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4>불한당들의 시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4>불한당들의 시대

그림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제1부 이야기의 서막 ④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5. 야래자(夜來者)들의 밤

그날 밤 서라벌(徐羅伐)은 전례 없이 소란했다.

선도산의 불은 원인이 불명했고, 꽃놀이 갔던 화랑들이 불에 갇혀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식에 민심이 요동쳤다. 여근곡의 백제군이 패퇴하며 일부러 산불을 일으킨 것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고, 그 때문인지 선도산 주변엔 군사들의 경계가 삼엄했다. 불구경을 나온 아이들도, 꽃놀이 간 자식들의 생사여부를 묻는 부모들도 선도산 부근엔 얼씬도 못했다. 땅거미가 지기 무섭게 통행금지를 알리는 순라군들의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왔다.

밤이 깊어지자 서라벌의 텅 빈 가도(街道)엔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이내 굵어지며 하염없이 쏟아졌다. 개 짖는 소리도 개구리울음 소리도 아이들과 부모들의 아우성 소리도 군사들의 고함소리도 모두 장대비 소리에 묻히거나 지워졌다.

그날 밤 서라벌엔 오직 빗소리만 남았다.


고색창연한 저택들의 종마루 위를 여우 한 마리가 급하게 뛰어갔다. 마치 제집 드나들듯 어느 대가(大家)의 뒤란으로 뛰어내리더니, 단걸음에 대청으로 올라섰다. 뒤를 힐끔 쳐다보며 여우는 젖은 몸을 털었다. 흥건한 물자국을 남기고 앞발을 놀려 방문을 열었다. 침실엔 코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침상 머리맡에 앞다리를 세우고 앉은 여우는 혀를 날름거리며 몸에 묻은 물기를 훔치기 시작했다.

“코골이 소리는 여전하군!”

“드르릉~ 드르릉~”

“용케도 아들의 목숨을 건졌구나?”

“드르릉~ 드르릉~”

침실엔 코 고는 소리만 있었다.

“역시 왕귀(王鬼)의 자손이라 명줄이 길군.”

마침 천둥 빛에 날카로운 이빨을 번득였던 여우는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여기까지야. 다음엔 왕귀라도 소용없어! 그건 내가 장담하지.”

코 고는 소리가 멈췄다.

“왜? 정신이 번쩍 들어? 이제서야 내 말이 곧이들리나? 킥킥킥~”

“기달(吉達)의 원귀야~ 썩 물러가라!”

호통소리인지 잠꼬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원귀(寃鬼)라고? 내가 어떻게 죽었는데 네가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냐? 네가 나와 두두리(豆豆里)들을 모두 죽이지 않았느냐!”

누워있는 몸에서 마치 잠꼬대 같은 말이 이어졌다.

“그것은 오해다. 나는 너희들을 기망(欺罔)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왕의 계략에 속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끄럽다! 네가 뭐라 하던 너에겐 부귀영화가 나에겐 여우 껍데기가 남았다. 구차한 변명이다.”

“왕의 복심(腹心)은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었어. 그 꼬임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었고, 너도 여우의 탈을 쓰고 도망하기에 급급하지 않았느냐!”

“우리 중에 살아남은 자는 너뿐이다. 우리가 원귀처럼 구천(九泉)을 헤매거나 짐승의 몸에 기생하고 있을 때, 너는 왕의 품에서 희희낙락했다!”

“그런 적 없다! 왕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했다. 왕이 내린 벼슬은 족쇄와도 같았다. 한시도 편하지 않았다.”

“나 기달, 다시 속지 않는다! 어림없는 일이다. 킥킥킥~”

여우는 사레가 들린 것처럼 캑캑거렸다. 마치 비웃는 것처럼 기이한 소리였다.

“다음엔 빠져나가지 못한 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또 무슨 행짜를 부리려는 것이냐?”

“행짜? 킥킥킥! 행짜가 아니라 너의 운명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고작 여우 한 마리가 내성사신(內省私臣)을 해코지할 수 있겠느냐? 더군다나 너는 왕귀의 유복자(遺腹子)이시지 않느냐? 가당치 않은 일이다. 킥킥킥~”

여우의 웃음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어떤 지실이 든다는 것이냐? 소상히 말 좀 해다오.”

“이번에도 네 꿈을 믿어보려무나. 난 단지 기미(機微)만 전달할 뿐, 네 손녀딸도 과연 왕귀의 보살핌을 받을지 두고 볼 일이다. 킥킥킥~”

“손... 손녀딸?”

삐걱대는 문소리와 함께 여우의 웃음소리는 메아리를 남기며 아득히 사라졌다. 김용수는 침상에 단단히 묶인 듯 꼼작도 하지 못했고, 이내 신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미몽을 깨우며 손녀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겨우 차린 김용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손녀 아이의 해맑은 미소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고타소(古陀炤)가 웬일이냐? 청지기는 어디 가고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이냐?”

손녀는 할아버지를 안심시킬 요량으로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고타소의 눈동자는 마치 아침햇살처럼 영롱하였고, 김용수는 어린 손녀의 눈빛만으로도 간밤의 악몽이 말끔히 씻기는 듯하였다.

“가위눌림에 시달리셨세요? 잠꼬대가 어찌나 심한지 아버님께서 살펴드리라 하셨어요. 청지기는 마당에 있세요.”

김용수는 겨우 한 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고타소는 할아버지의 가슴을 누르며 속삭이듯 말했다.

“할아버지~ 좀 더 누워 계세요. 아직 이른 아침이에요. 제가 노래 한 소절 불러드릴 테니 시름을 놓으시고 편안히 계셔보셔요~”

“허허허~ 그러자꾸나. 오래간만에 우리 고타소 노래 한번 들어볼까?”

할아버지와 손녀 간의 대화는 웃음꽃을 피우며 이어졌다. 더욱이 어제는 숨이 가쁠 정도로 긴박한 하루였지 않은가, 밤에 찾아온 기달까지. 김용수는 숨을 크게 내쉬며 망중한을 제대로 즐길 자세를 취했다. 해맑게 웃는 고타소의 얼굴 밑으로 비에 젖은 보삼(步衫:장옷 모양의 우비)이 이채로웠다. 보삼을 벗고 편하게 있으라는 말을 건네려는 순간 고타소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미실(美室)의 수레 철커덕철커덕, 연두 빛 깃옷은 새싹처럼 고운데~
어찌 당신 생각 않겠어요. 당신이 주저할까 두려워요.
태후(太后)의 수레 덜커덕덜커덕, 붉은빛 깃옷은 보석처럼 고운데~
어찌 당신 생각 않겠어요. 당신이 아니 갈까 두려워요...'

고타소의 노래를 듣고 있던 김용수는 서서히 안면이 경직되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타소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 살아서는 만나지 못해도, 죽어서는 함께 있을 거예요.

내 말을 아니 믿으신데도, 내 마음 햇빛과 같이 변하지 않겠죠~'


“이 노래는...”

김용수는 굳어지는 입술을 간신히 떨치며 입을 뗐다.

“네가 어떻게 이 노래를 알고 있는 것이냐? 너는... 누구냐? 고타소가 아니지?”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고타소가 할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웃고 있는 고타소의 표정은 다소 기이한 것이 좀 전 여우의 웃음소리가 되살아났다.

“할아버지 왜 그러셔요? 저 고타소여요. 할아버지~”

김용수는 침상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으나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리를 지르려 안간힘을 썼다.

“너는 고타소가 아니다. 고타소가 그 노래를 알리가 없다. 그 노래는 내 어머니가 아바마마를 그리워하며 부르시던 노래이다. 내 어머니가 눈물을...”

김용수는 눈물과 함께 고함을 치며 발버둥을 쳤다. 미소 띤 얼굴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고타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보삼을 벗었다. 때마침 천둥소리와 함께 번득이는 섬광이 침실을 밝혔다. 여우 몸뚱이의 고타소가 환하게 드러났다. 기달의 웃음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킥킥킥! 소상히 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의 바람이다. 난 너의 청을 저버리지 않았을 뿐이다. 앞으로의 일은 네 몫일뿐, 나와는 무관하다. 킥킥킥~”

캑캑거리는 여우 소리와 김용수의 신음소리가 뒤섞여 침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머리만 떠다니는 고타소는 노랫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에 휩싸인 김용수는 침상에서 일어나려 발버둥 쳤으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견디다 못한 김용수는 눈알이 뒤집힌 채로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고타소의 노랫소리는 더욱 격앙되며 계속되었으니, 이 모든 소란은 천둥소리에 묻혀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날 밤 김용수의 침실에는 오직 천둥소리만 남았다.


아이가 태어나자 여인은 야반도주했다. 어느 누구도 믿고 의지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그나마 양중(兩中:남자 무당)이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살리려면 바다에서 삼십 리, 저자에서 삼십 리를 벗어난 골산으로 피신 하거라!'

여인은 험로와 외진 곳을 마다하지 않았고,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못할 짓이 없었으나 그해 겨울의 추위는 혹독했다. 여인의 발자국 위로 눈발이 휘몰아쳤다. 앞을 분간하기 힘든 눈보라를 뚫고 깊은 산중으로,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여인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다. 혹한의 깊은 산 속에서 한 여인의 운명이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쓰러진 여인 위로 눈이 수북이 쌓여갈 즈음,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이런 핏덩이를 품고 여까지 오다니 제정신이오?”

여인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그들이 처음 건넨 말을 기억했다. 그들은 화전(火田)으로 밭을 일구는 무리들이었으나 겨울에는 주로 사냥으로 연명했다. 그들 스스로 두두리(豆豆里)라고 했다. 그들은 세상에 쫓기거나 등을 지고 깊은 산골로 숨어든 자들이었다. 경계심이 많았지만, 한 겨울 아이를 안고 숨어든 여인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여인의 옷차림과 생김새로 보아 여염집 아낙네로 보이진 않았으나, 여인의 신세가 자신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 여겼다. 여인은 동상으로 손과 발이 까맣게 썩어 들어갔다. 강보에 쌓여있던 아기도 코끝을 도려내야만 했다.

두두리들은 봄부터 불을 놓아 밭을 일구었고, 겨울에는 눈구덩이를 누비며 덫이나 활로 산짐승을 잡았다. 아이는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불 다루는 법과 사냥하는 법을 배웠다. 아이의 총명은 비범했다. 여남은 살이 지났을 무렵엔 무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자 농사꾼이 되었다. 아이는 산을 발가벗겨먹기에 급급했던 두두리들과는 다르게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몇 해가 지나자 골산에는 개울이 흐르기 시작했고 숲이 우거진 아늑한 곳에 처음으로 두두리만의 안식처가 생겼다. 그때부터 두두리들은 소년을 믿고 따랐고, 여인은 더 이상 아들의 신분을 숨길 수 없었다. 소년은 귀신이 된 왕, 즉 왕귀(王鬼)로 불렸던 진지왕(眞智王)의 유복자(遺腹子)이었다. 여인은 아들과 그를 따르는 두두리들에게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러운 눈물을 삼켰다.


진지왕(眞智王)은 왠지 싫었다. 왕은 미실(美室)의 미도(媚道:교태부리는 법)가 거북하였고, 왕비 지도(知道)의 음사(陰事:성교의 기술)를 거부했다. 사도태후(思道太后)는 그런 아들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다. 그녀에겐 남자의 일보다 여자의 일이 더 긴요했기 때문이었다. 남편 진흥왕과 아들 진지왕으로 이어지는 남자의 일, 즉 제왕의 계보는 불완전한 것이었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았다. 왕의 주변에는 항상 모사꾼이 들끓었고, 피바람이 끊이지 않았다. 남자들의 세상은 믿을 수 없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으로 오래전 어머니 옥진(玉珍)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듯 들었다. 그녀에겐 자신으로부터 미실과 지도로 이어질 딸들의 계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미실은 언니 묘도부인의 딸이었고 지도는 동생 흥도부인의 손녀였다. 왕가의 혈통은 끊기거나 갈아치울 수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어머니 옥진궁주로 부터 비롯된 대원신통(大元神統:제왕의 부인 또는 첩을 배출하는 모계 혈통)의 혈맥은 대체되어선 아니 되는 것이었다. 왕은 교체되어도 왕의 비(妃)로서 색공(色供:왕에게 잠자리를 바치는 일)을 바치는 궁주(宮主:왕비와 동급의 처우를 받음)의 지위는 자신의 혈맥이어야 했다.

아버지 진흥왕의 권세와 상대등 노리부의 위엄은 미실의 고간(股間) 사이에서 농락되기 일쑤였으나, 진지왕은 미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녀의 요분질은 더 이상 세상을 요동치게 만들지 못하였고, 미실의 후계로 키워진 지도의 왕비 자리도 위태로웠다. 고간의 열락(悅樂)한 도(道)로서 세상을 지배했던 대원신통의 맥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급기야 어머니가 아들을 경멸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아들은 말했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듯 그런 예기치 못한 사랑을 원해요. 색공으로 사랑을 탐하지는 말아 주세요. 사랑이란 억겁의 인연으로 불현듯 찾아오는 그런 걸 겁니다.”

사도태후는 아들의 세치 사이에서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열락 이외의 것으로 몸이 떨리긴 처음이었다. 아들은 골품(骨品)도 없는 집안의 딸을 흠모하고 있었다. 몸에서 복숭아 향이 난다 하여 도화녀(桃花女)라 불렸다. 자색(姿色)이 뛰어나고 말과 행동이 방정(方正)하였으나, 그래 본들 천미한 계집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대원신통과 무관한 계집년이 아닌가! 아들은 매일 계집을 옆에 두고서도 안달을 냈다. 도화녀의 부모는 사도태후의 위협에 서둘러 딸을 출가시켰으나 진지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도태후의 다짐은 그랬다. 왕가의 혈통은 끊기거나 갈아치울 수 있는 것이나, 대원신통(大元神統)은 끊기거나 갈아치워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선택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사도태후는 미실을 불렀다. 미실의 교태는 여전히 상대등 노리부를 농락할 수 있었다. 노리부는 거칠부를 움직일 수 있었고 귀족들의 반발은 무마될 수 있었다. 그러나, 태후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진지왕이 스스로 야인(野人)이 되어 도화녀와 줄행랑을 쳤기 때문이었다. 진지왕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었다.

사랑 앞에서는 지존(至尊)의 자리마저도 초개(草芥)와 같은 것이라며 국인(國人)들은 진지왕의 이야기로 설왕설래했다. 개중엔 진지왕의 사랑을 흠모하는 이도 있었고, 미련하고 무모하다며 셈본을 펴는 자도 있었다. 어떤 언설이든 사도태후와 미실에겐 불안한 것이었다. 상대등 거칠부가 귀족들을 다독이며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으나, 비어있는 왕좌는 피바람의 예고일 뿐이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월성(月城)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인이 된 진지왕은 도화녀와 함께 산수를 유람하였다. 왕은 직접 요고(腰鼓)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왕의 노랫소리는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잔잔히 울려 퍼졌다. 지긋이 듣고 있던 도화녀는 왕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왠지 가락이 슬프긴 하온데... 당풍(唐風)이라 어렵습니다.”

왕이 대꾸했다.

“계림풍으로 불러주렴?”

도화녀는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미실(美室)의 수레 철커덕철커덕, 연두 빛 깃옷은 새싹처럼 고운데~

어찌 당신 생각 않겠소. 그대가 주저할까 두렵다오.

태후(太后)의 수레 덜커덕덜커덕, 붉은빛 깃옷은 보석처럼 고운데~

어찌 당신 생각 않겠소. 당신이 아니 갈까 두렵다오.

살아서는 만나지 못해도, 죽어서는 함께 있을 거요.

내 말을 아니 믿는다 해도 내 마음 햇빛과 같이 변하지 않을 것이오~

왕의 목소리는 쓸쓸하였고 두 눈이 촉촉해지는 듯하였다.

“두려우십니까?”

왕은 말없이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도화녀가 입을 뗐다.

“부르신 노래에 의문이 있습니다. 여쭈어도 될는지요?”

“그러렴~”

왕이 다시 미소 지었다.

“살아서 만나지 못해도 죽어서는 함께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 지금 서로 마주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어찌 살아서 만나지 못한다고 하시는지요?”

왕은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궁(宮)을 떠나면 너와 나의 살길이 열리겠거니 하였다만...”

“계림에서 멀리 떠나 있어도 그러하겠습니까?”

“그래 본들 우리가 신라 땅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 순진한 생각이었다.”

도화녀를 바라보는 왕의 눈에 굵은 물방울이 잡혔다.

“너와 나의 인연은 죽어서야 영원할 것 같아 그리 노래 불렀느니라. 너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이 후회되지 않겠느냐?”

도화녀는 왕의 품에 와락 안기었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두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한편, 계림 사량부(沙梁部)의 저잣거리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도화녀의 부모와 남편이 행인들을 붙잡고 통사정을 하며 매달렸다. 왕이 딸을 강탈했다는 것이었다. 치정(治定)에는 관심 없고 음란한 짓만 일삼던 왕이 여염집 아녀자를 유괴하여 생사를 알 수 없는 지경이라며 부모는 절규했다. 도화녀의 남편이라는 자는 술병을 휘저으며 함부로 지껄였다.

“왕은 공짜로 도화녀를 빼앗으려 했소. 군왕이 어찌하여 일개 백성의 처를 대가도 없이 훔치다니, 사람들아~ 분개하시오. 왕을 끌어내고 세상을 바꿉시다! 왕이 마땅한 값을 치르도록 우리가 가르쳐줍시다!”

도화녀의 부모는 매일 저잣거리에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애원과 호소를 멈추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진지왕과 도화녀의 관계를 호의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진지왕을 그저 호색군으로, 여염집의 아녀자를 훔쳐 달아난 음란한 왕이라고 떠드는 작자들이 늘어났다. 민심은 서서히 새로운 왕을 요구하는데 이르렀다. 도화녀의 남편이란 자는 매일 유곽의 작부들을 지분거리며 함부로 지껄였다.

“기집년 하나 때문에 왕위를 버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어쨌든 사사롭게 국사를 어지럽힌 죄는 죽어도 싸지. 그 덕에 난 술값이 생겼고... 흐흐흐~”

“동륜태자(銅輪太子)께서도 보명궁 담을 넘다 개에 물려 승하하시지 않았습니까요?”

“크크크, 그랬지. 그 형에 그 동생이로세. 형은 아버지의 첩과 사통 하다 비명횡사하고 동생은 민가의 처와 사통 하다 왕위를 빼앗기고...”

듣고 있던 작부들이 안반짝만 한 궁둥이를 들이밀고선 말을 막았다.

“여보시우~ 시위삼도(侍衛三徒:왕실직속경호부대)의 간자(間者:첩자)들이 도처에 숨어있수. 함부로 말하다 목이 달아날 판이우.”

“크하하하~ 내 뒷배를 누가 봐주고 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시위삼도 쯤이야!”

“이 사람 큰일 나겠네~ 태후마마께서 뒤를 봐주시기라도 하오? 역시 임금에게 여편네를 빼앗긴 낭군이라 다르긴 다르오?”

“크크크. 암 다르지, 다르고말고! 난 왕의 험담을 떠벌리고 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몸이야! 몸뚱이는 비록 미천하나 요 주둥이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단 말이지.”

“그래요? 태후마마께서 이녁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나 보오. 근데 일부러 아들 욕을 허락하다니, 참 세상 요상하게 흘러가요, 그쵸?”

“어허, 아서라~ 괜한 입방정으로 네년은 경칠 수도 있다. 왕가의 법도를 어찌 천한 것들의 주둥이로 개방정을 떨 수 있겠느냐? 우리는 그저 죽으라면 죽고, 나불거리라면 나불거리다 술값이나 받아서 퍼마시면 그뿐이다. 하하하!”

“호호호. 그럼요, 요놈의 주둥이 어디서 가당치도 않은 잡설을 주워 담누~”

작부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선 손으로 때리는 시늉을 했다. 둘은 서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월지(月池) 주변의 숲길을 따라 이찬 노리부와 미실궁주가 태후를 호종하며 거닐고 있었다. 노리부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상대등께서 몹시도 신중하셔서 꿈쩍도 않으십니다.”

사도태후가 걸음을 멈추고 노리부를 바라보았다.

“거칠부 그 작자, 혹시 딴 맘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만, 어좌가 비어있으니 뭔 사달이 나도 날 듯합니다.”

“저자에 나도는 민심은 어떠하냐?”

“도화녀의 부모와 서방을 구워삶아 놓았습니다. 나랏일에 발 벗고 나서는 기특한 것들이옵니다. 덕분에 민심이 왕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허나 왕위가 오래 비어있다면 장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민심이 언제 요동칠지 모를 일입니다.”

태후는 깊은 고민에 빠져 아무 말 없이 가던 걸음을 계속했다.

“더 이상 미룰 수는 없겠지? 궁주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태후는 뒤따라오는 미실궁주에게 물었다.

“적시(適時)가 따로 있겠습니까? 마마께서 마음먹으시면 그때가 적시라 사료되옵니다.”

“호호호. 미실아~ 모든 일에는 시중(時中)이 있는 법이다. 서두르지도 뒤따르지도 않아야 한다. 그것은 음사(陰事)의 현묘한 도와 같은 이치니라. 명심하거라!”

“니예~ 각별히 유념하겠나이다.”

태후는 숨을 길게 내쉰 후, 월지 수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찬은 왕에게 어미의 기별을 전하라! 계집년은 제 집으로 돌려보내야 민심이 동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섭정은 상대등께서 연로하여 이찬 자네가 대신한다고 포고하라! 지체 없이 실행토록, 모든 일은 적시를 놓치면 아니 되는 것이다!”

고개 숙인 이찬 노리부에게 태후의 명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계집의 서방이라는 자는 단단히 버릇을 고쳐야겠더라. 시위삼도의 장계에 따르면 해야 할 말 이외에 아니할 말을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인다는구나.”

그렇게 하여 진지왕은 스스로 자리를 물러난 후 정처 없이 떠돌다 사라졌다. 사람들은 음란하여 여념 집 아녀자를 훔쳐 달아난 왕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이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이후로 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월성(月城)에서 남쪽 십여 리 떨어진 곳의 숲으로 들어가 나무들의 귀신이 되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곧이듣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유괴되었다던 도화녀는 무사히 사량부로 돌아왔다. 그녀의 부모는 딸이 목숨을 걸고 정절을 지켰다며 떠벌이고 다녔다. 정절을 지켰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이냐며 따져 묻는 동네 사람들에게 부모들은 태후마마의 성은이라며 동네잔치를 벌였다. 도화녀는 하루 종일 울다 웃다 마치 실성한 것 같았으나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도화녀의 남편은 밤낮으로 술독에 빠져 살다 불량배들과의 시비에 휘말려 맞아 죽었다. 그의 육신은 저자에 버려진 체 아무도 수습하지 않았으나,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도태후의 명에 의해 장사가 치러졌다.

그로부터 2년 후, 가랑비 흩뿌리는 어느 날 밤에 오색구름이 도화녀의 침실을 감쌌다. 도화녀는 익숙한 노랫소리에 눈을 떴다.

'미실(美室)의 수레 철커덕철커덕, 연두 빛 깃옷은 새싹처럼 고운데~

어찌 당신 생각 않겠소. 그대가 주저할까 두렵다오.

태후(太后)의 수레 덜커덕덜커덕, 붉은빛 깃옷은 보석처럼 고운데~

어찌 당신 생각 않겠소. 당신이 아니 갈까 두렵다오.

살아서는 만나지 못해도, 죽어서는 함께 있을 거요.

내 말을 아니 믿는다 해도 내 마음 햇빛과 같이 변하지 않을 것이오~


왕이 요고를 두드리며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드러날 정도로 창백한 얼굴이었다. 왕은 도화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도화녀는 버선발로 왕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어디 갔다 이제 오십니까? 그날 그분을 따라가시고선 여태껏 소식도 없으시고, 곧 돌아온다 하시고선 소녀 혼자 남겨두시고... 흐흐흑~”

왕은 그녀의 허리를 깊숙이 껴안았다.

“그럴 일이 있었느니라. 노리부가 어마마마의 기별을 전한다고 하여 따라나섰던 길인데, 너에게 다시 돌아오기까지 이태나 걸리었구나!”

“왕께서 사라지신 후 망측한 소문이 얼마나 나돌았는지요! 왕귀(王鬼:귀신이 된 왕)가 되셨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왕은 멈칫하며 도화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는지요?”

“아니다. 그 소문이 영 틀린 것은 아니겠구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알 수 없는 말씀만 하시니...”

“그러하냐? 하하하! 너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건만 쓸데없는 이야기로 네 심기만 어지럽혔구나. 어디 보자꾸나 내 사랑~”

왕은 도화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도화녀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왕의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이내 연민을 느껴 입김을 불어 쓰다듬었다. 왕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도화녀와 함께 침상 위로 쓰러졌다. 오색구름에 휩싸인 도화녀의 침실엔 아무도 얼씬 거리지 못했고, 둘의 사랑은 어느 누구의 방해도 없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그렇게 이레가 지난날 아침, 왕은 또다시 오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도화녀는 왕이 누워있던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흐느꼈다. 딸의 울음소리에 놀란 부모가 방문을 열어졌혔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어 서럽게 우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으나, 도화녀는 지난 이레간의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왕께서 머물다 가셨다는 도화녀의 말을 부모는 곧이듣지 않았다. 왕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죽은 사람이 살아서 나타날 리가 없지 않느냐고, 이제는 왕을 잊고 새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냐고,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왜 이레가 지났다고 거짓말을 하느냐고, 이제는 실성까지 한 것이냐고 부모는 발을 동동 구르며 꾸짖었다.

신기한 것은, 그날 이후 도화녀는 자주 구역질을 하였고 서서히 배가 불러왔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상상하여 임신한 것이라며 발을 동동 구르며 딸을 원망했다.

도화녀의 소문이 저자에 퍼지자, 부모는 난감해하며 이와 같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들은 죽은 왕을 왕귀(王鬼)라 낮잡아 부르며, 왕귀가 나타나 한 번만이라도 도화녀와 정을 쌓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여, 마침 도화녀는 과부이고 한때 왕이었던 귀신의 간곡한 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弄)치지 말라며 힐난하였으나 점점 불러오는 도화녀의 배를 보고선 신기한 일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달이 차자 도화녀는 남자아이를 출산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서라벌 전역에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갓난아이를 보기 위해 사량부로 모여들었다. 월성에서도 관리들이 나와 도화녀의 부모에게 자초지종을 탐문했다. 세간의 이목을 두려워한, 아니 사도태후의 관심을 두려워한 이 불쌍한 도화녀는 의지할 곳이 없자 부득불 양중이(남자무당)에게 앞으로의 일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양중이는 점괘를 전하며 앞으로 그녀가 감당해야 할 험난한 인생살이를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된 마당에 자신의 재취(再娶)로 들어온다면 보살펴 주겠다며 겁탈하려 하였다. 뒤꽁무니를 빼는 도화녀의 등 뒤로 양중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열다섯 살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기만 해! 그때 살길이 트일 게야! 명심 하거라! 앞으로 십오 년이다!”

그날 밤, 도화녀는 양중이의 말에 따라 바다에서 삼십 리 저자에서 삼십 리 떨어진 골산을 찾아 비형랑을 안고 담을 넘었다.

계속...
글 그림 : 노길상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