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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감각의 식민지화

임종태의 '부시 일가의 영원한 제국' <5>

제5부: 21세기 묵시록: 인체감각 기관의 식민지화

노스트라다무스가 지구의 멸망을 예언했다는 지난 1999년. 래리&앤디 와쇼스키 형제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매트릭스>(MATRIX)가 세계 자본주의의 상징인 헐리우드를 강타했다. 영화 <매트릭스>가 이처럼 새천년에 펼쳐질 가상 현실 시대를 앞두고 사람들을 열광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스피디한 사건의 전개와 가공할 영상 이미지, 여기에 완벽한 싸운드 구축에 있었다. 특히나 시간을 정지시킨 채, 사물을 중심으로 공간을 이동시키는 듯한 순간 포착 기술인 ‘프로우모’ 기법은 마침내 영화와 3D 게임 산업의 만남을 가능케 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트릭스>의 스피디한 사건 전개와 화려한 액션, 완벽에 가까운 싸운드에 취해 정작 <매트릭스>를 통해 와쇼스키 형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에는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영화 도입부에서 컴퓨터에서 쏟아내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파묻혀 잠들어 있던 네오처럼. 그렇다면 영화 <매트릭스>의 내용보다는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현란한 형식(마야)에 취해 잠들어 있는 우리를 향해 “Neo, Wake up!” 하고 일갈하며, 와쇼스키 형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를 위해서라도 먼저 이 영화의 줄거리를 훑어보기로 하자.

때는 바야흐로 세계를 가동시키는 운영체계이자 세계 그 자체인 인공지능 컴퓨터(AI:Artificial Intelligence)가 지배하는 2199년. 인간들은 태어나자마자 인공 자궁에 갇혀 인공지능(AI)의 생명 연장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되고, 그들의 뇌세포에는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이 입력된다. 인간들은 매트릭스 프로그램에 따라 평생 1999년의 가상 현실을 살아간다. 인간이 보고 느끼는 것들은 항상 AI의 검색 엔진에 노출되고, 인간의 기억 역시 그들에 의해 입력/삭제된다. 하지만 다행히도 매트릭스 밖에는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가상 현실에서 깨어난 모피스와 그의 동료들이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인공지능과 싸우고 있다.

광케이블을 통해 매트릭스에 침투하고, 매트릭스 프로그램을 응용해 자신들의 뇌세포에 각종 데이터를 입력하는 모피스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과 함께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미륵)를 찾고 있다.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컴퓨터 프로그래머 토마스 앤더슨. 밤마다 ‘네오’라는 이름으로 컴퓨터를 해킹하는 그는 어느날 모피스로부터 매트릭스에 대한 단서를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매혹적인 여인 트리니티의 안내로 매트릭스 밖의 현실 세계를 경험한 네오는 가상 현실의 꿈에서 깨어나, 인공지능에 의해 양육되고 있는 비참한 인간의 현실을 확인하고 매트릭스로부터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처럼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와쇼스키 형제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화두는 제목 그대로 프로그램화된 가상 세계(마야)인 ‘매트릭스’다. ‘현실같은 꿈’과 ‘꿈같은 현실’. 장자가 말하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을 연상시키는 이 화두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가상 현실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는 오늘날, 이같은 기술의 진화가 멀지 않은 미래에 어떤 끔직한 결과를 초래할지 강력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매트릭스>는 불교 유식론에서 말하는 마야(환영)의 세계(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참 세계에 눈뜨게 되는 험난한 해탈의 과정의 현대판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불교 유식론적 관점에서 본 미래 정보화사회**

실제로 영화 <매트릭스>를 만든 와쇼스키 형제와 주연을 맡은 키아누 리브스는 불교적 세계관에 심취해 있다. 그런데 불교적 세계관을 집약한 유식론은 매우 정교한 인식론을 자랑한다. 그것은 모두 8식(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먼저 우리가 흔히 ‘5감’이라 말하는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 기관을 통한 인식을 의미하는 전5식. 다음으로 컴퓨터의 모니터처럼, 전5식을 통해 받아들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이루어진 5감의 데이터를 종합하는 오성 레벨의 제6식인 의식(意識-우리가 일상 어법에서 말하는 ‘의식’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처럼 주어진 데이터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자의식 레벨의 제7식인 마나(末那)식. 마지막으로 전7식까지의 의식 작용이 축적(薰習)되어 저장되는 후천획득 형질 레벨의 제8식인 아라야(種子)식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 기관으로 이루어진 전5식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에게 프로그래밍된 선천획득 형질이다. 우리는 이처럼 선천적으로 주어진 5감을 통해 세계를 만나고, 5감을 통해 획득한 정보의 축적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거기에 적응해 살아간다. 그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제6식인 의식과 제7식인 마나식이다. 그리고 이처럼 전7식을 통해 우리 몸 안에 축적된 기억이나 습속 등 후천획득 형질(정보)은 제8식인 아라야식에 영향(薰習)을 미치고, 아라야식은 다시 우리가 전7식을 통해 바라보는 대상 세계의 제법을 출현시키는 상호변증법적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인류 역사가 유럽에서 발생한 산업혁명을 계기로 초기 자본주의 체제로 들어서던 시절만 하더라도, 자본은 대량상품의 판로 개척을 위한 해외 식민지 건설이라는 다소 낭만적으로까지 느껴지는 탐험 정신을 빌은 제국주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구상에서 더이상 새로운 식민지를 찾지 못한 자본은 마침내 오늘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식민지화하는 새로운 제국주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고 있다. 클로닝으로 상징되는 생명공학의 탈을 쓴 인체 식민지화와, 헐리우드 영화와 TV로 대변되는 영상 매체를 통한 인체 감각기관의 식민지화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자본이 만들어내는 인체 감각기관의 식민지화는 정교한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힘입어 어느새 불교 유식론에서 말하는 마야 세계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미래 정보화 사회의 진화 방향은 우리의 5감을 사이버상에서 구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무성 영화를 계기로 시각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졌고, 193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유성 영화를 통해 시각과 청각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흑백에서 칼라로 전환된 오늘날, 우리는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TV와 영화를 통해 사회와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여기에 무서운 속도로 진화해가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조만간 후각이 교환될 수 있을 것이고, 다음으로 미각과 촉각이 추가될 것이다. 더구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집안의 TV나 컴퓨터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유선 코뮤니케이션 기능은 ‘IMT2000’ 이라는 가공할 무선통신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미 무선 핸드폰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시각과 청각만 전달되는 핸드폰의 액정 모니터를 통해 머지 않아 후각과 미각, 촉각이 전달될 수만 있다면, 인류는 더 이상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고 5감을 통해 상대방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완벽한 가상 현실의 세계에 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 <미션 임파서블II>에서처럼, 핸드폰과 컴퓨터는 점차 안경에서 보내는 신호를 시신경을 통해 전달받는 특수 안경 형태로 진화될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과거 프로이트가 인간의 의식의 영역을 무의식으로까지 확장시켰다고 한다면, 오늘날 자본이 만들어내는 가공할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에서의 체험 구조, 다시 말해 5감을 통한 가상 체험(꿈) 구조를 현실화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점을 탁월하게 그려낸 것이 바로 영화 <매트릭스>다.

***방송의 주체생산화 혹은 방송의 매트릭스**

하지만 매트릭스는 비단 헐리우드 영화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매트릭스는 5감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완성될 멀지 않은 미래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인식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시각과 청각이라는 감각 기관의 식민지화에 성공한 자본은 이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방송을 통해 우리의 일상 생활과 가치관을 프로그래밍(통제)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아무런 생각없이 꾸는 꿈의 내용조차 무의식의 일정한 통제 속에 이루어진다고 갈파한 프로이트의 말처럼.

실제로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시청하는 TV 프로그램들은 이미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특권층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나 9.11 테러와 아프칸 침공,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이라크 침공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뉴스 보도에 있어서는 더더욱. 예컨대 테러 분자들에게 납치되어 펜실베니아 숲 속에 추락한 4번째 비행기는 당시 정황으로 보아 미군에 의해 격추되었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CNN을 비롯한 미국의 메이저 방송들은 이에 대해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사건 초기 몇몇 방송사에서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탑승객들이 테러범에 맞서 싸우다 추락된 것처럼 호도하기까지 했다.

반면, 테러에 의한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를 다루는 그들의 태도는 이와는 정반대였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붕괴 직전 높이 417m의 빌딩에서 몸을 던져 뛰어내리는 뉴욕 시민들의 처참한 모습과 팔레스틴 일부 지역에서 총을 쏘며 환호하는 모습을 대비시켜 하루에 수십번 아니 수백번 반복해서 틀어주는 효과는 너무도 명확했다(이 화면은 조작된 것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아랍인으로 보이는 사람만 보면 붙잡아 패고, 총을 갈기고, 이슬람 사원을 방화하는 극단적 증오감을 유발시킨 것이다. 그들이 교회에서 경배드리는 예수님이 아랍인이란 사실도 까맣게 잊을 정도로. 오죽하면 이같은 증오감을 유발시킨 부시가 성명을 발표하고, 이슬람 사원 현장을 찾아가야만 했을까?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같은 미국의 보도 행태가 걸프전에서는 정반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번 이라크 침공에서도 마찬가지지만, 12년전 CNN을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가히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 놀이처럼, 아름답고 신기해보일 정도로 화려했다. 적어도 그 끔직한 폭격 현장을 체험할 수 없는 외국의 시청자들에게는. 하지만 실상은 어떠했던가? 그들이 이라크의 군사기지라고 폭격을 퍼부은 지하 벙커는 다름아닌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위한 피난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CNN을 비롯한 미국의 방송은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만 전쟁의 상흔으로 인한 피의 복수의 맹세가 이미 그들 가슴 속에 뿌리 깊게 새겨진 몇 개월 뒤에야 조용히 이 사실을 보도했을 뿐.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9.11 테러를 바라보는 미국 어린아이들의 눈이었다. 아직 방송에 세뇌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은 이 사건에 대해 그동안 방송에서 다루기를 꺼려왔던 너무도 명백한 질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것은 “왜 하필이면 미국인가?”하는 문제였다. ABC 뉴스의 메인 앵커로서 미국민으로부터 가장 신뢰를 받는 피터 제닝스가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9.11 테러가 그동안 전세계, 특히 아랍 세계에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킨 미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리액션(반응)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실제로 9.11 테러의 배후 인물로 알려진 빈 라덴, 현재 미군이 침공중인 이라크의 후세인, 파나마 침공을 불러일으킨 노리에가 등은 모두 CIA가 자신들의 정치공작을 달성하기 위해 키운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11 테러 당시, 부시는 테러의 배후 인물로 빈 라덴을 지목하며 그를 비호하는 아프간을 피의 보복으로 응징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는 판국에. 나중에야 정신을 차린 부식가 30억 달러에 달하는 식량 원조을 약속하며 탈레반 정권과 아프칸 국민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취했지만, 이 역시 그들의 효율적인 아프칸 침공을 위한 전술의 변화였지, 아프칸 난민에 대한 인도적인 차원의 배려가 아니었다.

***네트워크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이쯤되고 보면, “네트워크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그리 낯설지만도 않게 들린다. 실제로 9.11 테러와 아프칸 침공, 그리고 현재 진쟁중인 이라크 침공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권력의 시녀로 존재하던 방송은 이제 바야흐로 절대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게다가 방송은 가히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일상 생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우리의 일상 생활과 가치관을 통제한다. 그것도 ‘on air’라는 말이 시사하듯, 우리가 매일 접하는 공기처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것을 ‘방송의 주체생산화’라고 부르면 어떨까.

실제로 일상 생활과 관련해 이제 우리는 TV를 떠나서는 조금도 생활할 수 없을 만큼 이 ‘바보상자’에 너무 익숙(중독)해져 있다. 생각해보라. 갓 태어난 아이는 엄마의 젖무덤에서부터 TV에서 흘러나오는 CM송을 들으며 자란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TV에서 방영하는 포켓몬과 디지몬을 보며 자란다. 아니 유치원에서조차 ‘TV 유치원’을 따라하는 실정이니 유치원 교육도 TV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표현일 게다. 이어서 들어가는 초등학교 교육은 방과후 집에서 보는 TV 만화 영화가 대신한다. 그리고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위성 교육방송이 수업을 대신하며, 채널V나 MTV, 또는 TV의 가요 프로그램이 그들의 정서를 장악한다.

그렇다면 교양인의 배움터인 대학은 좀 다를까? 물론 다르다.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방송을 통해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던 대학생들은 이제 ‘주체적’으로 드라마나 연예인 스캔들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자랑하며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교양 실력’을 유감없이 뽐낸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반이 되면, 이제 자신이 동경하던 스타의 반열로 진입하기 위해 물불을 안가리고 방송국을 향해 돌진한다. 하지만 결과는 과속으로 인한 ‘충돌 사고’. 알고보니 나처럼 방송국을 향해 돌진하는 ‘폭주족’들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이처럼 과속 충돌로 인한 ‘쇼크’를 통해 방송에 대한 환상에서 겨우 벗어날 즈음, 마침내 TV는 ‘만득이 씨리즈’에 나오는 유령처럼, 거대한 맘몬의 진면목을 드러내며 우리를 향해 이렇게 조소한다.

***"만득아! 만득아! 내가 아직도 ‘바보상자’로 보이니? 히히히··· ”**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정보화 시대를 맞아 점차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의 형태로 진화되고 있는 방송은 프로그램(매트릭스) 송출 수단으로 끊임없이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공지능의 에너지는 인간 자체였지만, 현실 속에서 방송 프로그램을 송출시키는 것은 다름아닌 석유다. 어디 그뿐인가? 전철과 버스, 자동차 등 교통수단과, 핸드폰, 컴퓨터, 인터넷, TV 등 생활 필수품, 그리고 이같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주택, 병원 시스템 등 우리 생활에 필요한 어느 것 하나 기름없이 굴러가는 게 없다. 석유는 이처럼 인류의 욕망(탐욕)을 충족시켜주는 기저로 작동하고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이것이 현재 중동의 석유를 놓고 미국 vs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열강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이라크전의 실체다. 하지만 인류는 반만년의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진리를 터득해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탐욕은 파멸을 통해서만 자신의 허기를 채우는 못된 습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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