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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남북정상 비밀협상' 알고 DJ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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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남북정상 비밀협상' 알고 DJ 압박

임종태의 '부시 일가의 영원한 제국' <1>

***부시 일가의 영원한 제국:
포스트 9.11, 그 '신세계 질서'를 말한다**

정보화 시대의 새로운 제국주의의 출현인가? 2003년 3월 17일 밤 8시(현지시각), 백악관의 조지 W. 부시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48시간 이내 사담 후세인이 퇴진하지 않으면 이라크를 무력 침공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교황을 비롯해 그동안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등 국제 사회의 UN을 통한 평화적 해결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오히려 UN의 무능력을 비난하며 이라크에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로써 1945년 창설된 UN은 사실상 국제사회에서 존재 의의를 상실했으며, 새천년을 맞아 인류는 다시 한번 정보화 시대의 신제국주의의 출현이라는 기이하면서도 가공할 현상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교황을 비롯한 전세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시 정권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세기 동안 쌓아온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과의 선린 관계와, 전세계에 쌓아온 선린 우방의 이미지를 포기하면서까지 미국으로 하여금 이라크 침공에 매달리게 만든 것일까? 더불어 9.11 테러 당시만 해도 "우리는 이제 모두 미국인이다"라고 외치면서까지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던 프랑스는 대체 어떤 연유에서 국가의 명운을 걸면서까지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에 맞서고 있는 것일까? 이같은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흔히 '부시 독트린'으로 알려진 부시 정권의 신세기 패권 전략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부시 일가가 꿈꾸고 있는 '영원한 제국'의 실체를 밝히도록 한다. 필자주

***제1부: 걸프전 이후 등장한 미국의 신세기 패권전략**

1991년 1월 16일, 당시 미국의 대통령 조지 W. 부시 시니어는 6개월 전에 있었던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을 문제삼아 UN의 다국적군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03년 3월 19일, 현 미국의 대통령 조지 W. 부시 주니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라크 침공에 들어갔다. 아들의 침공이 아버지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면, UN 안보리의 승인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쯤 되고 보면, 굳이 불교의 '인연'이라는 용어를 빌리지 않더라도, 사담 후세인과 조지 부시 부자간의 인연은 참으로 기묘한 악연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12년전인 1991년 조지 부시 시니어는 걸프전에서 UN의 다국적군과 함께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작전명 '사막의 폭풍'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중동 사막에 거센 '팍스 아메리카나'의 폭풍을 일으키며. 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귀환한 걸프전 참전 미군들은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 카 퍼레이드를 펼쳤다. 그와 더불어 걸프전 참전 69만 가운데 7만이 세균에 감염된 것으로 알려진 '걸프전 증후군' 등 참전 병사들의 후유증은 승리에 도취된 미국민의 환호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실제로 걸프전 참전 미군들의 퍼레이드가 끝난 후, 조지 부시는 91% 라는 폭발적인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같은 지지에 힘입어 부시는, 구소련 연방 붕괴 후 세계 유일의 패권 국가로 떠오른 미국의 신세계 패권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다름아닌 '폴 월포위츠 독트린'이다. 조지 부시 주니어 정권 들어 흔히 '부시 독트린'으로 불리는 이 정책은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그의 부친인 조지 부시 시니어의 요구로 현 미국방 부장관인 폴 월포위츠(Paul Wolfwitz)가 작성한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다.

당시 폴 월포위츠는 소련 연방이 해체된 상황에서 향후 미국 중심의 세계 패권구도와 관련해 두가지 잠재적 위협에 대해 준비해왔다. 하나는 러시아나 중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역사적으로나 혹은 멀지 않은 미래에 미국과 라이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경쟁 국가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향후 5-10년 안에 핵이나 기타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함으로써 미국의 패권 전략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 예컨대 이라크, 이란, 북한, 리비아 등 소위 '불량 국가'(rogue state)들이었다.

먼저 잠재적 경쟁국가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월포위츠가 내세운 것은 'reassurance' 정책이었다. 'reassurance' 정책은 전세계 분쟁 지역에 배치된 미군의 항구적 주둔을 통해 세계 경찰 국가를 자처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의 군사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안전 보장을 미끼로 잠재적 경쟁 국가들을 점차 무장해제시킴으로써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과거 미국의 핵우산 정책이나 조지 W. 부시 정권 들어 새롭게 등장한 MD는 이같은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일본은 그 전형적인 수혜자였다.

둘째, 미국의 일방주의에 저항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기존의 preemptive war 정책에서 탈피해 새로운 preventive war 정책을 수립했다. preemptive war 정책이란 지난 62년 쿠바 봉쇄에서 보듯이, 적이 공격이 명백한 경우 선제 공격을 통해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반면 preventive war 정책이란 향후 5-10년 이내에 미국의 패권 전략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을 '불량국가'(rogue state)로 지목하고, 예방 차원에서 그 위험성을 사전에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조만간 핵과 대량 상살 무기를 보유할 가능성이 높은 이란, 이라크, 북한을 3대 '악의 축'으로 몰아가고, 이라크 침공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현 부시 정권의 행태는 그 전형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1992 대선에서 명암이 엇갈린 조지 부시와 클린턴**

하지만 세계 유일의 패권 국가를 꿈꾸던 조지 부시의 꿈은 지난 1992년 대선에서의 실패로 좌절되고 만다. 그와 더불어 미국의 신세계 패권 전략을 담은 '폴 월포위츠 독트린'은 폐기되는 듯했다. 걸프전 직후 91%의 지지율을 보이던 부시는 이듬해인 1992년 대선에서 이제 겨우 40대의 애송이인 클린턴에게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인 아칸소 주지사 출신의 '풋내기'에게. CIA 국장과 부통령, 대통령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부시로서는 커다란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칸소 주지사 출신의 풋내기 클린턴은 세련된 매너와 국제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IT 세력을 새롭게 창출하며 금융.정보화 시대를 주도함으로써 1996년 재선에 무난히 성공한 것이다. 조지 부시가 록펠러 계열의 석유 산업과 군산복합체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면, 클린턴은 유대인이 장악한 월가 금융 마피아의 지지 속에 새롭게 미국의 주류로 떠오른 IT 세력과 강한 연대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1996년 대선 당시 클린턴의 런닝 메이트인 앨 고어는 '정보 고속도로'를 주창한 IT 신봉자였다.

클린턴 정권이 들어설 때만 해도 굴뚝 산업의 활력소 정도로만 여기던 IT 세력이 1996년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자 부시를 비롯한 공화당의 위기 의식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MS의 빌게이츠'로 상징되는 IT 세력은 어느새 굴뚝 산업을 제치고 무서운 속도로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클린턴의 재임 당시 남미와 동아시아들 휩쓴 IMF 프로그램은 다름아닌 금융과 IT의 결합이 만들어낸 괴물이었다). 친 민주당 성향인 이들 IT 세력을 향후 공화당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면,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공화당은 자신의 존립 기반 자체를 상실할지 모르는 위기 상황이었다. 더구나 2000년 대선의 민주당 후보는 'IT 전도사'로 알려진 앨 고어였다.

지난 2000년 대선이 미 선거 사상 초유의 재검표 사태를 초래할 정도로 부정 투표로 얼룩진 이면엔, 이처럼 군산복합체와 석유 산업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공화당과 부시 일가의 절박한 위기감이 있었다. 클린턴에 의해 자신의 꿈을 접어야만 했던 조지 부시 시니어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통해 부활을 노린 것이다. 자신의 핵심 참모인 제임스 베이커와 딕 체니(Dick Cheney),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H. Rumsfeldt)에게 아들 선거 캠프의 진두지휘를 맡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IT 세력을 공화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부시의 선거 캠프가 내놓은 카드는 지난 2000년 미 대선에서 주요 이슈로 부상한 국가미사일방어(NMD) 시스템이었다. NMD는 레이건 정권 시절의 이른바 '스타워즈'(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적국의 ICBM이 미본토에 도착하기 전에 위성을 통해 위치를 파악해 지상 미사일로 요격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TMD(Theater Misslie Defense)는 외국 주둔 미군과 우방을 보호하기 위해 중.단거리 미사일 요격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는 것이 미국이 한반도 주변 지역에 배치하려는 바로 TMD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부시는 지난 98년 북한이 발사한 대포동1호를 핑계로 유권자들에게 NMD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기존의 군산복합체에 IT 기술을 접목시키려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것이었다. 고어보다 50만표 가량 뒤진 것으로 알려진 조지 부시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이면엔 이처럼 군산복합체의 지원을 받는 부시 일가와 공화당의 목숨을 건 도박이 있었다. 조지 W. 부시의 동생인 젭 부시가 주지사로 있는 플로리다 주의 부정 선거는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 결과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아들 존 퀸시 애덤스가 1825년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최초로, 텍사스 주지사 출신의 조지 W. 부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는 영광을 얻었다.

***부시 정권의 MD 전략에 정면 대응한 남북 정상**

그런 까닭에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부시는 자신의 본업인 NMD 세일즈를 자처하고 나섰다. 물론 그것은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해밍 무드를 맞고 있던 한반도에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부시의 NMD 세일즈의 첫 외교 무대는 오키나와에서의 G7 정상회담이었다. 하지만 G7 회담은 애숭이 부시에게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푸틴은 부시가 NMD를 주장하는 근거를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G7 회담 직전에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로부터 "당분간 장거리 미사일 개발 계획이 없다"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부시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G7 정상회담에서의 쇼크가 채 가시기도 전에 부시는 다시 한번 푸틴으로부터 결정적인 카운터 펀치를 맞게 된다. 2001년 2월말, 한국을 방문한 푸틴이 DJ로부터 NMD의 걸림돌인 ABM 조약 지지 선언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시는 DJ의 AMB 지지 표명을 단순한 외교적 실수가 아닌, 오키나와에서의 G7 정상회담 직전 북한 김정일의 "당분간 장거리 미사일 개발 계획이 없다"는 표명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했다. 다시 말해 부시는 일련의 사건을 6.15 공동 선언을 계기로 남.북 정상이 단합해 자신의 MD 정책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남북 정상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한 부시에게 이제 남은 것은 미국의 완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난 2001년 7월, 우리 언론에 대서특필된 안기부 문건 유출 사건과 DJ의 방미 기간에 발생한 "this man" 논쟁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연합통신에 따르면, 당시 국정원 감찰실에서는 대북 정책의 핵심을 맡고 있는 안모 과장이 CIA 요원인 윤모 씨에게 대북 관련 정보를 제공한 사실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정보 유출이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자, 당시 국정원은 유출된 정보가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국정원의 이같은 주장은 이후 국정원이 보여준 행동과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먼저 국정원이 외국정보기관 요원에게 정보를 누설한 혐의로 직원을 파면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국정원은 그 사건과 관련해 안씨와 접촉한 CIA에 유감을 표명하고 재발방지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사건의 당사자인 윤모 씨를 출국시키고 재발방지를 약속함과 더불어, 한국에 파견된 CIA 요원들에게 "국정원 요원과 공식 업무 외에는 접촉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처럼 한·미 정보기관이 서로를 불신하고 접촉불가 지침을 내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1977년 코리아 게이트 이후 처음이었다.

게다가 당시 국정원의 대북전략국의 안모 과장이 한국계 CIA 요원 윤모씨에게 넘긴 것으로 알려진 대북 관련 문건은 DJ와 김정일 사이의 비밀 협상 내용으로 핵심적인 사안은 남북한 사이의 '평화선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DJ의 방미 직후인 2001년 3월 14일, 요미우리 신문은 미정보기관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이 5월에 이루어지며, 이때 남북한은 평화선언을 발표하기로 합의하고, 이미 수차례에 걸쳐 초안을 작성해 서로 교환해왔다"고 보도했다. 이는 유출된 안기부 문건이 적어도 3월 이전에 미정보기관에 들어갔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국정원 정보 유출 사건으로 출국당한 CIA 요원 윤모씨를 만난 것으로 알려진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평화선언은 평화협정과 달리 휴전 상태가 종전 상태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휴전협정을 아예 휴지조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했다. 다시 말해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한 DJ는 현재의 휴전 체제를 종전 체제로 바꿔 향후 남북 관계에서 미국을 배제하고 남.북 당사자가 협상의 주도권을 갖기로 김정일과 합의했다는 것이다. 지난 2000년 6월, DJ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 당시, 전세계 언론으로부터 궁금증을 자아낸, 김정일의 리무진에서 남북 정상이 주고받은 밀담의 주된 내용도 이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CIA 요원 윤모 씨로부터 입수한 안기부 문건을 통해 DJ와 김정일 사이의 비밀 협상 내용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부시는 이를 근거로 2001년 3월 미국을 방문한 DJ를 거세게 몰아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97년 대선 과정에서 DJ가 정권을 창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국의 입장(IMF 구제금융신청)을 상기시키며. 사실 이 점이야말로 DJ 정권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아킬레스건이었다.

당시 우리 언론에서는 이같은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를 단순한 "this man" 논쟁으로 몰아붙이며 부시 개인의 인격을 문제삼았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부시의 무례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국정원의 정보 유출로 인해 부시 앞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꼴이 되고 만 DJ의 난감하기 짝이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계속>

***필자 소개**

필자인 다큐멘터리스트 임종태(echorhim@hanmail.net)씨는 EBS 특집 <한국 호랑이, 그 흔적을 찾아서>, KBS 5.18 20주년 특집 <광주항쟁, 그후 20년> 등을 제작했고, 2년전부터 북미 관계를 취재해오면서 월간 말지와 월간 중앙을 통해 꾸준히 활발한 기고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1년 말, 본격적인 미디어 비평서인 <스타메이커>(창작시대)를 출간한 데 이어, 최근 북핵 위기를 둘러싼 국제 정세와 노무현 정권의 해결 방안을 다룬 단행본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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