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프로그램 포기를 요구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북한을 압박해온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돼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편으로는 북한 핵 프로그램 동결을 외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에 핵 시설을 파는 활동에 관여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럼즈펠드 장관은 지난 90년부터 부시 미행정부의 국방장관으로 취임하기 전인 2001년 2월까지 스위스에 본부를 둔 스위스-스웨덴 합작 다국적 엔지니어링 기업 ABB의 이사였다. 그런데 지난 2000년초 북한과 2억달러 규모의 원자력발전소 건설장비와 서비스 공급 계약을 맺은 회사가 바로 ABB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시 행정부를 곤혹케 하고 있는 것이다.
***럼즈펠드의 두 얼굴**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최근호는 “럼즈펠드가 98년 미 의회 탄도미사일위협 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은밀히 ABB의 이사를 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밝히면서 “그로부터 2년 뒤인 2000년 ABB가 북한에 2개의 원자력 발전소 납품 계약을 맺었을 때도 럼즈펠드는 ABB의 이사였다”고 폭로했다.
에너지전문가 아나 오릴리오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ABB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폐기물은 핵폭탄 제조에 사용될 수 있다” 고 지적했다.
럼즈펠드 장관은 지난 98년 미 의회 ‘탄도미사일위협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 체결한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퍼부었던 인물이다. 당시 이 위원회는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비롯해 대량파괴 무기개발 계획을 여전히 추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면서 “클린턴 행정부는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클린턴을 몰아부쳤었다.
현재 럼즈펠드 장관 밑에서 부장관을 하고 있는 폴 월포비츠도 당시 북한의 핵 프로그램 동결 대가로 2개의 경수로를 제공하기로 한 94년 제네바 합의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었다.
이처럼 현재 럼즈펠드가 이끄는 국방부는 북한에 대해 어떠한 양보도 있을 수 없다는 강경파들이 득세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럼즈펠드가 원자력발전소 부품을 북한에 판 기업의 이사였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백악관과 ABB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백악관과 ABB 당황, 자료공개 거부**
백악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자 ”럼즈펠드 장관은 ABB 이사로 있을 당시 원자력 발전소 계약건이 이사회 안건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다며 즉답을 회피하고 있다.
볼프람 에버하르트 ABB 대변인도 “럼즈펠드가 ABB 이사로 활동한 지난 10여년간 그는 거의 모든 이사회에 참석했다”면서도 “럼즈펠드가 대북 원전계약 체결에 관한 인지하고 있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이사회 의사록을 공개하지 않는 원칙 때문에 논평할 수 없다"고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북 원전 건설공사 수주가 이사회의 의제로 상정됐을 수도 있으나 당시 ABB는 약 10억 달러 규모의 수주를 확보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은 대북 원전 건설 문제는 이사회의 논의를 거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교묘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ABB는 북한과 계약을 체결한 4개월 뒤 영국핵연료공사(BNFL)에게 원전건설 사업부문을 5억달러에 매각했으며 럼즈펠드는 2001년 2월 부시 행정부에 입각하게 되면서 ABB를 떠났다.
이번 럼즈펠드 파문은 부시 행정부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건으로, 앞으로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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