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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세계를 투시할 수 있다면…"

김민웅의 세상읽기 〈197〉

만일 땅 속을 투시하거나 그곳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땅 위의 변화가 어떤 경로를 거쳐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닿을 듯이 키가 높은 나무가 흙 속 깊은 곳에서 빨아올리는 미세한 물소리를 듣거나 또는 뿌리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혈관처럼 천천히 뻗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동물 들이 지온(地溫)이 변하면서 하나둘 씩 몸을 푸는 광경도 목격하게 될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 샘물이 터져 나올지도 알아 볼 것이며 광맥이 어디에서 어디로 굴곡지게 흐름을 타고 있는지도 이내 짚어낼 것입니다.

비가 내리면 그것이 어떻게 대지를 적시고 스며드는지도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을 것이고, 눈으로 덮인 산하(山河)와 지구의 중심에서 일고 있는 불길도 함께 감상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게다가 바람에 날려 온 멀고 먼 저 이국의 어느 씨앗 하나가 집 뜰 안마당의 한 구석 흙 밑에서 어떤 몸짓을 하면서 외로운 타향살이를 작정하고 나섰는지도 투명하게 알아 볼 것입니다.

포화(砲火)로 무너진 도시의 지하에서도 여전히 새롭게 솟아오르는 생명의 속살거림과,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밤에도 분주하게 지상과 지하의 세계를 오가며 움직이고 있는 미물들의 행렬도 아무런 단절 없이 포착할 수 있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오랜 세월 동안 궁극적으로 모색해 온 바는 바로 이 지하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그건 감추어져 있고 빛이 통과하지 않으며 또한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상의 현실은 그곳에서 시작되는 법이며, 그곳은 따라서 모든 것의 기원을 품고 있다고 할 만합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까닭은 보이지 않는 이 지하의 은폐된 세계가 펼쳐 보일 진상에 대한 나름의 짐작이 있어서입니다.

신화의 세계에서 누군가는 실타래 하나 들고 한번 들어가면 출구를 파악할 수 없는 미로(迷路)의 지하 동굴로 내려갔으며, 근대과학의 시절이 도래하면서 어떤 이는 마음의 광맥을 따라 시간으로 축적 형성된 지질탐사를 떠났습니다.

역사의 지층 밑바닥을 파 들어간 이들도 있었습니다. 지상의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힘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었고, 그러다가 정말 지하에 수백 년 수천 년 아무도 모르게 버려져 있던 삶의 도도(滔滔)한 흔적들을 발견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건 모두 우리가 땅 속을 투시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벌인 일들의 결과입니다. 본래 지하의 세계는 출구를 종잡을 수 없는 미로이며, 시간에 따라 다른 기억들을 품은 지층이 쌓여 있기 마련이고 지상의 세계와 다를 바 없이 곳곳에 생명의 혈관과 삶의 근거지가 이리저리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건 마치 지상의 세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결국 하나의 생명이 숨쉬고 살아가는 총괄적 체계임을 깨우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현실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좌절한다든가 또는 기대했던 변화가 일어난다고 판단하고 너무 가볍게 들뜬다든지 아니면 오해로 쌓인 분노를 쉽사리 뿜어내는 것도 땅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무지와 관련이 있을지 모릅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도 그의 표정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봄이 문을 여는 입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추위는 도리어 매서운 기세를 하고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봄의 기운은 눈에 띄지 않고 그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입춘은 그걸 보라는 것이 아니라, 저 지하의 깊고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떨림에도 민감해지라는 권고인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다보면 또 압니까? 어느 날, 우리에게 행복이 저장되어 있는 땅 밑을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날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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