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소현숙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의 '거리에 나선 김향화, 만세를 외치다'를 100분 강의를 가졌다.
즉 기생들은 왜 3.1운동에 참여했을까? 였다.
서울 출생으로 수원 기생조합 소속 김향화 (1897~?)는 만세시위(1919.3.29)에 징역 6개월 복역했고, 경북 대구 출신 현계옥 (1897~?)은 독립운동에 투신 했으며 역시 대구 출신이자 '한남권번' 기생 정칠성(1897∼1958)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1930년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인물들을 예를 들어가며 진솔한 강의가 시작됐다.
특히 그는 경남지역인 진주·통영 등지에 있는 기생(妓生)들의 3.1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소 팀장은 "단순히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서 군중들의 참여와 연대를 촉발시키는 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규정했다.
소 팀장은 또 "기생들은 독립사상을 품은 남성들과의 빈번한 교류 속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전달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정의했다.
이른바 3.1운동이 있은 뒤 여러모로 세태는 달라졌고 그 모두가 배일 혹은 국권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한 가지 특이한 일은 화류계가 번창하고 기생들에게 돈을 쓰는 청년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라는 점도 덧대졌다.
이에 대해 소 팀장은 "그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 한가지 이유는 기생이라면 그야말로 노류장화(路柳墻花)로만 여겨 자못 천하게 취급돼 왔지만 3.1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기생들의 주가가 뛰어 올랐다"고 진단한 것이다.
일례로 "우리도 대한의 딸이요,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 묻힐 백성의 한 사람이다. 직업이 천하다고 무작정 멸시는 말라"고 당시 상황을 어필했다.
더 보태서 기생들의 사회활동은 찬양회(1898)와 국채보상운동(1907)에 참여해 왕성한 사회적 인정투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 당시 기생들은 군중 앞에 당당히 섰다고도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연구소' 소현숙 팀장은 "여성이 역사속의 희생자가 아니라 당당하게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해 간 역사적 주체이다"고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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