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의 한 고위관계자와 지난 주말인 21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대선이 끝난 뒤라 자연스레 선거와 앞으로 전망, 새 정부의 당면과제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뤘다.
그는 경제부처 등이 운집해 있는 과천 제2종합청사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노 당선자의 빈약한 '인재풀'은 강점이자 약점"**
"솔직히 말해 과천청사에서는 창(昌) 지지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공무원들에게 변화보다는 안정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데다가 K1(경기고) 출신과 서울대 출신들이 많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을 낳은 또하나의 결정적인 대목은 노(盧)쪽 하고는 접촉하고 싶어도 마땅한 '통로'가 없다는 점이 아니었나 싶다. 노무현 당선자가 상고 출신인 데다가 독학으로 사시에 합격했기에 '학연' 등이 약했기 때문이다.
물론 부산의 명문고인 부산상고 출신이 현재 재계, 금융계 등에 적잖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다. 아울러 노 당선자가 절대로 학연, 지연 등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단언한 만큼 부산상고 출신이라 해서 중용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학연에 묶이지 않으리라는 점은 노 후보의 강점이다. 국정에 가장 중요한 '인사'를 할 때 공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약점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인재풀'의 빈곤 때문이다.
국정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사다. 그런 면에서 인재풀이 빈약하다는 것은 큰 약점일 수도 있다. 인재풀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인다."
"이번 선거는 각 부문에서 '세대교체'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공무원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이것이 시대의 대세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노 당선자는 주위에 두터운 인재풀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 할지라도, 이름은 잘 알려져 있으나 생각은 과거에 묶여 있는 명망가형 전직 경제관료들보다는 참신하면서도 능력을 갖춘 인재를 발굴하는 데 진력해야 할 것이다.
한 예로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자신과 아무런 연줄도 없던 이헌재를 발굴해 IMF 경제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노 당선자는 숨어있는 '제2의 이헌재'를 찾아내야 한다."
***"노 당선자, 일을 맡기면 믿고 확 맡기는 스타일"**
노무현 당선자 진영의 한 관계자도 비슷한 맥락의 고민을 토로했다.
"노 당선자는 같이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믿고 확 맡기는 스타일이다. 일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는 김대중 대통령과는 상당히 다른 대목이다. 그런 만큼 노무현 새 정부의 경우 '초기 인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무현 정부의 각료나 참모들은 과거 전두환 정권초기의 고 김재익 경제수석 같은 권능과 책임감을 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 당선자 주변에도 많은 젊은 인재들이 있다. 기존 민주당의 '인재풀'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 당선자를 기다리고 있는 경제, 대미외교, 남북관계 등 국내외의 엄중한 도전들을 볼 때 과연 이들만 갖고서 난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특히 노 당선자 주변에는 개혁성향의 젊은 학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 게 특징이다. 실물경험이 많은 주류인사들이 이회창 후보쪽을 선호했던 것도 이런 결과를 낳은 한 요인이다. 이런 젊은 진영은 기득권이 오염되지 않아 원칙적 개혁을 할 수 있다는 큰 강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실물경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은 보수진영의 대반격을 초래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시행착오'도 허용되지 않아야 할 노무현 당선자에게는 여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실물경험이 많으면서도 개혁적 성향의 인재들을 찾아야 하는 게 노 당선자의 최대 당면과제인 셈이다."
"노 당선자가 인수위 구성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한 최근 결정은 아주 잘한 것이다. 인수위의 최대 과제는 노무현 정부의 초기 인선이다. 그런 만큼 서두르지 말고 각 부문의 숨어있는 인재들을 두루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노 당선자가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끌어들여야 한다. 선거승리후 노 당선자 주위에 몰려드는 불나방들보다는 자기가 맡은 부문에서 매진하겠다는 이들의 협력과 조언을 끌어내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DJ 실패는 타산지석의 교훈**
김대중 대통령은 97년 집권후 'DJP 연합'이라는 큰 짐 때문에 인사를 할 때 말못할 고심을 많이 해야 했다. 건교부, 산자부 등 주요 경제부처의 수장 자리를 JP에게 양보해야 했고, 공기업 인사도 상당수 JP의 주문에 따라야 했다. 현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개각 때마다 JP가 김 대통령을 만나 자신이 원하는 추천자 명단을 전했고 김대통령은 이를 수용해야 했다"며 "공기업 요직인사 가운데 1백여명이 JP몫이었다"고 전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김 대통령은 어려울 때 자신의 싱크탱크 역할을 해온 '중경회' 등에 대한 신뢰도 및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컸고 그 결과 이들을 요직을 중용해 JP세력을 견제케 했다. 하지만 학자군이 중심이 된 이들 라인은 실물경험 부족으로 적잖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했고, 이는 기득권층의 반(反)DJ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한 프레시안 독자는 노무현 후보 당선 직후 보내온 글에서 노 당선자에게 '정밀한 개혁'을 주문했다. "단 한 번의 시행착오도 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집권을 준비하라는 조언이었다.
***'논공행상' 대신 '삼고초려'해야**
노 당선자가 직면한 경제, 외교, 정치적 상황은 실로 삼엄하다.
외형상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경제는 실상 '세계 동반 디플레이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또한 중국의 초고속성장 위협 하에서 "우리나라가 과연 3~5년후 뭘 먹고 살아야 할지"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외교는 더욱 삼엄하다. 북-미 관계는 나날이 벼랑끝 대치국면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이에 비례해 남북관계도 교착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1백48석의 의석을 갖고 있는 한나라당이 내부분열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는 하나, 여소야대 국면은 쉽게 타파되기 힘든 국면이다.
이들 현안 가운데 하나라도 잘못 처리한다면, 노무현 정부는 현재 사태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기득권층의 거센 반격에 직면할 것이다.
도도한 민의(民意)는 자칫 거꾸로 돌아갈 뻔 했던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시 앞으로 구르게 했다. 이제 공은 노무현 당선자 쪽으로 넘어왔다. 대선말기에 약속했듯 '논공행상'이 아닌 '삼고초려'의 인사를 실천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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