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쿠, 펑크 났어요." 추니가 캠핑장을 막 나서다가 말고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안장에서 내렸다. 만능 키와 인천 총각이 달려들어 후다닥 앞바퀴 튜브를 교체했다.
오늘은 오타고 센트럴 레일 트레일 150킬로미터 구간의 3일째 마지막 코스인 미들마치까지 65킬로미터를 달릴 예정이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여전히 긴 능선은 넘실대며 끊임없이 내게로 다가왔다가는 사라졌다. 페달 아래 까마득한 계곡을 지나 점차 마운틴 쿡 산맥을 벗어나 태평양 쪽으로 향했다.
오전 11시. 보슬비를 참다못해 우비를 꺼내 입었다. 점심도 먹을 겸 옛 철길 승강장에 들어서자 다른 자전거 가족들도 속속 모여들어 초만원이다. 식빵에 치즈 한 겹 얹고 딸기 잼을 발랐다.
“일본인이세요?”
“아니요. 한국에서 왔어요.”
“자전거 여행 오셨습니까?” 자국민인지 유럽 인인지 분간 안 되는 젊은이가 내게 물었다.
“네, 뉴질랜드를 횡단하고 있어요. 크라이스트처치를 떠나 오클랜드로 가는 중이에요.”
“며칠간입니까?”
“47일 동안요.”
“와우. 오랜 기간입니다”
“가족 같아요. 행복해 보이네요. 어디서 오셨나요?”
“네, 독일에서 왔습니다. 유명한 오타고 트레일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아∼. 독일에서요?”
“네, 알렉산드라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종점인 미들마치까지 간 뒤 거기서 자전거를 반납합니다.”
“그렇군요. 자전거를 독일에서 직접 가져온 게 아니군요.”
“네. 오늘 오타고 트레일을 달리고, 내일은 밀퍼드 사운드를 관광할 예정입니다.”
“멋진 프로그램이네요. 우리 일행은 엊그제 밀퍼드 사운드를 갔었어요. 거기 정말 판타스틱했어요.”
“정말 기대됩니다.” 독일 가족들도 선 채로 샌드위치 한 개씩을 먹었다.
“비 오니까 추워요. 혹시 오늘 일기 예보 들으셨나요?”
“네,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정도 돼 보이는 자녀들이 즐겁게 라이딩을 함께하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도전 프로그램이다, 극기 훈련이다.’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생활 레포츠로 여기는 것 같았다.
“저도 3년 전에 독일로 자전거 여행 갔었는데 그때도 장마철이었어요.” 내가 말했다.
“독일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네. 제 아내랑 같이 오스트리아 빈을 출발해 도나우 강을 따라 독일로 들어가 로만틱 가도를 달렸지요.”
“아하, 그렇습니까? 저희 포이츠바겐(Feuchtwangen)에 살고 있습니다.”
“아, 거기요. 기억나요.”
“거길 지나가셨습니까?”
“네. 포이츠바겐에 해 저물어 도착했는데 캠핑장이 없더라고요. 때마침 자전거에 장바구니를 단 아주머니를 우연히 사거리에서 만났는데 자기네 집 정원에 텐트를 쳐도 좋다는 거예요.”
“처음 만나신 분입니까?”
“그럼요. 처음엔 제 아내가 무섭다고 거절했어요.”
“아, 그랬군요.”
“뭔가 함정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대요. 암튼 초대받아 거실에서 따끈한 커피도 마시고, 맛있는 과자도 먹었어요.”
“다행이네요.”
“그러고 나서 열 평 남짓 잔디 정원에 텐트를 쳤지요. 그런데 한밤중에 비가 쏟아지자 아주머니가 우산을 들고 정원에 나와 방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거예요.”
“비가 많이 내렸나 봅니다.”
“네, 하지만 텐트 비 안 새니까 걱정 말고 들어가시라고 했지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텐트에 민달팽이가 빈틈없이 달라붙어 있었어요.”
“네. 독일엔 민달팽이가 참 많습니다.”
“포이츠바겐의 고마운 추억이 아직까지 진하게 남아있어요.”
작은 체구에 나이 지긋하고 말씀도 차분하게 하시던 독일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거실에 커피와 빵, 우유, 과자를 놓아두고 저녁에 외출을 나가면서 TV 시청도 하면서 마음껏 편히 쉬라고 하던 인자한 모습과 오늘 만난 자전거 가족이 어우러지며 오래 전 친숙한 사이인 듯했다.
“이제 가죠. 비가 멈출 것 같지 않네요.” 만능 키가 말했다.
“먼저 출발합니다.” 인천 총각의 출발 신호와 함께 나도 그 뒤를 따랐다.
비바람은 점점 강해지고 선글라스에 빗물이 맺혀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앞으로 3시간 정도는 더 가야 오늘의 목적지 미들마치에 도착할 것 같았다.
앞서가던 만능 키가 멈췄다. 자전거에 부착한 가방 고리가 벌어지면서 자꾸 가방이 튕겨져 나와 땅바닥에 끌렸다. 비포장길과 물웅덩이를 덜컹거리며 통과하느라 짐의 무게를 못 견디는 것 같았다.
“밧줄로 묶어보는 게 어때요?” 내가 훈수를 뒀다.
“이거 꽤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속 썩이네요.” 만능 키가 자꾸 떨어지는 가방을 원망했다.
“워낙 짐이 무거워서 그럴 거예요. 게다가 노면도 좋지 않고요.”
“어휴, 한두 번도 아니고.”
뒷바퀴가 회전하면서 흙탕물을 들어올려 온몸을 뒤덮은 모습이 가관이다.
‘내 뒷모습도 그럴 테지.’ 가방 덮은 대형 김장용 비닐 봉투의 작은 틈새로 빗물이 새어 들어가 마치 삼각 우유처럼 귀퉁이에 흙탕물이 고여있었다.
앞서간 인천 총각이 보이질 않았다. 만능 키가 떨어진 가방을 여러 차례 다시 묶어 매는 동안 이미 멀리까지 간 모양이다.
오후 5시, 미들마치 홀리데이 파크 캠핑장에 도착하니 인천 총각이 관리실 옆 로지 빈 방에 들어가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창문에는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메모가 붙어있었다.
“이리 들어오세요.” 인천 총각이 빨강 카펫이 깔린 방 안에서 손짓을 했다.
“아니, 거기 이미 다른 사람이 예약한 방 아닌가요? 바닥에 물이 질척하면 안 될 텐데요.” 만능 키가 말했다.
“우선 진흙 좀 털고 올게요.” 나는 캠핑장 수도꼭지로 향했다. 호스 끝을 꼬옥 눌러 물줄기를 세차게 해 자전거 구석구석에 박힌 흙모래를 씻어냈다.
"어휴, 이런 경험은 한 번으로 끝이다." 입술 새파란 만능 키가 힘겹게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혹시 캠핑장 관리인 어디 계신지 아세요?” 눈이 마주친 16번 로지 할머니에게 물었다.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할머니가 방 안으로 돌아서며 답했다.
“267478***입니다.” 누군가와 얘기를 나눈 뒤 알려줬다.
“네 감사합니다.”
“관리인에게 전화해드릴까요? 손님이 기다린다고요.”
“네,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곳에 들어와 비 좀 피하고 계세요.” 할머니는 전화를 걸면서 내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8번 로지 문이 열려있으니 우선 들어가시고, 숙박료는 나중에 계산하면 된답니다. 1박에 팔십오 달러.” 할머니가 말했다.
잔디 광장 건너 8번 로지는 네 명이 잘 수 있는 더블베드 1개, 2층 침대가 놓여있었다. 서둘러 가방을 풀고 샤워장으로 향했다. 따끈한 물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손끝이 아렸다.
"비 오는데 외식 한 번 하죠." 인천 총각의 제안은 의외였다. 여행 와서 처음 먹어보는 소고기 스테이크 정식이었다. 육질이 부드럽고 1인분에 이십사 달러(이만 원)이고, 둘이 먹어도 될 정도로 푸짐했다.
밤새 강풍에 목조 기둥이 삐걱거리고 침대마저도 흔들렸다. 집이 통째로 날아갈 것 같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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