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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지역에 '조선기생'들이 왜 찿아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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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지역에 '조선기생'들이 왜 찿아 왔을까?

노무현재단 경남지역위원회 시민학교 열고 여성들의 '독립사상' 전달

노무현재단 경남지역위원회는 13일 경상남도교통문화연수원 세미나실에서 '3.1운동과 여성, 불꽃같은 삶'이라는 주제로 시민학교를 열었다.

이날 소현숙 '일본군 위안부문제연구소' 연구팀장의 '거리에 나선 김향화, 만세를 외치다'를 100분 강의를 가졌다.

즉 기생들은 왜 3.1운동에 참여했을까? 였다.
▲노무현재단 경남지역위원회는 '3.1운동과 여성, 불꽃같은 삶'이라는 강의를 주최한 후 기념촬영을 했다.ⓒ프레시안(조민규).
소 팀장은 "조선시대의 기생은 여러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창, 무용, 독서, 낭송, 작문 등 기예를 훈련 받은 예절이 우아하고 편안한 존재이다"고 소개했다.

서울 출생으로 수원 기생조합 소속 김향화 (1897~?)는 만세시위(1919.3.29)에 징역 6개월 복역했고, 경북 대구 출신 현계옥 (1897~?)은 독립운동에 투신 했으며 역시 대구 출신이자 '한남권번' 기생 정칠성(1897∼1958)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1930년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인물들을 예를 들어가며 진솔한 강의가 시작됐다.

특히 그는 경남지역인 진주·통영 등지에 있는 기생(妓生)들의 3.1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소 팀장은 "단순히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서 군중들의 참여와 연대를 촉발시키는 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규정했다.

소 팀장은 또 "기생들은 독립사상을 품은 남성들과의 빈번한 교류 속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전달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정의했다.

이른바 3.1운동이 있은 뒤 여러모로 세태는 달라졌고 그 모두가 배일 혹은 국권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한 가지 특이한 일은 화류계가 번창하고 기생들에게 돈을 쓰는 청년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라는 점도 덧대졌다.

이에 대해 소 팀장은 "그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 한가지 이유는 기생이라면 그야말로 노류장화(路柳墻花)로만 여겨 자못 천하게 취급돼 왔지만 3.1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기생들의 주가가 뛰어 올랐다"고 진단한 것이다.

일례로 "우리도 대한의 딸이요,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 묻힐 백성의 한 사람이다. 직업이 천하다고 무작정 멸시는 말라"고 당시 상황을 어필했다.

더 보태서 기생들의 사회활동은 찬양회(1898)와 국채보상운동(1907)에 참여해 왕성한 사회적 인정투쟁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 당시 기생들은 군중 앞에 당당히 섰다고도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연구소' 소현숙 팀장은 "여성이 역사속의 희생자가 아니라 당당하게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해 간 역사적 주체이다"고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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