 이장 이후 1652년(효종 3)에 효종이 내탕금으로 신도비를 중건하고 그 전말을 비문의 끝부분에 새겨 놓았는데 이정구가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김상용이 하였습니다.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芳山洞 靑瓷 白瓷 窯址]는 1991년 6월 국립중앙박물관과 경기도에서 이 지역에 대한 실사를 통해 고려 초기 청자요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학계에 알려졌으며 1997년 1차 발굴 조사가, 이듬해에 2차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조사 결과 요업 활동의 시기는 대략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사이로 추정되며 출토 유물은 발(대접), 완, 접시, 화형접시, 잔, 광구병, 유병, 주자, 호, 합, 벼루, 제기, 장고, 잔탁 등으로 약 95대 5 정도로 청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이 가마의 특징은 첫째, 중국 요지의 축조 방식인 벽돌로 축조되었으며 남한지역에서 발견된 가마 중에서 가장 양호한 벽돌가마로 평가됩니다. 둘째, 통일신라의 전통이 강한 도기질의 요업체계가 자기를 생산하는 요업체계로 바뀌는 현장이 확인됨으로서 한국의 청자와 백자 발생의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나말여초 시흥시 일대를 세력 하에 두었던 호족이나 세력가에 의해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관감당(觀感堂)은 1630년 인조가 경기감사에게 명하여 비 새는 집에서 청백리로 살던 이원익에게 지어준 집이다.Ⓒ광명시

정조의 능행이 남긴 사연들
안양과 시흥에는 정조의 능행과 관련된 유적이 많습니다.

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은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던 정조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1760년(영조 36) 사도세자가 온양 온천에 행차하면서 잠시 쉬어간 일을 기념하여 마중 나왔던 노인들에게 경기감사로 하여금 쌀을 나눠 주게 하고, 행궁을 지어 ‘사근참행궁’이라고 하였습니다.

사근참행궁은 시흥로와 과천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어 정조가 화성과 현륭원에 행차할 때 마다 이곳을 들렀는데, 특히 1795년 2월 10일과 15일에는 어머니 혜경궁홍씨와 함께 들러 수라를 들기도 했습니다. 행궁 대문에는 ‘주필행궁(駐蹕行宮)’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사근참행궁 터에는 기념비만 쓸쓸히 서 있을 뿐, 관련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시흥행궁(始興行宮)은 정조가 능행을 할 때 본래는 노량진에서 배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너 남태령 넘어 과천을 거치는 길이었으나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간여한 김상로의 형인 김약로 무덤이 과천 한우물 근처에 있어서 그곳을 피해 금천과 안양을 거치는 길로 바꾸었다 합니다. 이때 편안한 능행길을 위해 시흥에 114간 규모의 행궁을 설치하였습니다. 정조는 1795년 윤2월 9일, 2월 15일, 1797년 1월 29일, 같은 해 8월 19일에 시흥행궁에 머물렀습니다. 지금은 행궁은 없어지고 그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수령 830년 된 은행나무 세 그루가 서 있습니다.

안양행궁(安養行宮)은 정조가 능행을 위해 만안교를 가설하기 1년 전인 1794년, 안양리에 안양주필소가 당시 경기감사 서용보에 의해서 건립되었는데 이를 이릅니다. 주필소란 임금이 쉬어가기 위한 용도로 마련된 건물로 왕의 숙박을 위해서 만들어진 행궁과는 구별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행궁이라고 혼용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정조가 안양행궁에서 쉬어간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구 경찰서 뒤 동아아파트 자리에서 행렬을 멈추고 모친 혜경궁 홍씨에게 미음과 다과를 대접한 기록은 있습니다. 또 이곳은 수리산 끝자락으로 예로부터 밤나무 숲이 무성했던 곳으로 평촌의 들과 관악산이 잘 보이는 풍광이 좋은 곳이기에 정조는 능행과 환궁 시에 이곳에서 쉬어 간 기록을 남긴 것으로 생각되며, 마을 이름도 임금이 쉬어갔다고 해서 주접동(住接洞)이 되었습니다.

만안교(萬安橋)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역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갈 때, 삼막천을 편안히 건널 수 있도록 놓은 다리입니다. 처음에 나무로 다리를 놓았으나 1795년(정조19) 경기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역 끝에 돌다리를 완성하였습니다. 원래는 현 위치로부터 남쪽 200m 지점에 있었으나 국도확장사업으로 1980년 8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였습니다.

만안교 앞에는 축조 당시 세운 ‘만안교비’가 있는데 비의 뒷면에는 축조 담당자였던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글씨를 쓴 ‘음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음기’에는 돌다리를 축조하게 된 경위, 정조가 직접 다리의 이름을 지었으며 다리를 축조한 뒤 관련자에게 포상이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비의 앞면엔 유한지가 예서 대자로 쓴 ‘만안교’라는 다리 이름이 새겨져 있고 비의 측면에는 다리의 축조에 관여한 관리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유서 깊은 사찰들-삼막사·염불암·망해암·안양사
안양에는 유서 깊은 사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삼성산(三聖山)은 관악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팔봉능선을 따라 잇대어 솟아 있는데 신라의 고승 원효, 의상, 윤필 세 스님이 이곳에서 세 개의 초막을 짓고 수행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고려 말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양주 회암사에 주석하였던 지공, 나옹, 무학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였습니다.

삼막사(三幕寺)는 세 개의 초막 중 하나로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일막과 이막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습니다. 삼막사에는 몽골이 고려를 침범했을 때 삼막사 스님인 김윤후가 승병이 되어 용인 처인성 전투에서 화살로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를 사살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삼층석탑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달리 살례탑(撒禮塔)이라고도 부릅니다.

염불암(念佛庵)은 고려 태조 왕건이 창건했다는 유래가 있는데 이 때 이름은 안흥사(安興寺)로 곧 염불암의 시초로 전해집니다. 1407년(태종 7) 한양의 백호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기맥을 누르기 위해 왕명으로 사찰을 대중창했고 이후 계속된 중수를 거쳐 철종 때에 이르러 도인 스님의 칠성각 건립과 1992년 청봉 스님에 의해 요사체와 대웅전이 완공되며 그 위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선방 주변에 있는 조선시대 부도 중 마애부도 2점은 매우 특이한 형태로 부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경내에 있는 500년 된 보리수는 염불암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망해암(望海庵)은 <봉은사말사지>에 따르면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신경준이 지은 <가람고>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1803년(순조 3) 정조의 어머니 홍대비가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세종 때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오던 여러 척의 곡물선이 인천 팔미도 부근에서 풍랑을 만나 위태로울 때 스님 한 분이 홀연히 나타나 배를 안정시키고 사라졌는데 선원 일행이 스님의 거처를 물으니 관악산 망해암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망해암을 찾은 선원이 법당의 불상이 스님과 용모가 닮았다고 하였고 이를 전해들은 임금은 매년 한 섬씩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현재 망해암의 용화전에는 1479년(성종 10)에 조성된 석조미륵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안양사(安養寺)는 고려 태조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다 산꼭대기에 5색 구름이 드리운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곳으로 가던 중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양이란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현세의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 있다는 청정한 극락정토의 세계를 말합니다.

왕건이 세웠다는 ‘안양사’의 위치는 삼성산 중턱에 있는 지금의 안양사가 아니라 중초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옛 유유산업의 부지였던 중초사지에는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당간지주에 남아 있는 명문에는 ‘중초사’라는 사찰명과 ‘보력 2년(826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조각의 수법으로 보아 동시대의 석탑이 아닌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있는 옛 유유산업의 부지를 발굴조사하면서, 사찰의 흔적과 함께 ‘안양사(安養寺)’가 새겨진 명문기와 편과 신라 때의 유구와 유물, 조선시대의 기와 파편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발굴조사의 결과를 종합해 보면 통일 신라 때 창건된 ‘중초사’는 왕건에 의해 안양사로 변모하게 되고,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초까지 활용이 되다가 후기에 이르러 폐사지가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때 최영 장군이 칠층전탑을 세우고 왕이 내시를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전탑지에서 많은 전돌이 발굴되었으며 김부식이 글을 짓고 명필 이원부가 쓴 비문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11년(태종 11) 왕께서 충남 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던 중 안양사에 들렸다는 기록이 있고, 안양사와 관련한 많은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초사지 당간지주(中初寺址幢竿支柱)는 85cm의 간격을 두고 동, 서로 세워져있는데 중초사지라 함은 서쪽 지주의 바깥에 각자한 명문에 새겨져 있습니다. 6행 123자, 해서체로 쓴 명문에는 826년(신라 흥덕왕 원년) 8월 6일에 채석하여 그 다음해인 827년(흥덕왕 2) 2월 30일에 세웠다고 하는데 절 이름, 조성 시기, 참여자 명단 등이 새겨져 있는 유일한 당간지주입니다.

중초사지 삼층석탑(中初寺址三層石塔)은 고려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면에 두꺼운 지대석이 놓이고 그 위에 2단의 별석이 놓여 상층기단을 받치게 된 단층기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한 돌이며 상륜부는 전부 없어졌습니다.

석수동마애종은 중초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거대한 바위에 스님이 종을 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마애종입니다. 마애종의 형태는 건물의 들보에 쇠사슬로 연결된 종이며 음통과 정교한 용뉴 아래로 종신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신의 표면에는 유곽과 함께 타종 부분인 연화문의 당좌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매우 짜임새 있는 구성과 안정적인 균형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말여초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85cm의 간격을 두고 동, 서로 세워져 있는데 절 이름, 조성 시기, 참여자 명단 등이 새겨져 있는 유일한 당간지주다.Ⓒ안양시

국내 유일한 고려 후기의 백자가마터
안양에는 국내 유일한 고려후기의 백자가마터가 있습니다.

비산동도요지(飛山洞陶窯址)는 관악산 일대에 형성되었던 요지군(窯址群) 중의 하나로 11-14세기에 걸쳐 장기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곳에서 11세기경의 조질청자류(粗質靑磁類)와 11-12세기경의 조질철채도기(粗質鐵彩陶器), 흑유도기(黑釉陶器), 14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청자류와 고려백자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도자기의 다양한 발달상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백자는 용인 서리요지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발견된 것이며, 고려후기 백자의 양상과 조선백자의 성립과정을 밝힐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됩니다. 이 요지는 서울 근교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려 전·후기 청자요지이면서, 국내 유일의 고려후기 백자가마터로 우리나라 도자사(陶瓷史)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 5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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