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은행들은 금리가 싼 일본 엔화를 빌려 이자놀이를 해왔다. 일본에서 연 0.7~0.8%로 싼 자금을 빌린 뒤 국내에서 최고 연 3.5%의 금리로 빌려주며 짭짤한 '이자 차익'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원.엔 환율이 급등하면서 시중은행들에 비상이 걸렸다. 원.엔 환율은 지난달 만해도 1백엔당 9백80원대였으나 11일 1천60원대로 치솟아 16개월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원화가 약세를 보이자 엔화로 대출해간 기업들이 엔화 대출에 대한 원리금 부담이 커지면서 만기가 도래하는 하반기까지 환율이 불안정할 경우 부실채무가 양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역으로 '환 차손'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11일 금융계에 따르면, 현재 우리은행, 기업은행, 하나은행, 한미은행, 신한은행 등 시중은행 대부분이 10억달러 안팎의 엔화대출잔고를 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은행의 경우만 김정태 행장의 엔화 대출 취급금지 조치로 엔화대출잔고가 경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은행들의 무분별한 엔화대출에 대해 지난해말부터 금융 전문가들은 “금리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엔화 대출을 받았다가 자칫 예기치 못한 환율 변동으로 엄청난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경고해 왔다.
1백엔당 9백80원의 환율에서 엔화 1억엔을 대출받은 국내 기업은 환율이 1백엔당 1천20원을 넘어설 경우 앉아서 4천만원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기준 엔화대출액은 76억8천만달러 규모이며, 이 중 70억달러 정도의 대출이 지난해 이뤄졌다. 지난해 엔화 대출의 60% 이상이 개인사업자(소호)를 포함한 중소기업인 것으로 알려져 영세한 사업자들에게 이같은 환차손은 심각한 타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원.엔환율 1천원(1백엔 기준)선에서 엔화대출을 받은 기업들은 아직 손해를 보고 있지 않지만 1천원선 밑에서 엔화를 빌어 쓰는 기업들은 손해가 나고 있다는 게 한은의 분석인 것이다.
외환시장에 따르면 이처럼 원.엔 환율이 급등하고 있는 것은 외국인투자자들이 북핵관련 위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그동안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던 경제 펀더멘털에 대한 평가가 메리트를 잃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수출시장에서 70% 품목에서 경쟁관계에 있어 외환당국은 가급적 원.엔 환율을 1백엔당 1천원선에서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으나, 최근 약세를 보이는 달러에 대해 엔화가 강세를 보인 반면 원화는 약세로 돌아서 이 균형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지난 98~2001년 1백엔당 평균 1천50원이었던 원.엔 환율은 지난해 우리 경제가 견실한 성장을 한 영향으로 9백80원 수준까지 떨어졌으나 올들어 다시 미.이라크 전쟁에 이어 북핵 문제가 부각되면서 다시 이 수준으로 치솟았다"며 파장을 우려했다.
또다른 시장관계자는 "북핵위기외에 최근 SK의 분식회계를 계기로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신인도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는 점도 원화 약세의 주요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처럼 환율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11일 정부는 금융정책협의회를 열고 “외환시장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필요할 경우 적절한 대책을 내놓겠다”고 시장개입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북핵위기와 국내기업 신인도라는 근본원인에 대한 처방없이 시장개입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당분간 금융불안은 계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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