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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한당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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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한당들의 시대

소설 <불한당들의 시대> ③

이우학교 미술교사이기도 한 노길상 작가의 픽션 <불한당들의 시대>를 연재합니다. <불한당들의 시대>는 7세기 경의 한반도 역사를 극화(劇畫:그림이야기) 형식의 판타지 소설로 창작한 것입니다. 부석사의 연기 설화를 바탕으로 의상과 선묘, 그리고 두 사람과 관계된 실존 또는 가상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편집자)

4. 여근곡(女根谷)의 참살(慘殺)

알천과 한신이 여근곡을 향하고 있을 즈음...


올해도 선도산(仙桃山)의 복사꽃은 흐드러지게 피었다. 매년 오월, 선도산에서 부는 바람에는 그윽한 복사꽃 향이 유별났다. 그 바람에 이끌려 귀족의 자제들은 묘수(妙手:노래와 춤이 뛰어난 기생)들의 꽁무니를 쫓아 선도산을 찾았다.

자제들 중 대다수는 당풍(唐風:당나라의 유행)의 호협(豪俠:호걸의 의기를 가진 자)에 경도된 자들이었으니, 이른바 협골향(俠骨香)은 그들의 좌우명이었다. 협골향이란 평범하고 안락한 일상을 경멸하고 협객으로서 죽음을 불사하며, 대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영웅적 기개를 일컬었다.

화랑도(花郞徒)에 소속되어 노래와 춤을 즐기고 무예를 익히며 명승(名勝)을 찾아 호연지기를 함양했던 신라의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호협의 유행은 광풍과도 같았다. 이 현상에 대하여, 구재(口才)를 일삼는 자들은 협골향이 곧 화랑도(花郞道)의 정신이며 신라의 전통 사상인 풍류도(風流道)의 다름 아니라 주장하였다. 삼한(三韓)시대부터 유구히 전해 내려왔던 풍류도가 오래전 중원으로 전파되어 현재의 협골향에 이르러 다시 역수입되었다는 것인데...

그런 풍문과는 다르게, 협골향에 대한 열광적인 추종은 장안(長安)의 최신 당풍(唐風)을 흉내 낸다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그날따라 선도산의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지키는 위병들은 온데간데없었고, 수문병 몇몇이 성문 주변을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서형산성은 월성(月城:신라의 왕궁)의 외성(外城)으로서 항상 경계태세가 삼엄하였으나, 마침 예외적 상황이 그날 있었다. 그러나, 호협 중에는 위병이 사라진 이유를 궁금해 하는 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위병들의 감시를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겼으니, 협골향에 고무된 화랑, 즉 호협들이 좀 더 과감한 도발을 할 분위기가 무르익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호희(胡姬:페르시아 여인)처럼 짙은 속눈썹과 도화 빛 붉은 뺨의 묘수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보요(步搖:작은 구슬이 달린 머리 장식) 소리를 내며 사내들을 가로질렀다. 부채로 거슴츠레한 표정을 숨기며 허리를 흔들 때마다 구슬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그녀의 몸짓에 따라 휘파람 소리와 탄성이 일어나거나 수그러졌다. 혈기로 충천한 사내들의 뜨거운 시선은 묘수의 몸을 더듬다 못해 벗은 몸의 은밀한 감촉과 향내까지 샅샅이 탐욕 하였다.
계곡 중앙의 너럭바위에 올라 선 묘수는 붉은 입술 사이로 소리를 흘렸다. 그녀의 노래는 맑고 청아한 계림풍과는 다르게 중저음이 낮게 깔리는 음색이었다. 단번에 혼을 빼앗긴 호협들은 비단옷의 스침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였고, 그녀가 노래를 부르며 부채를 살짝 놀리기라도 하면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고 도처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굵어졌다.

백화가 제방 한들 선도산 도화만큼이겠소

일시 춘색 비난 마소 불거 난 도화향이오

선홍빛 자욱하게 흩뿌려진 선도산 도화골

도화 원향 어디 메요 무릉 노인 찾던 그곳

오늘이면 개화 만발이나 내일이면 낙화 불망이요

노래가 끝나자 또다시 환호성이 터졌다. 그녀는 호협들의 상기된 입김 사이로 보요 소리를 흘리며 유유히 사라졌다. 숨죽였던 사내들이 아쉬움으로 아우성을 쳤으나 묘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때, 묘수가 사라진 유막(油膜) 사이로 개구리 가면을 쓴 사내들이 뛰쳐나왔다. 사내들은 너럭바위 위로 단번에 뛰어올라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알이 유난히 툭 불거진 개구리 가면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호협들이여~ 반갑소이다!"

사내의 굵고 거친 목소리는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라벌의 봄은 선도산 복사꽃으로 시작되오. 이 선도산 옥류계곡이 선홍빛으로 물들 때, 우리 호협들의 의기도 마냥 들뜨는 것 같소. 하여 오늘 이 모임을 마련하였소. 그런데 말이오, 나는 저 복사꽃을 보면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소!"

묘수의 잔상에 허우적거리던 호협들이 하나 둘 사내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오년 전을 기억하시오? 그날도 복사꽃 향기가 온 산에 진동했었소!"

호협들은 사내의 말에 묘한 힘을 느끼며 곁으로 다가갔다.

"오년 전 오늘, 바로 칠숙(柒宿)이 무참히 죽은 날이오! 석품(石品)도 그때 죽었소."

수년 동안 금기시된 칠숙과 석품의 이름이 호명되자 좌중은 쥐 죽은 듯 했다.

"칠숙과 석품이 대역 죄인이라 다들 숨죽이고 있지만, 진정으로 나라를 염려했던 우국 충신이었단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소! 충언하는 신하를 그렇게 무참히 죽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오. 협골향을 흠모하는 화랑들이여! 칠숙은 우리들의 뜻을 대변하다 우리 대신 죽은 것이오. 그가 사사로이 안녕을 쫓았다면 그렇게 죽었겠소? 그들은 마지막까지 호협답게 죽었소! 여왕의 부당함을 충심으로 간언 하다 죽었단 말이오. 이것이 어찌 대역죄란 말이오. 그렇지 않소?"

그랬다. 진평왕이 덕만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대신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특히, 혈기 충천한 화랑들 중 호협들은 몸을 사리는 대신들을 비난하며 왕에게 직접 간언하는 도발을 서슴지 않았는데, 칠숙과 석품은 그들을 대표하여 왕에게 권간(勸諫)했다. 칠숙은 진흥왕대에 있었던 원화(源花)의 분란,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 사이의 다툼을 예로 들어 여왕 통치의 부당성과 위험을 에두르지 않고 직언했다. 그는 왕의 엄명에도 굴종하지 않고 호협의 진정한 용기를 드러내려 하였고, 석품은 언제나 그의 오른편에 있었다.

사내는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소? 진평왕은 칠숙의 구족(九族)을 모조리 죽였고, 석품은 처자식 앞에서 목이 떨어졌소. 단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하여 신하의 충언을 족멸로 되갚았소. 그렇다면 지금의 여왕이 태평성대를 이루기라도 하였소? 성조황고(聖祖皇姑:성스러운 혈통과 할머니처럼 인자한 여자 황제)라고들 하지만, 소가 웃을 일이오. 국정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이미 수개월째요. 기껏 한다는 일이 선왕을 기리는 법회에만 열중이오. 조정의 형국이 이럴진대, 주변 나라들이 신라를 어떻게 보겠소! 그 무도함이 공공연하여 이제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소. 시국이 이럴진대 여왕은 모리배들에 둘러싸여 구중궁궐 깊은 곳에 숨어버렸소. 신하들의 충언에는 눈과 귀를 닫았고, 급기야 개구리 소리라며 무시하고 있으니. 여왕의 잔약함은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요. 내 말이 틀렸소?"

사내의 열변에 경도된 화랑들은 주먹을 불끈 쥐거나 입술을 깨물기도 하였다.

"개구리 가면을 쓰고 나온 이유를 이제 아시겠소? 우리들의 충언을 개구리 소리쯤으로 무시하는 여왕에 대한 항의요! 그리고 나는 칠숙과 석품처럼 당당하게 외치려 하오."

사내는 쓰고 있던 가면을 이마 위로 올렸다.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호분을 뒤범벅하고 눈 주위로 붉은빛 화장이 섬뜩하였다. 사내의 얼굴은 호협들의 짧은 탄식과 의아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반응을 예상했는지 사내는 오른손을 높이 추켜올리며 다시 연설을 이어갔다.

"내 얼굴이 괴이하다 여기지 말아주시오. 이것은 피눈물을 흘리며 억울하게 죽은 칠숙과 석품에 대한 경의와 애도의 표현이오!"

그사이 눈알이 유난히 불거진 개구리 가면과 함께 너럭바위에 올라섰던 사내들이 호협들에게 가면을 나눠주었다. 개구리 가면을 건네받은 호협들은 앞다투어 착용했다. 선홍빛 복사꽃 만발한 옥류 계곡과 녹색의 개구리 가면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잠시 뜸을 들인 사내가 치켜든 손을 단단히 움켜쥐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칠숙과 석품의 유언을 다같이 외쳐보려 하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다면, 협골향을 흠모하는 우리들의 의기가 시들지 않았다면... 함께 따라 해주시오!"

개구리 가면을 쓴 호협들은 모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유난히 눈이 툭 불거진 개구리 가면의 사내가 외쳤다.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사내의 선창에 개구리들의 함성이 뒤따랐다.

"여주불능선리!"

"그렇소. 여왕은 임금으로서 가망이 없소! 애당초 아녀자로서 불가한 일이었소! 우두망절하는 여왕을 더 이상 묵과하는 것은 불충이오! 우리 모두 협골향으로 떨쳐 일어납시다!"

"여주불능선리!"

개구리들이 연이어 구호를 따라 했다. 그 소리는 옥류계곡을 쩌렁쩌렁 울렸고, 마치 끊임없이 밀려오는 동해 바다의 검푸르고 거대한 폭풍우와 같았다.

그때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그림자가 유막(油膜)에 드리워졌다. 이내 묵직하면서도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쏜살같이 날아간 화살은 눈알이 유난히 불거진 개구리 가면의 손을 관통하고 반대편 나무에 박혔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너럭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를 둘러쌌던 개구리들도 함께 나뒹굴었다. 이윽고 계곡을 둘러싼 유막 너머에서 화살이 비 오듯 날아들었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날렵한 몸놀림의 호협들이 내빼려 했지만 사방에서 날아든 쇠갈고리에 찍혀 소용없었다. 순식간에 허공에 매달린 시체가 부지기수였다. 맑은 물이 흐르던 계곡엔 붉은 선혈이 범벅되어 넘쳐흘렀고 시체가 겹겹이 쌓여만 갔다.

화살 공격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개구리들의 몸은 일견 고슴도치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무애를 익히고 몸을 달련했던 화랑들이었건만, 전광석화처럼 감행된 기습 공격엔 속수무책이었다. 소름 끼쳤던 것은 계곡에서 죽어간 화랑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공격자들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습격자들은 유막 뒤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의 공격은 마치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정확하게 계획되고 빈틈없이 실행되었던 것이었다.

죽은 자들의 피와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소리가 계곡을 따라 널브러지고 있을 때, 사방을 둘러싼 유막에 불이 붙었다. 유막은 삽시간에 타오르며 호협들의 시체로 옮겨 붙었다. 살과 터럭이 타는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젊고 아름다웠던 호협들의 몸은 타다만 고사목처럼 이리저리 나뒹굴었고, 신원을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살과 뼈가 짓뭉개졌다. 불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불길이 잦아든 것은 짙은 산그늘이 드리워지며 모든 것이 어둠에 가려진 이후였다.


옥문지 주변으로 병사들이 불을 밝혔다. 수면 위로 비친 횃불이 일렁이며 춤을 췄다. 여왕은 요란한 개구리울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옥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들만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안절부절못하였다. 그 와중에도 김용수는 아들 김춘추의 부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대장군 김서현과 그의 아들 김유신은 심각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저물어가는 하늘을 힐끔거렸다.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파발마의 발굽소리가 침묵에 쌓인 옥문지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말 등에서 뛰어내린 전령은 곧장 여왕에게 달려갔다. 대신과 장군들이 조급한 걸음으로 모여들었다.

"전황을 아뢰겠나이다."

여왕은 옥문지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말해 보거라."

"성조황고마마의 명을 받고 여근곡을 수탐 한 결과, 잠입 중인 백제군 오백을 발견하고, 이들을 유막으로 포위 후 화공으로 공략하여 몰살시켰나이다!"

대신들과 장군들은 경악했다. 서라벌 지근까지 백제군이 잠입하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할 말을 잃은 대신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볼 뿐 어떠한 언설도 내뱉지 못했다. 왕도의 경계를 맡은 대장군 김서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구재(口才)를 일삼는 몇몇 신하들은 여왕의 예지가 아니었다면 백제군이 왕도를 공격하였을 것이고, 이는 곧 신라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몸서리쳤다. 그중의 몇몇은 황급히 여왕 앞으로 나아가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성조황고마마 만세! 만세! 만세!"

급기야 다른 대신들과 장군들도 연신 엎드리며 절규에 가까운 아우성 소리가 이어졌다.

"성조황고마마 만세! 만세! 만세!"

문무백관들의 난리법석에도 여왕은 여전히 수면 위로 일렁이는 횃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식경이 지나도록 소란은 계속되었고, 알천과 한신의 군사들이 나타날 즈음에야 진정되었다.

한 손엔 말고삐를 다른 손엔 구겸창(鉤鎌槍:갈고리 모양의 가지가 달려있는 창)을 움켜쥔 알천의 모습은 위풍당당했다. 부장 한신도 고개를 치켜들고 뒤를 따랐다. 말에서 내린 알천과 한신은 투구를 벗어 허리에 차고 여왕을 향해 걸었다. 문무백관들이 좌우로 물러났다.

그들은 여왕 앞에 무릎을 꿇고 득의양양하게 소리쳤다.

"신(臣) 알천, 성조황고마마께 전황을 보고하겠나이다."

"그리하시오!"

여왕은 여전히 호수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마마의 명을 받고 여근곡을 수탐 한 결과 백제의 오백여 결사대를 발견하였고, 한 놈도 살려두어선 안되겠다는 판단 하에 유막으로 포위하여 화공(火攻)을 감행하였나이다. 적군은 몹시 당황하여 줄행랑치기 바빴고, 그들 중 대다수는 한신이 이끄는 궁수들의 공격으로 모두 섬멸되었나이다. 개중에 살아남은 자가 있어 신이 직접 추문하였더니 백제 장수 우소(于召)라는 놈이었습니다. 여왕께 대령하겠나이다."

알천이 뒤를 돌아보자 한신이 팔을 흔들었다. 이윽고 백제국 갑옷을 입은 사내가 끌려 나왔다. 양팔이 붙잡힌 우소는 다리가 뒤틀려 굴신조차 못하였다. 곳곳에서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제야 여왕은 시선을 거두어 끌려 나오는 우소와 몰려든 문무대신들을 바라보았다. 그 때, 여왕의 몸은 횃불 빛에 반사되어 발갛게 발광하며 빛났다.

"네 놈이 백제국의 우소이더냐?"

겁에 질린 자의 입에서는 말소리 대신 붉은 선혈이 뿜어졌다. 혀가 뽑혀 있었다. 여왕은 탐문을 멈추지 않았다.

"너는 어찌하여 여근곡까지 군사를 이끌고 올 수 있었더냐?"

우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는 동작을 하였으나 여왕은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어서 말하라. 너는 군사들을 이끌고 서라벌 코앞까지 침투하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였는지 말하라. 순순히 말한다면 너의 고통은 짧을 것이다. 어서!"

피거품을 쏟아내며 우소는 계속해서 손을 휘저었으나 여왕은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간절하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우소의 손이 여왕의 용포를 스친 순간, 호위하던 알천이 버럭하며 구겸창을 뽑아 들었다. 순간, 여왕이 고함을 질렀다.

"멈추어라. 알천! 짐(朕)의 심문이 끝나지 않았나니!"

그 순간, 꾸벅꾸벅 졸고 있던 김용수가 번쩍 눈을 떴다. 노기 어린 여왕의 얼굴이 그의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바로 그 모습이었다. 호수면 위로 길게 늘어진 여왕의 그림자는 간밤의 꿈에 나타났던 바로 그 형상이었다. 그제야 꿈의 모든 의미를 알아챈 김용수는 몸을 떨며 말했다.
"개구리 다 죽네, 개구리 다 죽는다."

여왕의 심문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너의 힘만으로 어찌 서라벌까지 숨어들 수 있다는 말이냐. 이는 분명 배후가 있다는 것이니... 어서 말하라! 어서!"

결국, 우소가 실신하여 엎어지고 나서야 심문은 멈추었다. 우소는 차마 눈을 감지 못하였고, 혀가 뽑힌 입에서는 계속 피거품이 쏟아져 나왔고, 손가락은 핏물로 무엇을 쓰다 말고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피가 흥건한 시신을 치우는 동안 횃불 타오르는 소리만 들릴 뿐, 여왕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문무대신들은 터럭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내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마마~ 밤공기가 차옵니다. 환궁을 서두르심이..."

우레와 엄고(嚴鼓)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을 갈랐다. 백관과 군사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여왕의 연(輦)을 뒤따랐다. 월성으로 가는 길가엔 어떤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밤마다 극성이었던 개구리 소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여왕의 행차를 알리는 호령 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김용수는 겨우 발걸음을 옮기며 아들 김춘추을 꼭 붙잡고 알 수 없는 말만 되풀이했다.

"우리 개구리... 우리 개구리는 죽지 않았네."

김춘추는 늙은 아비를 부축하며 묵묵히 어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해마다 오월이면 계림의 선남선녀들은 노래를 부르며 선도산 곳곳에 피어난 복사꽃 향기를 따라다니며 노래했다.

백화(百花)가 피어 본 들 선도산 복사꽃 만큼일까요.
한낱 춘몽(春夢)이라 비난하지 말아요. 붉게 피어난 복사꽃 향기예요.
핏빛 복사꽃이 쓰러져간 선도산 골짜기.
성스러운 혈통의 할머니는 간데없고 젊은 꽃만 속절없이 떨어지는군요.


계속...

글 그림 : 노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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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상

이우학교 미술교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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