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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주년 특집] '임정의 수호자' 석오 이동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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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주년 특집] '임정의 수호자' 석오 이동녕 선생

김구의 스승이자 임정의 주춧돌 이동녕 선생을 되새기다

▲임시정부 주석시절 이동녕 선생(앞줄 가운데) ⓒ천안시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는 해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근간이 된 임시정부 수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희생이 깃들어 있다.

임정을 대표하는 인물로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을 쉽게 떠올리지만 26년에 걸친 임시정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100년전 오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유지를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 석오 이동녕 선생이다.

석오 이동녕선생은 임정에서 주석 4차례, 의정원 의장 3차례, 국무령, 국무총리를 지냈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그를 두고 '임정의 정신적 지주'라는 평을 내놓기도 한다.

이동녕 선생은 1869년 2월 17일 충남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한 이동녕은 1892년 과거(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 대신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

1896년에 서재필 등이 조직한 독립 협회에 참여해 활동하며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독립 협회가 주최하는 만민 공동회가 열렸을 때 정부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이로 인해 이준·이승만 등과 함께 체포 돼 7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06년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해 이상설·여준 등과 한인 동포들의 교육을 위해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열었다

1907년 4월 안창호·이회영·양기탁·전덕기·이동휘·유동열·이갑·김구 등과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해 국권 회복 운동을 시작한다.

1910년 한일 강제합방이 이뤄지자 서간도로 망명해 이회영·이시영 형제들과 경학사와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세웠다.

1914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등과 뜻을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

1919년 2월 1일 조소앙·안창호·신채호·김좌진·이승만·김약연·이상룡 등과 이른바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다.


100년전 오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부정하는 독립 선언이 발표되고 이를 계기로 ‘독립국’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중국 상하이(上海)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4월 10일 조소앙·신채호·이시영·신석우·여운형·신익희·이광수 등 29명이 모였다.

이들은 이날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 채택, 헌법 제정 등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날 모임을 임시의정원이라고 명명하고 의장과 부의장에 각각 이동녕과 손정도를 선출했다.

지금의 대한민국 근간은 여기서 부터 시작됐다. 대한민국의 국회는 당시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것으로 1996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에 이동녕 흉상을 세워 그날의 뜻을 되새기고 있다.

하지만 출범한 임시정부의 대통령인 이승만이 상해에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의 각원들 사이에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통합 정부 출범 직후부터 대두됐던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문제가 더욱 격화되어 탄핵 문제로 확대되는 상황까지 오면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많은 인사들이 임시정부에 등을 돌려 이로 인해 정부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임정 세력이 파벌 다툼과 노선 투쟁으로 분열하자 국민대표회를 소집하고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하는 등 통합에 앞장섰으나 좌절을 맛봤다.

1930년 안창호·김구·조소앙·이시영·김두봉·안공근 등과 함께 임정의 여당 격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해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그의 마지막 당부 '대동단결'(大同團結)'

임시정부 수립 2년 후 임정 지도자들이 이념 대립으로 뿔뿔히 흩어지는 와중에도 이동녕은 독립운동가들을 단합시키기 위해 애썼다.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임하자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시정부의 활동을 계속 이끌거나,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여는 등의 활동을 했지만 임시정부의 내분이 가속화는 막지 못했다.

그 후 이동녕은 굳건히 임시정부의 자리를 지키며 임시정부 국무령, 주석의 자리에서 신민회를 계승한 독립운동 정당인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그러다 폐렴으로 1940년 3월 13일 치장에서 72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가 동지들에게 당부한 마지막 말은 '대동단결'(大同團結)이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날까지도 오로지 분열 된 임정의 미래를 걱정했을 정도다.



업적에 비해 낮은 평가 반드시 재조명 이뤄져야

이동녕은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인물이지만 업적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 후손이 그렇 듯 이동녕 선생 후손도 어려운 형편으로 지내고 있다.

이동녕 선생의 뜻을 계승하고 기리는 기념사업회도 없었다가 지난해 11월에야 석오이동녕선생선양회가 발기인대회를 열고 선양회의 활동이 시작됐다.

그의 고향인 천안시에서도 최근 유관순 열사 서훈 등급 상향에 발맞춰 이동녕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서훈 상향 운동을 추진 중이다.

현재 대통령장 2등급인 독립유공자 서훈 건국훈장을 대한민국장 1등급으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

그의 업적이 재조명 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임정 100년이 되서야 이동녕선생 알리기가 시작했다는 것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석오이동녕선생선양회 서문동 초대회장은 "이동녕 선생은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김구의 스승으로 임시정부의 수호자로의 업적을 잊어서는 안된다. 선양회는 이동녕 선생의 업적을 알리는 일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임시정부 수립의 중심에 있는 이동녕선생을 알리고 술고한 그의 뜻을 계승하는 사업을 활발히 펼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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