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학자, 서울해설가) 제76강은 서울학교가 새로 개척한 답사 코스로,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년)가 단종과 애절한 이별을 하고 평민 송씨로 신산스런 삶을 살다 간 역사의 현장인 동망봉(東望峰, 95m) 등을 돌아봅니다. 동망봉은 성북구 보문동과 종로구 숭인동에 걸쳐 있는 동산으로, 청룡사 동쪽에 솟은 산봉우리입니다. 또 성북구 안암동의 개운산(134m)은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의 개운사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개운산이 품고 있는 문화 유적들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울학교 제76강은 2019년 5월 12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시 성북구 돈암1동 미아리고개 구름다리 위에서 모입니다.[서울지하철4호선 또는 우이신설경전철 성신여대역 1번출구에서 버스를 갈아타든가 걸어서 10분(약 720m). 간선버스 100, 102, 103, 104, 106, 107, 108, 109, 140, 142, 143, 150, 151, 152, 160, 171, 172, 710, N15, N16, 공항버스 6011 타고 미아리고개·미아리예술극장 정류장에서 하차]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걷는 코스는 미아리고개구름다리-개운산(대원암/보타사/개운사)-고려대이공대(애기릉터/인명원터)-보제원터-선농단-안감교-성북천-청계천-영도교-동묘-여인시장터-점심식사 겸 뒤풀이-동망봉(동망정/숭인재)-청룡사(정업원구기)-비우당-자지동천-안양암의 순입니다.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5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백두대간의 분수치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이 서쪽으로 산줄기를 이어오다가 영봉에서 본줄기는 서쪽으로 이어져 서해로 숨어들고, 한줄기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삼각산을 일구고 계속해서 용암봉, 시단봉, 보현봉, 형제봉, 보토현을 지나 하늘마루(328m)에 이르러 서남쪽의 북악 산줄기와 동남쪽의 미아리고개 산줄기로 갈리는데, 동남쪽 산줄기는 정릉을 끼고 돌아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를 넘어 개운산(134m)을 일구고 마침내 청계천에서 그 뻗음을 마감합니다.
미아리고개는 미아제7동 불당골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어 미아동의 동명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원래는 되너미고개[胡踰峴, 狄踰峴]라 하였는데 병자호란 때 되놈[胡人]들이 넘어왔다가 넘어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며 달리 돈암동고개라고도 합니다. 한국전쟁 때는 국군과 북한군 간의 교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인민군이 후퇴할 때 함께 데려간 사람들의 가족들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배웅했는데 그 사연이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개운산의 문화유적들
개운산(開運山 134m)은 안암산(安岩山), 진석산(陳石山)이라고도 하는데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의 개운사 절이 있어 ‘개운산’, 안암동에 있어 ‘안암산’, 진씨(陳氏) 성을 가진 사람의 채석장이 있어 ‘진석산’이라 했습니다. 이곳에는 개운사, 보타사, 대원암 등 유서 깊은 사찰들과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인명원, 사학의 요람 고려대학교가 깃들어 있습니다.
개운사(開運寺)는 1396년(태조 5) 무학이 창건하였으며 처음에는 지금의 고려대학교 이공대 부근에 짓고 이름을 영도사(永導寺)라 하였습니다. 1779년(정조 3)에는 원빈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부근에 묘소를 정했는데, 절이 원묘에서 가깝다 하여 인파(仁波)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개운사라 개명하였습니다. 1873년(고종 10) 명부전을, 1880년 벽송(碧松)이 대웅전을 중건하였습니다. 1912년 일제의 사찰령 시행에 따라 봉은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로 지정되었고 현암(玄庵)이 제1대 주지로 부임하였습니다.
대원암(大圓庵)은 개운사의 산내 암자로 1845년(헌종 11)에 지봉우기가 창건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불교계의 강백인 영호정호(映湖鼎鎬)가 이곳에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석학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의 강사로부터 불교고등강숙 숙장을 거쳐 중앙학림의 교장과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및 혜화전문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또한 조선불교 교정과 대한불교 교정을 지냈습니다.
영호가 주석하던 당시 대원암은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대표적 인물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는데 이곳에는 운허, 고봉, 청담, 성능, 철운, 운성, 운기, 청우, 남곡, 경보 등의 출가제자와 석정 신석정, 미당 서정주 등의 재가제자, 그리고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을 비롯하여 백화 양건식, 산강 변영만, 가람 이병기, 위당 정인보, 범부 김정설, 지훈 조동탁 등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영호의 입적 이후 1970년대는 탄허택성이 주석하면서 이통현 장자의 <신화엄합론>의 역경사업을 하였습니다.
보타사(普陀寺)는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대웅전 뒤편 암벽에 조각된 마애보살좌상의 조성시기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타사 금동보살좌상(보물 제1818호)은 보관을 쓰고 유희좌(遊戱坐)로 편안히 앉아 정병을 들고 있는 금동보살좌상으로 보타락가산의 수월관음상의 도상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꽃잎 모양으로 겹쳐 만든 동판에 투각한 당초문과 화염문 등을 붙여 제작한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보관의 중앙에는 동판으로 만든 아미타 화불을 부착하여 관음보살임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세련되고 간결한 선묘, 늘씬하면서도 균형 잡힌 비례, 그리고 단아한 상호에서 뛰어난 조형성을 느낄 수 있는 조선 전기 불교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보물 제1828호)은 불신에는 백의관음을 연상시키듯 하얗게 호분을 발랐고, 어깨 위로는 검은 보발이 길게 드리워져 있으며 머리에는 삼면 절첩형의 보관을 썼고, 보관의 좌우에는 뿔 모양의 관대가 수평으로 뻗어 있습니다. 관대의 아래에는 타원형의 영락 장식이 무겁게 달려 있는데, 전반적인 표현 양상은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흡사합니다.
제작과 관련하여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양식상 여말선초에 조성된 불상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데 특히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도상과 양식적 특징이 거의 같습니다. 이 마애보살좌상은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쌍벽을 이루는 마애보살상으로, 고려 말 조선 초 불교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인명원(仁明園)은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무덤입니다. 원빈 홍씨는 정조의 후궁으로, 호조참판 홍낙춘의 딸이며 홍국영의 누이입니다. 1778년(정조 2)에 빈으로 간택되어 창덕궁 정전에서 가례를 올렸는데 갑자기 1779년 5월 7일에 14세의 나이로 창덕궁 양심합(養心閤)에서 죽었습니다. 이때 시호를 인숙(仁淑), 궁호를 효휘(孝徽), 원호를 인명(仁明)이라 하였습니다.
정조는 원빈의 행장을 직접 지었는데, 그것이 장서각 소장의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입니다. 그러나 홍국영이 죽은 이후, 궁원의 호칭이 예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따라 원빈묘(元嬪墓)로 강등되었습니다. 인명원은 흥인문을 나가 관왕묘를 거쳐서 도착할 수 있는 동부 온수동의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서삼릉(西三陵)의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고려대학교 본관은 1934년에 세워진 고려대학교 내의 건물로, 설계자는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박동진(朴東鎭)이고 시공자는 후지타 고지로(藤田幸二郞)입니다. 박동진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10년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습니다.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 건축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박동진은 고려대 본관 건물의 설계를 계동에 있는 김성수의 자택 2층에서 했다고 합니다.
일제 때 대학의 설립 주체는 크게 선교사학, 일제관학, 민족사학 등이었는데 민족사학을 대표하는 보성전문 캠퍼스는 선교사학인 연희전문과 이화여자전문 그리고 일제관학인 경성제국대학 캠퍼스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규모와 수준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본관 후문 돌기둥에 그려진 무궁화 한 쌍을 일제가 문제 삼자 설계자 박동진은 벚꽃이라고 속였다고 합니다. 박동진은 한민족의 자부심을 고려대 본관 건물에 불어넣었던 것 같습니다.
고려대학교박물관은 1934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도서관 내의 참고품부(參考品部)로 출발하였습니다. 보성전문학교 교장 김성수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민속품을 출연하고 일본 동양문고 사서 출신의 손진태(孫晉泰)를 도서관 사서로 임명해 참고품의 수집과 정리를 맡겼습니다. 설립 이후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각처에서 유물 기증이 이어졌고 안함평(安咸平) 여사가 출연한 거액의 희사금을 토대로 다수의 유물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소장품 규모는 개관 초기인 1942년 무렵 이미 3,000여 점에 달했으며 한국전쟁으로 상당수의 유물이 소실되었으나 지속적인 발굴과 유물 수집을 통해 고고, 역사, 민속, 서화, 도자, 현대미술에 걸쳐 총 10만 25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분청사기인화문태호(국보 제177호), 혼천시계(국보 제230호), 동궐도(국보 제249호)와 국가지정기록물 제1호(유진오 제헌헌법 초고)와 제2호(안재홍 미군정 자료)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울학교가 열리는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안암동로터리에 있던 보제원
조선시대에는 도로와 함께 역원제(驛院制)가 동시에 발달하였습니다. 역(驛)은 서울에서 각 지방에 이르는 30리마다 도로변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공문전달, 관물과 공세의 수송, 관료 행차 시 마필의 숙식 제공 등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원(院)은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대강 100리마다 요로에 설치되었는데 역과 같은 장소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를 합하여 역원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파발제(擺撥制)의 실시와 함께 파발의 매 참마다 참점(站店)이 설치되었는데 이 참점은 후에 주점이나 주막으로 발전되어 원은 그 행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서울 인근의 원으로는 서대문 밖의 홍제원, 동대문 밖의 보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 등이 있었는데 홍제원과 이태원은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제원(普濟院)은 흥인문 밖 3리 지점(현재 안암동로터리)에 있었는데 한성에서 동북 방향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습니다. 보제원은 태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숙식 제공 외에도 구료사업(救療事業)도 벌였습니다. 보제원은 주로 도성 내 병자의 구료를 주 업무로 하였으나 때로는 무의탁자를 수용하고 행려병자의 구료나 사망 시 매장까지 해주는 등 구휼기관으로서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농사의 소중함 알린 선농단
선농단(先農壇)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으로 제사지내던 곳입니다. 선농의 기원은 멀리 신라시대까지 소급되는데,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태조 이래 역대 임금들은 이곳에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선농제(先農祭)를 지냈습니다.
또한 제를 올린 뒤에는 선농단 바로 남쪽에 마련된 적전(籍田)에서 왕이 친히 밭을 갈아 백성들에게 농사일이 소중함을 알리고 권농에 힘쓰기도 하였습니다. 왕이 적전에서 친경할 때에는 농부들 중에서 나이가 많고 복 있는 사람을 뽑아 동참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하는 제도는 1909년(융희 3)을 마지막으로 일제하에서 폐지되었습니다. 1476년(성종 7)에는 이곳에 관경대(觀耕臺)를 쌓아 오늘날의 선농단이 되었습니다.
선농단(先農壇) 향나무는 현재 국내에서 자라고 있는 향나무 중 크고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서 나무의 높이가 10m나 됩니다. 정확한 수령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나무가 있는 선농단이 1392년 지어졌던 것과 관련지어 볼 때 500여 년은 넘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관우 모신 동묘
동묘(東廟)는 중국의 유명한 장수인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인 관왕묘로서 동쪽에 있다고 동묘라 부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관우 장군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 명나라의 황제가 직접 비용과 현액을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동대문 밖에 동묘, 남대문 밖에 남묘가 설치되었고 조선 말 고종 때 명륜동에 북묘, 서대문 천연동에 서묘(숭의묘)가 세워져 모두 네 곳에 있었으나 동묘와 남묘만 남았고 서묘와 북묘는 없어졌으며 남묘도 그 후 사당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애절한 사연 전하는 동망봉
한양의 좌청룡 봉우리인 낙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작은 산줄기가 뻗어나가 낮게 솟은 봉우리가 동망봉(東望峯 95m)입니다. 이곳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절한 이별과 평민으로 살아남은 정순왕후의 신산스런 삶이 오롯이 녹아 있는 곳입니다.
자지동천(紫芝洞天)은 단종의 비가 염색할 때 이용한 우물로, 붉은빛이 나서 염료 없이도 옷감을 염색했다는 설화를 낳은 곳입니다. 단종의 비 송씨(정순왕후)는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애절하게 기다리며 정업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명주로 댕기, 저고리깃, 옷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 갔는데, 어느 날 청룡사에서 300m 떨어진 화강암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명주를 담궜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명주를 널어 말리던 바위에는 ‘紫芝洞泉’이라고 새겨져 있고, 인근에는 청룡사, 동망봉, 여인시장 등 단종애사에 얽힌 명소가 산재해 있습니다. 자지(紫芝)란 자줏빛을 띄는 풀이름을 말합니다.
단종은 1441년 문종이 세자였던 시절에 아들로 태어나지만 3일 만에 어머니가 사망했습니다. 1450년 할아버지 세종, 1452년 아버지 문종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였습니다. 1453년 계유정란으로 권력은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의 손에 넘어 갔고 1454년 14살의 나이로 1살 많은 정순왕후 송씨와 결혼합니다. 1년 뒤 1455년 단종은 세조(수양대군)에게 임금 자리를 잃고 수강궁에 잠시 머물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을 떠나 1457년 12월 24일 17세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18살의 왕비는 평민이 되었고 도성 밖 낙산기슭 정업원에서 시녀 3명과 구걸로 눈물겹게 살아갑니다. 이를 안 부녀자들이 몰래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자 부녀자의 접근도 금지해 버립니다. 조정에서는 영빈정(英嬪亭)이란 집을 지어 주었으나 이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암자에서 거주하며 옷감을 염색하는 일로 어렵게 살아갔습니다.
송씨는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때까지 82세까지 살다가 1521년에 죽었는데 묻힐 곳이 없어서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집인 해주 정씨 집안의 묘역에 묻혔습니다. 1698년(숙종 24)에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권되자 송씨도 대군의 부인에서 정순왕후로 복권되고 그녀의 묘도 사릉(思陵)이 됩니다. 단종의 묘는 영월에 있는 장릉으로 죽어서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청룡사와 정순왕후
청룡사(靑龍寺)는 922년(태조 5)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창건되었습니다. 풍수 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에 해당되는 산등성이에 지었다고 청룡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이 주석한 이래 줄곧 비구니 스님만이 주석한 것이 특색입니다. 이때 이 부근에서는 청룡사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 창건 이후로 43년 만에 처음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고도 불렀습니다. 1299년(충렬왕 25)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화되자 지환이 중창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05년(태종 5) 무학대사를 위하여 왕명으로 중창했는데 창건 당시 도선국사를 위하여 창건한 이래 두 번째로 왕명에 의한 중창인 것입니다. 이어서 1512년(중종 7)과 1624년(인조 2)에도 법공과 예순이 중창하였고 1771년(영조 47)에는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가 이곳에 있었다 하여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내려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했는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청룡사는 왕실의 여인과 관계가 많은 곳으로 고려 말의 명신 이제현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조선 초에는 태조의 딸 경순공주가 머물렀습니다. 특히 단종이 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강원도 영월까지 유배 갈 때 정순왕후와 이곳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였고, 왕비는 영월이 있는 동쪽이 가장 잘 보이는 동망봉 아래 청룡사 부근에서 평민으로 살아갔습니다. 정순왕후의 비인 정업원구기비가 남아 있으며 비각의 편액은 영조의 친필입니다.
‘여인시장 터’는 싸전골[米廛洞]에 있었던 채소시장으로 일제 강점기까지 열렸다고 합니다. <한경식략(漢京識略)>에 “남자들만 장에 다니던 조선시대에 부녀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채소시장이 있었는데 이를 여인시장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순왕후가 동망봉 부근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며 살게 되자 여인시장의 아낙네들이 채소 등 먹을거리를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단종이 왕비와 이별한 다리
영도교(永渡橋)는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갈 때 정순왕후와 이 다리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고 다시는 못 건너올 다리라고 해서 영도교라 했는데 영영 이별하는 다리라고 영리교(永離橋)라고도 하였습니다.
비우당(庇雨堂)은 ‘비를 피할 만한 집’이라는 뜻으로 실학자 이수광이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한 곳으로, 원래는 조선 태조 때부터 세종까지 4대 35년간 정승을 지낸 유관(柳寬)의 집터로서 그는 이수광의 외가 5대조 할아버지입니다.
유관의 관향은 문화(文化)로, 고려의 정당문학 공권의 후손이며, 삼사판관 안택의 아들입니다.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비서에 이르렀고 조선시대에는 형조판서를 거쳐 1424년(세종 6)에 우의정에 올랐다가 80세에 고령으로 사직하였습니다. 88세로 세상을 떠나니,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 안 금천교 밖에 쳐놓은 장막까지 나와서 애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나라에서 받은 녹봉은 다리를 놓고 길을 넓히는데 쓰거나 인근 동네 아이들의 붓과 먹 값으로 썼고 자신은 담장도 없는 초가집에 살았습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태종은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그가 모르게 밤중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수시로 반찬거리를 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청빈한 생활로 일관하다가 죽음에 임하여서 남긴 유언은 “내가 남길 유산이랄 것이 없으니, 청빈을 대대로 자손들에게 물려주기 바란다” 이 한 마디뿐이었다 합니다.
유관이 살던 집터는 그의 4대 외손인 이희검이 이어 받았습니다. 그는 태종의 아들 경녕군의 현손으로 성품이 고결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승지, 호조, 병조, 형조판서와 장단부사 등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옷은 몸을 가리면 족하고, 음식은 배만 채우면 그만이다”라는 것이 그의 생활신조였으며 죽을 때 병조판서와 지경연사를 겸하였으나 집에는 곡식도 돈도 남은 것이 없어서 친지들이 추렴하여 겨우 장사를 지냈다 합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것을 이희검의 아들 이수광에 의해 청빈철학의 성지로 복원되어, ‘비우당(庇雨堂)’이란 당호를 달았습니다. 이수광은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를 지어 당호를 짓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나의 집은 흥인문 밖 낙봉(駱峰) 동쪽에 있다. 적산(啇山)의 한 자락이 남으로 뻗어 고개를 숙인 듯 지봉(芝峰)이 있고,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한 넓은 바위와 10여 그루의 소나무가 비스듬이 있다. 누봉정(樓鳳亭) 아래 백여 묘의 동원(東園)이 그윽하게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 청백(淸白)으로 이름을 떨친 유관 정승이 초가삼간을 짓고 사셨다.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빗물을 피하고 살았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 온다. 이 분이 나의 외가 5대 할아버님이다. 아버님이 이 집을 조금 넓혔는데, 집이 소박하다고 누가 말하면 우산에 비하여 너무 사치스럽다고 대답하여 듣는 이들이 감복하였다. 나는 이 집을 보전하지 못하고 임진왜란에 없어진 이 집터에 조그만 집을 짓고 비우당(庇雨堂)이라고 하였다. 비바람을 겨우 막겠다는 뜻이다. 우산을 받고 살아오신 조상의 유풍을 이어 간다는 뜻도 그 속에 담겨 있다.”
이수광은 1563년(명종 18)에 태어난 태종의 6대 손입니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3년 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된 후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에서 관직에 올랐고 임진왜란 중에는 경상도방어사의 종사관, 함경도 선유관을, 임진왜란 후 대사헌과 대사간, 광해군 때에는 도승지와 이조참판을 지냈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임금을 강화까지 호종하고 이듬해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인조반정을 계기로 다시 환로에 오르기는 했으나 벼슬에 연연하기보다는 당시 사회의 갈등과 모순과 피폐 등을 스스로 깨닫고 이 같은 문제에 대한 대책 강구와 해결 방법 등을 사상적으로 심화시키면서 <지봉유설>을 저술하여 실학사상을 개척하였습니다. <지봉유설>은 1614년에 편찬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내용은 천문, 시령, 군도, 병정, 인문, 인사, 종교 등 25부 182항목으로 분류,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명(明)의 수도 연경을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가져와 우리나라에 천주교를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수광은 비우당에 살면서 이곳의 여덟 경치를 손꼽고 <비우당 팔경> 시를 읊었습니다.
흥인문 바깥의 못가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지를 휘날림.(東池細柳)
북악의 푸른 소나무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아쉬워함.(北嶺疎松)
아침마다 드러누워 낙산의 떠있는 구름 바라보기.(駱山晴雲)
아차산에서 들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 비 바라보기.(峨嵯暮雨)
비온 후 개울에 나가 발 씻고 개울가 바위 위에 드러눕기.(前溪洗足)
시간나면 뒷 텃밭에 나가 영지버섯을 채취하면서 소일하기.(後圃採芝)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와 꽃 찾기.(岩洞尋花)
밝은 달밤에는 산위 정자(낙산정)에 올라 물끄러미 달 바라보기.(山亭待月)
사찰 전체가 문화재인 안양암
안양암(安養庵)은 1889년(고종 26) 성월대사가 창건한 정토도량으로 안동 권씨 감은사 종중의 소유라고 하는데, 원효종의 소속 사찰로 소송과 분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원래 사찰과 땅의 소유주가 별도인 개인사찰이었는데 한국불교미술박물관 권대성 관장이 그 땅을 사들여 조계종 조계사의 말사로 등록하면서 안정을 찾았습니다. 창건주의 아들 태준 스님이 1916년에 주지가 되면서 안양암을 중건하게 되었는데, 주지가 된 이후 엄청난 친일행각을 하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종교인 108명 중 한 사람입니다.
이곳에는 조선 말기부터 조성된 전각, 불화, 불상, 공예품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찰 전체가 문화재로서 100여 년의 짧지만은 않은 세월을 머금고 있는 성보들입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뒤로 아미타후불도가 좌측으로, 감로도가 그 옆으로, 석가모니불의 일생을 여덟 단계로 나눠 그린 팔상도가 병풍처럼 펼쳐져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데 모두 조선말기 대가들의 역작들입니다.
마애관음보살좌상은 안양암의 상징물로 손색이 없는데 바위 절벽에 관음전이라는 폭이 좁은 전실건물(前室建物)을 세우고 감실을 마련한 후 관음보살좌상을 새겼습니다. 관음전 왼쪽 바위 면에 새긴 100여 자의 조성 명문에는 1909년(융희 3)에 새겼다는 내용이 있는데 통도사 지장암 마애불과 최근 발견된 왕십리 안정사 대웅전 뒤 암벽감실의 마애좌불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조선 말기의 마애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석감마애아미타여래좌상은 감실 속에 아미타불을 모셨는데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관음전의 마애관음보살좌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감실마애는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후사가 없는 아낙네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고 마애불의 돌가루를 긁어다가 마시고 후사를 얻었다는 숱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참가비,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서울학교'를 찾으시면 5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 <이야기가 있는 서울길>이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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